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브리 스튜디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좋아하시는지? 난 무지 좋아한다.'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은 무려 20번을 보고도 지금 또 볼 상황이 된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란 말만 들어도 꼭 한번은 봐줘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좋아한다.'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 재미있는 애니메이션' 이라는 공식이 내 머릿속에 입력됐나보다.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처음 접해본건 '이웃집 토토로' 였다.토토로가 조그만 우산을 쓰고 위로 점프하며 쿵하고 구르니까 우산에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맞고 씨익 웃는 장면도 좋았고 메이가 통통한 토토로 배 위에 엎드려 낮잠을 즐기는 장면도 참 좋았다. 메이와 사츠키가 고양이 버스를 타고 하늘을 신나게 달리는 장면은 특히나 신나고 인상적이었다. 고양이 배가 스윽 열리면서 메이와 사츠키가 고양이 뱃 속에 들어간다는 설정은 살짝 징그럽기도 했지만~ ^^;;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과 이 책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길래 이렇게 길게 이야기할까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된다.이유는 바로 유정천 가족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스틱한 애니메이션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너구리가 인간으로 변신하고 가짜 에이잔 전철로도 변신하고 바람신 천둥신 부채를 부치면 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질 않나 술을 연료로 하늘을 나는 배를 타고  매년 오봉 때마다 불이 붙는 산을 구경하는 등 정말 기막히도록 재미난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져있기 때문이다.자신의 여제자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걸 퍼주고도 자신을 뻥 차버리고 떠난 여제자를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는 조금은 야한 텐구만 없다면, 아니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행동 따위의 수위조절만 살짝 한다면 아이들과 어른들이 같이 즐기는 방학용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도 대박나겠다 싶을 정도로 재밌다.재미만 있느냐? 그것도 아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 몸속에 바보피가 흐르고 있다고 인정할 정도로 하는 짓마다 대책없고 바보스럽지만 그들의 끈끈한 가족애(너구리 가족)는 그들을 그저 전통이랍시고 잡아먹는 잔인한 인간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한마디로 재미난데다 교훈까지 있다.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너구리 폼포코' 에서처럼 이 책의 주인공도 너구리여서 한때는 명문가였지만 지금은 몰락한 '시모가모 가'의 너구리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너구리 세계의 우두머리(니세에몬)였던 아버지, 소이치로는 대단히 위대한 너구리였지만 어느날 어이없게도 '금요구락부'라는 인간들 모임의 송년회에서 '너구리 냄비' 신세가 돼 돌아가셨고 화가 나면 "나가 뒈져라" 거친 욕설도 퍼붓는 어머니지만 다른 너구리들이 자식들을 바보라고 손가락질해도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믿어줄만큼 자애롭다. 하지만 '검은 옷의 왕자님' 이란 미청년으로 변신해 당구를 즐기는가하면 다카라즈카 가극 티켓을 자식들에게 사달라고 할만큼 좋아하는 등 철은 좀 없다.특히나 엄마는 천둥을 너무 무서워해서 천둥만 치면 변신이 풀려 인간에서 너구리로 돌아오기 때문에 천둥만 치면 바보형제들이 인간으로 변신해 당구 치러 나간 엄마를 찾아다니고 또 같이 있어주느라 정신이 없다.장남 야이치로는 평소에는 진짜 멀쩡한데 위기의 순간마다 허둥거리기 일쑤고 지금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니세에몬' 자리에 오르기 위해 에바스가와 소운(작은 아버지)와 신경전 중이다. 차남 야지로는 한때 술을 즐겼고 가짜 에이잔 전철로 변신해 데이트족들을 벌벌 떨게도 했지만 몇년전 개구리가 돼서 우물에 숨어버린 뒤로 다시 너구리로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삼남 야시부로는 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인데 변신을 자유자재로 할 줄 알지만 함부로 모습을 바꾸면 안된다는 너구리 풍조를 어기고 툭하면 변신을 해서 혼나기 일쑤고 인생의 모토가 오로지 재미여서 아무 생각없이 사는 너구리의 표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막내 야시로는 소년으로밖에 변신을 못하는데다 그나마도 놀라기만 하면 변신이 풀려 꼬리를 드러내놓기 일쑤고 야사부로 가족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에바스가와 소운의 소유인 가짜 덴키브란(너구리들이 즐겨 먹는 술) 공장에 수습교육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이 책의 주조연급이라 할 수 있는 벤텐과 아카다마 선생의 이야기도 잠깐 하자면 아카다마 선생은 '뇨이가다케 야쿠시보' 로 불리는데 한때는 대단한 힘을 가진 텐구였지만 작년까지 뇨이가다케를 관리하다 구라마 텐구들과의 전투에서 참담하게 패한데다 벤텐과 야사부로가 변신한 '가짜 마왕 삼나무 사건' 이후로 몸이 상해 텐구로서의 능력도 거의 잃은지 오래고 지금은 다다미 넉 장 반 넓이밖에 안되는 좁은 연립주택에서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않고 쓸쓸하게 지내고 있다.한때 제자였던 야시부로가 사다주는 아카다마 포트와인과 면봉, 화장지, 도시락을 먹으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데 여제자였던 벤텐(금요구락부 7명중의 한명)이 자신을 뻥 차고 나간 뒤로 벤텐이 돌아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목놓아 기다리는 불쌍한 노인네가 다 됐다.텐구로서의 신통력도 거의 다 잃은지 오래지만 그나마 자기가 가지고 있던 '바람신 천둥신 부채' 와 '야쿠시보의 안방(텐구들이 이용하는 탈것 가운데 하나로 작은 다실 모양이다)' 까지 자신이 사랑하는 여제자 '벤텐'에게 다 줘버렸다. 벤텐은 한때는 인간이었는데 아카다마 선생에게 납치돼와서 텐구 수업을 받고 지금은 금요구락부의 일원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로 유명하다. 훌륭한 아버지와 철은 없어보이지만 역시 훌륭한 어머니, 자기들이 바보피가 흐르는지 스스로도 잘 아는 바보 4형제, 그리고 아름답지만 차가운 여자인 반텐구(인간이 텐구로 변했기에)인 벤텐과 그녀 없이는 살아가는게 아무 의미 없어보이는 철딱서니 없어보이는 텐구인 아카다마 선생이라는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극적재미를 더해준다면 이 책에서의 감초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은 에바스가와 소운의 두 아들, 금각과 은각이었다. 통구일엽, 권토중래 등 뜻도 모르면서 네 글자로 된 명찰을 늘 목에 걸고 다니는 금각과 은각은 호랑이로 변신한 시모가모 가의 장남, 야이치로에게 엉덩이를 물려 수로에 던져진 뒤로 그들의 초특급 울트라 캡숑으로 소중한 엉덩이를 쇠팬티로 보호해보려고 했지만 쇠팬티가 억지로 벗겨져 야사부로에게 엉덩이를 또 깨물리고 가모가와 강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굴욕을 당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오호~ 보통이 아닌데' 싶을만큼 사악하고 똑똑한 짓들을 하는가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역시 바보는 바보네' 소리를 들을 정도로 최고로 바보스러웠다. 둘이 나오는 장면에선 미리 웃음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을 정도로 개성이 철철 넘치는 바보캐릭터였다.

"... 전철로 둔갑한 너구리가 밤의 거리를 질주하는 클라이맥스는 최고다" - 책의 잡지-
띠지에도 적혀있듯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우물안 개구리인 둘째 형, 야지로가 전철로 둔갑해 거리를 정신없이 질주하는 모습은 흡사 이웃집 토토로에서 사츠키와 메이가 아픈 엄마를 만나러 고양이 버스에 타고 질주하는 모습이 연상돼서 나도 같이 교토의 밤거리를 정신없이 신나게 달리는 기분이 들만큼 짜릿했다. 

너구리 냄비 요리를 맛있게 먹을만큼  너구리를 좋아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 벤텐은 사악하지만 위기의 순간마다 야사부로를 도와주며 때로는 인간미가 철철 넘쳐흐르는 모습을 보여줬다.인간이였던 스즈키 사토미가 텐구가 돼서 더 아름다워진건 텐구가 돼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역시 인간은 인간다울 때가 가장 아름다워보이는 법이니까. 재미만 추구하는 바보 너구리들, 사랑만 쫓는 어리석고 늙은 텐구인 아카다마 선생 역시 정상은 아닌 듯 했지만 우리 인생에서 사랑과 재미만큼 중요한게 또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다음날은 또 어떻게 끼니를 해결해야하나?' 이렇게 먹고 살 걱정을 해야한다면 사랑과 재미는 우리들 고민에서 저 멀리, 뒤로 뒤로 밀려나겠지만 교토의 너구리들이 더이상 끼니 걱정 안해도 될만큼 풍요로워진 세상에서는 야사부로가 추구하는 재미와 아카다마 선생이 추구하는 사랑이 가장 중요한 듯 하다. 한마디로 등 따숩고 배부르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지만 그거야 못먹고 못입던 시절 이야기고 지금에야 사랑과 재미가 인생의 목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든건 바로 가족애였다. 각자 볼일 보느라 바빴던 아들들이 천둥을 무서워하는 어머니와 같이 있어주기 위해 하던 일 팽개치고 어머니를 찾아 헤매는 모습도 우물 안 개구리였던 둘째 형, 야지로가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전철로 둔갑해 거리를 정신없이 질주하는 모습은 가슴이 찡하다 못해 감동 백배였다. 
"내 자식 일이다. 내가 이해해주지 않으면 그 애가 너무 가엽지." -P250  中 야사부로 어머니의 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해도 가족이기 때문에, 피를 나눴기에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너구리 가족의 이야기가 어쩜 이렇게 많은 가르침을 전해주는지. 그저 재미나게 읽었을 뿐인데 남는게 너무 많은 책이었다. 한마리만 걸려도 대박이다 생각하고 낚싯줄을 감아 올렸는데 연이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라오는 물고기를 잡고 횡재한 기분이다. 친한 동생이 재밌다는 이야기에 기대를 잔뜩 하고 봤는데도 기대보다 더 재밌었다. 오쿠다 히데오, 요시모토 바나나에 이어 내가 좋아하는 일본작가가 또 한명 생겼단 점도 아주 큰 수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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