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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는 잘해요 ㅣ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평점 :
"『사과는 잘해요』는 소설을 읽는 내내 마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듯한,
혹은 난해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술술 잘 읽히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명료하게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작품 속의 이야기를 알레고리적 환상으로 읽기에는 사실적이라는 느낌이 앞서고,
그렇다고 사실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적 개연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래서 이 소설은 우리에게 마치 땅 위를 걸어가긴 하되,
발바닥이 땅으로부터 한 뼘 정도 떨어진 허공을 디디고 있는 듯,
환상도 현실도 아닌 모호한 공간을 배회하는 독특한 독서체험을 제공한다."
- "사과는 잘해요" 박혜경(문학평론가) 의 해설 中 에서 -
처음 표지를 보고 ’사과는 잘해요’ 란 우스꽝스러운 제목과
몇가닥 안되는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옆으로 빗어넘긴 남자가
계속 사과의 말을 쏟아내는 그림을 보고 그저 익살스런 작품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냥 웃어넘길 수 있었던 장면들이
뒤로 넘어갈수록 강도가 점점 세지더니 점점 심오해져서 어느덧 웃음기는 사라져버렸다.
한장한장 넘길때마다 점점 무게감이 더해져서
처음에는 술술 넘어갔던 책장이 뒤로 갈수록 넘기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고
생각할 거리도 많아져서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싶어
같은 문장을 반복해서 보고 또 보느라 200페이지 남짓 되는 책을 읽는데
꽤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웃기다고 하기에는 심각하고 심각하다고 하기에는 웃기다고 해야할까?
시봉과 나는 시설(복지원)에서 두명의 복지사들에게
숱하게 매를 맞고 알 수 없는 알약을 받아 먹어가며
짓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 고백하며 살아간다.
둘은 시설에 들어간지 몇달 뒤 반장을 맡아
다른 원생들의 죄를 복지사들에게 대신 사과해주고
원생들이 맞아야할 매까지 대신 맞아주면서도
우쭐함을 느끼고 편안함까지 느끼는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들이다.
그러던 어느날, 둘은 시설에서 탈출하려는 구레나룻 아저씨를 그저 도와줄 요량으로
작업장에서 양말상자 안쪽에 "우리는 갇혀 있습니다.... " 메모를 써넣게 되는데
그 메모 탓에 둘은 시설의 내부고발자가 되고
복지사와 원장,총무부장,식당 아줌마까지 경찰에 줄줄이 연행되는 바람에
둘은 갈 곳이 없어진다.
마땅히 갈곳이 없는 나는 시봉을 따라 시봉의 여동생 시연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거기서 그들이 제일 잘하는 일, 즉 남의 죄를 대신 사과해주는 일을 하게 된다.
일명 ’시설의 기둥들’ 로 표현되는 시봉과 나는
분명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들인데
모자라다고 하기에는 정말 똑똑한 것도 같고
순박하다고 보기에는 너무 영악스럽기도 했다.
절대 복잡하게 생각하는 법도 없고 생각이 나면 그대로 실천에 옮기니
그들의 거침없고 간단명료한 사고방식에 쿡쿡 웃음이 나다가도
그 과감함에 기함을 할 듯이 놀랍기도 했고
나도 저렇게 순리대로 거침없이 살고 싶단 생각에 한편으로는 살짝 부러운 면도 있었다.
남의 죄를 대신 사과해주고 몰매를 맞아가면서도 우쭐함을 느끼는 거 보면
분명 모자란데
전혀 고백할 죄 따위는 없어보였던 정육점 주인한테 찾아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고
무언가 느끼고 변화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화나게 만들고 사과할 죄를 짓게 만드는거 보면
정말 똑똑해보이기도 했다.
또 시봉이 대신 사과했으니 자기는 이제 사과를 안해도 된다고 하는 ’나’의 행동을 보면
순박한게 아니라 영악하단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았다.
시봉과 나는 우선 사과를 먼저 하고 그 다음에 죄책감없이 죄를 짓는다.
원생들에게 고백할 죄 목록을 하나하나 말해주고 죄를 짓도록 사주하기도 한다.
모자란 사람들인만큼 죄를 짓게 해봤자
잘 씻지 않는 거, 시설을 도망쳐서 신고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라는 정도의 죄이긴 했지만
사과했으니 이제는 무슨 죄를 지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단순한 사고방식에
무턱대고 바보같다 웃을 수만도 없었다.
"미안하다.다시는 안그러겠다."
사과하는 그 순간만큼은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줄듯 고개를 조아려 사과하다가도
뒤돌아서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해 저지르고
어느순간 수세에 몰리면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따지는 정상적인 사람들도 많고 그 중에는 바로 나도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묵직함만 있다면 읽는 독자가 힘들어할 걸 알아채기라도 한듯
작가는 중간중간 웃음거리도 던져준다.
구치소로 원장선생님을 면회간 시봉과 내가
비리가 가득 적힌 원장의 일기장을
자기들이 갖고 있고 나중에 돌려줄테니 안심하라고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시봉과 나의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원장의 당황한 표정이 교차해서
혼자서 웃기도 했다.
걸핏하면 더러워서 이놈의 동네를 뜬다고 투덜거리는 슈퍼아줌마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그자리에서 장사를 하는 장면에서도
안타깝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웃음이 났다.
200페이지 남짓이니 빨리 읽는 사람이라면 두시간도 채 안돼 읽을 분량이지만
이 책은 두시간에 해치울 만만한 책은 결코 아니었다.
한문장 한문장 되뇌여보고 또 되뇌여봐야 할 문장들, 즉 생각거리로 가득하다.
달디단 사탕인줄로만 알고 빨리 먹어치울 욕심에 우두둑 깨물었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단맛,신맛,짠맛,쓴맛,매운맛까지 아주 오묘하고 다양한 맛이 나서
살살 녹여먹으며 그 참맛을 음미해보려 애쓰게 된, 그런 책이었다.
앞서 박혜경(문학평론가)님 의 해설을 인용하기는 했지만
앞부분만 읽고 일부러 뒷부분은 읽지 않고 남겨뒀다.
건방진 생각일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맛은 짜다. 시다." 누가 단정지어줘서
내가 느낀 맛이 짠맛인지 신맛인지 아님 짠맛도 신맛도 아닌 전혀 다른 맛인지
느껴볼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아서다.
천명이 읽는다면 천명의 의견이 다 다를 수 있는 오묘한 맛의 책이었다.
’두번째 읽을 때는 어떤 맛이 날까?’ 궁금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