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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A.J.P. 테일러 지음, 유영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0년 1월
평점 :
양장본에 6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1961년 초판이 나오자마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킨 책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2차 대전의 기원을 파헤친 역작이자 초판 출간 당시 아직도 전쟁의 참혹한 경험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쟁의 책임 전가 문제에 대한 논란 등으로 상당한 충격과 반발을 일으킨 책입니다. 저에게는 예전에 도서관에서 읽어 보려다 상황이 안 되어 다 못 읽은 아쉬운 경험이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낸 저자는 방대한 자료와 분석으로 2차 대전에 대해서 분석하고 설명하지만, 핵심적인 주장은 히틀러에게, 카리스마 넘치는 악마와 같은 미치광이 개인으로서, 2차 세계 대전의 모든 책임과 원인으로 돌리는 것에 반대하고 당시 독일인들에게 전쟁 발발의 주된 원인을 묻자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서 유화정책만 시도했던 영국과 프랑스 정치인들이나 자국 내에서 권력과 이득을 취하려 했던 폴란드·체코·오스트리아 정치인들 또 신생 공산주의 국가에서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싶었던 소련의 입장 등을 부가적으로 참혹한 전쟁의 원인으로 들고 있습니다.
그 근거로 저자는 당시의 외교 기록과 히틀러의 발언 및 주요국의 통계 지표를 인용해서, 2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군비 지출은 영국보다 적었으며 이러한 여러 여건들을 고려할 때 당시 독일에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다는 점을 히틀러도 잘 알았다는 것 등을 듭니다. 더구나 히틀러는 경기 하락을 가져올 군비 지출로 국민의 인기를 잃고 싶지도 않았으며 그저 소규모 무력시위와 으름장만으로 승리를 얻으려 했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히틀러의 행동 동기는, 다른 나라의 여느 정치인과 별다를 것 없이, 당시 독일인들의 열망이기도 했던 강력한 독일제국에 대한 열망이었으며 히틀러가 다른 정치인들과 달랐던 점은 행동하기보다 기다리고 실력행사보다는 큰소리를 치는 '벼랑 끝 전술'을 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히틀러는 군비를 은폐하는 대신 부풀렸고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는 척만 했는데, 히틀러를 막아야 할 주요 국가 대표들은 속수무책으로 히틀러가 원하는 일을 알아서 가져다주었다고 분석합니다.
이러한 저자의 분석을 읽어 나가면서 한나 아렌트의 저서가 떠오르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 아렌트와 이 책의 저자간의 교감이 있었는지는 제가 알 수 없지만,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세계 2차 대전의 전범으로 수많은 학살에 가담했던 아돌프 아히히만이 유대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 때문이라고 분석한 것을 히틀러에게도 어느 정도 도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의 저자도 아렌트처럼 당시의 독일에 주목하여 독일인들이 그를 권좌에 올려놓았다고 하면서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공명판으로 봅니다. 그럼에도 전후 히틀러를 악마로서 묘사하고 그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움으로써, 나머지 독일인들은 무죄를 주장할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을 히틀러가 꾸며낸 음모의 실현으로 간단히 치환해 버렸던 당시 주류 역사가들을,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책임을 나눠야 할 모두가 만족스럽기 때문 아니냐며 작심하여 비판합니다.
당연히 초판 출판 직후 히틀러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비난이 들끓었고 결국 저자는 2년 뒤인 1963년 저자가 ‘다시 생각함’이라는 제목의 서문을 덧붙여 히틀러 변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위한 수정이라고 해명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정의하는 역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고와 행동이 빚어내는 돌발적인 사건들과 다시 이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으로 역사에 관철되는 관념이나 철학, 역사를 설명하는 일반론이 있다는 시각에 반대합니다. 즉 인간의 사악함보다는 실수가 역사 형성에 더 많은 역할을 한다며, 역사가의 의무는 일어났어야 하는 바를 말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히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