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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공주
카밀라 레크베리 지음, 임소연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그녀는 사람들-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심리적 동기-에게 관심이 있었고,
대부분의 범죄 소설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사건과
등줄기를 오싹하게 훑는 전율에 열광하느라 사람들을 등한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소설에서 툭하면 써먹는 뻔한 줄거리와 표현들이 싫었고,
진실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어떤 사람이 최악의 죄-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를
저지르는 까닭은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이야기를." -얼음공주 P 139 中 에서-
얼음공주의 작가 카밀라 레크베리가 책에서도 역시 작가로 나오는 주인공 에리카를 통해
자기가 쓰고픈 추리소설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작가의 생각이 이랬다면 이 소설은 분명 성공적이다.
사건 자체가 흥미진진하기보다는
왜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죽일 때 심정이 어땠을지 등등
인물의 감정과 생각이 더 분명하게 나타나있으니까.
너무나도 아름다운 여인 알렉산드라 비크네리가
자신이 주말마다 들르는 피엘바카의 집 욕조에서 차갑게 언채 죽어있다.
면도칼로 양쪽 손목을 그어 피를 흘린채.
알렉산드라가 남편을 차갑게 대하긴 했지만
남편은 알렉산드라를 누구보다 사랑했고 집안살림은 넉넉했으며
이렇다할 자살이유도 없다.
하지만 이상한점 한가지,
남편과는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해본적도 없고 관계한지도 오래됐는데
알렉산드라는 죽어있을 당시, 임신 3개월의 몸이었다.
알렉산드라의 어렸을적 친구인 에리카(극중 작가)와
에리카의 동창이자 형사인 파트리크가 이 사건을 점차적으로 해결해간다.
섬뜩하지만 범인을 종잡을 수 없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그 재미 때문에
추리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사건 자체보다는 인간의 감정에 치중한 이 새로운 형식의 추리소설은
한마디로 맥빠질 수밖에 없다.
사건과 추리과정이 1이라면
등장인물들에 관한 묘사와 상세한 설명이 9정도를 차지한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추리과정에서 형사가 만나는 증인들에 관한 묘사까지 너무나 자세해서
사건의 핵심이 흐려지는 기분이다.
기억력이 좋지는 않아도 그리 나쁜 편은 아닌데
등장인물이 하도 많아서 기억을 더듬어야 '아 그사람!'하고 알아차릴 정도였다.
책상정리하고 방정리까지 싹 다하느라 지쳐서
정작 공부는 몇분밖에 못하고 피곤해진 기분이랄까?
아니면 누군가의 넋두리만 실컷 듣다가
정작 내가 듣고팠던 중요한 이야기는 고작 몇분밖에 못들은 기분이라고 표현해야할까?
범인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힌트를 더 많이 주는데 치중했거나
사건 자체에 치중했다면 훨씬 흥미진진했을텐데
사건과 정말 아무 관련없는
에리카의 친동생이 남편한테 학대받는 이야기가 대체 왜 나와야했는지,
증인으로 만난 페트렌 부인이 30년동안 패스트리 가게를 했고
그 집 장식이 특이했단 이야기 등을 왜 자세히 언급해야만 했는지 등등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꼭 있는대로 늘어진 테이프를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고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듣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꼭 단점만 있는 추리소설은 아니었다.
칭찬할 점도 단점만큼이나 많았다.
400페이지 넘게 기다리고 기다려 알게 된 범인은 정말 의외의 인물이었고
그 범인이 왜 알렉드라를 죽일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주는 부분은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또 충격적까지는 아니지만 반전 또한 훌륭했고
중간중간 아무렇지 않게 흘려진 힌트가
나중에 범인을 잡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는 점도 좋았다.
최소한 용두사미처럼 앞부분은 더없이 흥미진진했는데 결말이 너무 시시해서
책장을 덮는 순간 괜히 읽었다고 투덜대게 되는 그런 류의 소설은 아니었다.
오히려 끈기를 가지고 읽다보면 뒤로 가면 갈수록 더 재밌어지는 그런 책이었다.
'차세대 애거서 크리스티' 라는 극찬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성폭력과 같은 굵직한 사회문제를 다루고
성폭력을 당한 본인과 그 가족들이 평생에 걸쳐
얼마나 힘들어하고 망가질 수 있는지 그 사람들의 면면을 깊이있게 다뤘다는 점에서는
아주 높은 점수를 주고픈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