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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을 읽은건 이번이 2번째다.얼마전 3,40대 아줌마,아저씨들의 심리를 정말 잘 표현해낸 '오 해피데이' 를 읽었는데 오쿠다 히데오는 분명 아저씨인데 아줌마 마음을 어쩜 저렇게 잘 알까 싶어작가의 성별이 의심스러울 정도였었다.짤막하고 간결한 문체, 분명 그냥 생각나는대로 툭툭 내뱉은 말인 것 같은데 그 사람 마음이 딱 저랬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공감을 불러일으켰었다. 그의 작품은 오 해피데이 1편밖에 읽어보지 않았지만 그에게 반해버려서 그의 작품을 하나씩 사모으기 시작했다.읽어보지 못한 그의 작품이 아직도 너무 많아서 행복할 지경이다.기대하면 실망도 크다지만 2번째로 만나본 스무살 도쿄 역시 멋졌다.
다무라 히사오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그에게 6일동안 벌어진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1979년 6월 2일, 1978년 4월 4일, 1980년 12월 9일, 1981년 9월 30일,1985년 1월 15일, 1989년 11월 10일, 날짜로 따지면 고작 6일이지만 나이로 따지면 19살에서 29살까지,히사오의 청년시절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도쿄의 재수학원에 등록하고 히사오의 고향인 나고야에서 도쿄로 올라온 첫날,친구를 찾아 무작정 도쿄거리를 헤매고 다녔던 하루(1978년 4월 4일)부터 시작해 히사오의 대학 1년 연극부 시절, 같은 과 여자친구 고야마 에리한테 한 말실수로 하루종일 그녀를 찾아헤매는 하루(1979년 6월 2일)를 거쳐 카피라이터인 히사오가 잘 아는 카메라맨, 디자이너와 공동사무실을 마련한지 2년째, 최고의 단골 클라이언트 고다 사장에게 하루종일 불려다니느라 바쁜 하루(1989년 11월 10일)까지 보여준다.간단히 정리하자면 재수, 대학 신입, 입사 첫해,입사 2년째, 엄마친구 딸과의 맞선, 공동사무실을 연지 2년째의 하루를 다루고 있다. 재수생일땐 시골 촌놈(나고야 촌뜨기)이 친구 찾아 도쿄를 헤매고 다니느라 정신 없고 대학 신입생땐 자기를 흠모하는 여자마음을 몰라준 미안한 마음에 그 여자를 찾아헤매느라 정신없다.입사 첫해엔 말만 카피라이터이지 가장 말단 사원이라 잡일하느라 정신없고 입사 2년째엔 경력과 실력이 좀 된다고 후배들 무시하느라 정신없다.
하루를 일년같이 산다면 바로 히사오의 인생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사실 부지런하다기보다는 요령이 없어 손발이 고생하는 형국이었지만 노력만큼은 진짜 가상했고 그 고생담은 눈물겹도록 짠하다.어찌나 정신없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바쁘게 움직이는지 히사오 가는 곳을 눈으로만 쫓아도 내 숨이 다 찰 정도였다.나고야 토박이인 히사오가 도쿄에 첫 상경한 날,단지 심심하단 이유로 친구 찾아 무작정 도쿄 거리를 헤매고 다닐 때만 해도 재수생이 공부는 안하고 부모님 품에서 벗어나 그저 자유로워졌다고 즐거워하는걸 보고 정말 철이 없어보여서 저 청년이 앞으로 이 험한 인생을 어찌 살아갈까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아버지 회사의 도산으로 대학 중퇴를 하는 바람에 친구들보다 사회진출이 몇년은 빨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카피라이터로서 착실히 실력을 쌓아가다 동업자들과 공동사무실까지 차리게 된걸 보니 정말 기특해서 내 아들이라면 엉덩이라도 토닥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80년대 일본사회의 10년을 포괄하는 중요한 사회 문화적인 사건들이 개인의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둥 마는 둥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불의의 총격으로 사망한 존 레넌과 그의 마지막 애럼 <더블 판타지>, 고라쿠엔 구장에 5만 5천명이 운집한 3인조 여가수 그룹 캔디스의 돌연한 해산 콘서트, 올림픽 개최지 선정에서 나고야가 서울에 밀렸던 날, 스포츠에 열광하는 여성팬이 등장한 것도 이 시대였다. 대미를 장식한 것은 베를린 장벽의 붕괴, 그밖에도 무수히 언급된 문화인과 크고 작은 사건들을 연도를 따라 정리하면 당대의 사회와 문화의 큰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파악되지 않을까. .....중략.....이 책 <스무 살, 도쿄>는 1959년생 작가의 이력와 맞물려서 반쯤은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P 389 양윤옥 역자 후기 中에서-
히사오의 이야기 속에 그 시대를 대표할만한 국내외 사건들을 언급해서 히사오의 상황을 적절히 비유해낸 점도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특히 나고야 출신인 히사오가 당연히 나고야가 올림픽 개최지가 될 줄 알았다가 서울로 정해지자 낙담하는 모습과 자칭타칭 최고의 카피라이터라 생각했던 히사오가 웨스트의 사이조씨에게 너무 자의식에 빠져있으니 정신 차리라고 된통 깨지는 상황이 너무 적절하게 맞물려서 어떻게 이런 비유가 가능할까 신기할 정도였다. '나고야가 최고니까 당연히 올림픽 개최지가 돼야한다.' '나고야 출신인 나도 카피라이터로서는 최고다' 자의식에 빠져 두가지 사실 모두 당연하다 여겼던 히사오의 믿음이 같은날 동시에 무너지면서 그동안 깔봤던 후배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는 설정이 기가 막히도록 멋졌다.
한상운 장편소설 제목처럼 "무심한 듯 시크하게" 란 표현이 오쿠다 히데오의 집필스타일을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준 문장인 듯 하다.있는대로 멋부려 쓰지 않았는데도 문장 곳곳에서 밑줄 긋고 싶을만큼 멋진 인생관과 웃음이 쏟아져나온다.연애도 초보, 사회경험도 초보였던 히사오가 뭐든지 실수 투성이에 바쁘기만 했지 실속은 없는 하루하루를,요령은 없지만 그저 열심히 살아내면서 청년시절을 마감하고 중년으로 접어들기 직전까지의 인생을 담고 있다.
이 소설의 제목이 히사오의 대학 1년, 연극부 시절인 스무 살, 도쿄로 정해진건 그 시절이 히사오 인생에서 가장 걱정 없이 즐거웠던 시절이어서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20살, 동갑내기 과여자친구의 토라진 맘을 달래려 하루종일 뛰어다닌게 아무리 억울하고 힘들었다 한들 19살, 재수시절처럼 공부하는 것만큼 힘들지도 않았을테고 21살, 회사에 첫 입사해 잡일하는 것만큼 힘들지도 않았을테고 29살, 되도않는소리를 해대는 클라이언트 비위를 맞춰주느라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되니 20살, 그 시절만큼 걱정없이 즐거운 시절이 또 어디에 있을까?
나도 돌이켜보니 대학 2학년때가 제일 즐거웠었던 것 같다.미팅소개팅에 친구들과 여기저기 놀러다니느라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이 모자랐던 꽃다운 스무살,그 시절이 눈물겹도록 그립다. 하지만 그 시절이 그리운건 앞으로 다시는 못 올 시절이기에 더 값지고 그리운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