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게 더 쉬웠다.
사마천은 그 선택지를 두고, 살아서 쓰는 쪽을 골랐다.
치욕을 이겨낸 게 아니라, 치욕을 끌어안은 채 계속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다가 잠깐 멈췄다. 생각보다 오래.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공들여 준비한 발표가 하루 전날 통째로 바뀌었을 때. 부시장이 참석하는 자리에 갑자기 내가 나가야 했을 때. 자료도 없고 연습도 없이. 그 짧은 밤 동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무너지거나, 그냥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실패해도 된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어떻게든 했다.
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바닥에 닿는 순간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떨어지는 도중이 가장 무서웠다. 닿고 나면 오히려 조용해진다. 비로소 발이 보인다.
원하던 곳에 못 들어갔다고, 그 사람과 못 됐다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떨어진 자리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사람의 무게를 정한다.
사마천이 그 증거다.
비교는 어제의 나와 해야 한다.
사마천은 타인의 문장과 자신을 견주지 않았다. 어제 내가 쓴 것과 오늘 내가 쓴 것을 놓고 싸웠다.
나도 요즘 그 연습을 하고 있다. 직업재활 일지를 쓸 때, 사례기록을 정리할 때, 매일 짧게라도 뭔가를 남기려고 할 때. 화려하지 않아도 된다. 휴대폰 메모장이라도.
결핍은 모양을 바꿔가며 나를 괴롭힌다. 멈추지 않으면 끝이 없다.
남이 가진 자리, 남이 가진 인정을 부러워하는 대신 내 손에 들린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들끓는 분노로 자신을 먼저 태우면 안 된다.
나를 비웃는 사람의 입을 막을 방법은 없다. 그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그것만 선택할 수 있다.
맞는 말은 고치면 된다. 사실이 아닌 건 흘려보내면 된다.
어제의 칭찬이 오늘의 조롱이 되고, 오늘의 멸시가 내일의 침묵이 되는 이 변덕스러운 세상 속에서. 운전대를 함부로 넘기지 말자. 수치가 나를 망가뜨리는 데 쓰일지, 아니면 내 가장 깊은 곳을 떠받치는 무게 중심이 될지는 오늘 내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실패의 위치를 바꿔야 한다. 상처에서 작품으로.
사마천은 바닥까지 간 이후, 자신이 아는 것과 자신이 사랑하는 것으로 그 자리를 채웠다.
가짜로 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서 진짜로 우러난 것으로.
주인공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가볍지 않다.
실패를 내 방식으로 기록하고, 사건을 내 언어로 정리하고, 내 시간의 의미를 내가 직접 붙이는 일.
세상이 정한 잣대에서 당당하게 이탈하는 것.
바닥까지 떨어졌다면 이제 발을 구를 차례다.
그 바닥이 알고 보면, 처음으로 내 발이 보이는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