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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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문학의 정수이자 서양 문학의 효시라 불리는 대서사시 일리아스. 이 작품이 트로이아 전쟁 전체(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하여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고 그리스군과 트로이아군이 공방을 펼치다가 결국 트로이 목마로 트로이아가 함락되기까지)를 다루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사실 내가 그랬다), 일리아스 속의 타임라인은 극히 짧다. 10년 간의 트로이아 전쟁 중 마지막 해 중 51일 간의 기록이며 그 중에서도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 건 4~5일에 불과하다. 많이들 알고 있겠지만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폴론이 자신의 사제를 모욕한 아가멤논에 분노하여 그리스군 진영에 역병을 창궐케 하고, 아폴론 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그리스군 주요 장수들이 회의를 벌이던 중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충돌한다. 명예를 빼앗긴 아킬레우스는 자기 진중(陣中)에 틀어박히고, 최고의 용장(勇將)이 빠진 그리스군은 헥토르가 이끄는 트로이아 군에 연전연패한다. 그리스 군은 함대를 이끌고 트로이아를 침공했기에 해변에 배들을 끌어올려놓았는데, 여기까지 트로이아군이 밀고 들어와 배를 불태우려 한다. 이때 아킬레우스의 시종이자 친우인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에게 간청하여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입고 반격에 나선다. 트로이아의 성벽까지는 진격하지 말라는 아킬레우스의 당부를 잊은 파트로클로스는 트로이아의 제일 가는 장수 헥토르에게 목숨을 빼앗긴다. 친구를 잃은 슬픔에 미쳐버린 아킬레우스는 분노의 화신이 되어 자기 앞을 가로막는 트로이아의 용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헥토르마저 간단히 처치하고 그의 시체를 끌고 그리스군 진영으로 돌아온다. 아킬레우스는 12일 동안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어 끌고 다니며 모욕하나, 아들의 시신을 돌려 받으러 온 프리아모스의 눈물어린 호소에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고, 프리아모스는 트로이아로 돌아와 헥토르의 장례를 치르는 것으로 일리아스는 끝을 맺는다.

이 작품에는 무수히 많은 ‘신과 같은’ 아름다운 청년들이 등장하여 전투를 벌이고 처절히 죽어간다. 고대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혹한 묘사도 눈에 띈다. 작품의 배경이 후기 청동기여서 모든 무기는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고, 이 청동 무기들은 인간의 육체를 간단히 찢어 발긴다. 두 장수가 맞붙어도 단 두 세 합 만에 승부가 결정나고(보통 투창을 던져 상대의 몸을 꿰뚫어서 ‘무릎을 풀어’ 버린다) 승자는 패자의 무구를 벗기느라 바쁘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전투에서 승리한 쪽이 패배한 전사자들의 무구를 벗겨 노획했다. 이는 청동으로 무구를 만드는 데 많은 비용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비로 무구를 마련해야 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부유한 자만이 중무장보병이 될 수 있었다.) 야만적이라고 까지 느껴지지만 실상은 이게 전쟁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삼국지연의 처럼 낭만적인 일대일 대결은 환상이 아닐까?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51일 밖에 안 되는 기간 동안 일어나는 사건의 플롯이 매우 단순하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주요 인물들의 가계도와 역사, 그리고 트로이아 전쟁 전체의 경과가 중간중간 서술되어 번역본의 분량이 7백 페이지가 넘어간다. 그러나 고대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묘사가 구체적이고 심리 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읽는 데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신화와 현실이 마구 뒤섞여 있지만 신들의 의지가 인물들의 행동에 묘한 개연성을 부여하며 올림포스 신들의 강력함이 극의 흐름을 깨뜨리지 않는다. 호메로스가 대문호로 불리는 이유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쟁쟁한 장수들 대부분이 말을 타지 않고 뛰어다니며 전투를 치른다는 것이다. 잘해야 전차를 타고 달리다 뛰어내려 상대와 맞붙는다. 당시는 등자가 발명되기 전이어서 말을 타고 무기를 휘두를 수 없었기에 기병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다. 그래서 뛰어난 명마들이 나오지만 이 명마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은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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