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았는가 - 폭력과 갈등으로 얼룩진 20세기의 기원
로버트 거워스 지음, 최파일 옮김 / 김영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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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은 그 때 까지의 유럽의 전쟁 양상을 극적으로 변화시킨 전쟁이다. 1차 대전 이전엔 양 측 군대가 평지에서 서로 마주보고 횡으로 늘어서서 돌격하는 식의 전투였다. 하지만 1차 대전에 기관총이 투입되면서 이런 식의 돌격은 곧 손쉬운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참호전이라는 새로운 전투 양식이 발명되었고, 1차 대전은 그전과 달리 무척이나 비인도적인 전쟁이 되었다.
기관총과 참호전 외에도 1차 대전으로 말미암은 참혹함은 또 있다. 전투원과 민간인의 구분이 사라진 최초의 전쟁이 바로 1차 대전이었다. 이전엔 국가 간 정규군 끼리만 싸우는 비교적 신사적인 전쟁의 형태였지만, 1차 대전은 무기 체계의 발달로 인해 폭력의 임계치가 무척이나 낮아졌고 민간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1차 대전이 종결된 세상은 평화로웠을까? 저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패전으로 인해 해체되고, 러시아 제국도 볼셰비키 혁명으로 무너진 자리를 수많은 민족국가들이 채우기 시작했다.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자민족 중심으로 아주 우호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민족 간의 폭력적 충돌을 불러왔다. 동유럽에서, 아랍에서, 러시아에서 1차 대전 전까지 다민족 제국의 지배 아래에 살아가던 제국의 신민들은 갑자기 생겨난 권력의 공백과 공산 혁명의 열기 속에서 극단적인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그동안 제국 하에서 억압된 민족적 열정을 용솟음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나, 일제 하 조선에게도 그러했듯 그 자체가 패전국이 아닌 승전국에만 적용되는 원칙이었다. 민족자결주의라는 애매모호하고 임의적인 사조의 영향을 받은 중동과 발칸반도는 지금까지 두고두고 민족 갈등의 화약고로 남아 있다.
또한 오스만 투르크의 뒤를 이은 터키가 그리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던 영국과의 오랜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터키의 전쟁 영웅 케말 아타튀르크의 항전에서 큰 영감을 받는다. 1차 대전 패전국인 터키가 서방 강대국들을 대상으로 대담한 저항을 펼쳐 종국에는 승리를 쟁취한 것 뿐만이 아니라, 전쟁의 과정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표방하여 아르메니아 인과 기독교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강제로 대량 추방한 것에서 말이다. 이후 나치의 반유대주의의 사상적 기반은 사실상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올 여름, 볼셰비키 혁명을 다룬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읽은 후에 그 뒤의 적백 내전을 다룬 책을 한 번 봐야겠다는 욕심이 있었다. 이 책은 비록 적백 내전만을 다루지는 않지만, 1, 2차대전 전간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꽤 흥미로운 역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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