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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공지영 작가의 작품,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몇주째 유지하고 있는 책,
하늘거리는 원피스 차림의 여인이 나비가 날아오르는 초록색 풀밭위를 걷고 있는
표지까지 날 사로잡았던 책,
미치도록 읽고 싶었던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였기에
이 책에 거는 내 기대 또한 남달랐다.
책을 읽기 전, 다른 분의 서평이나 출판사 서평을 통해 앞부분을 먼저 읽어보고
줄거리는 뭔지, 대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는지
꼭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지만
꼭 직접 읽어보고 싶단 생각에 꾹꾹 눌러참고
일부러 서평도 안읽고 출판사 서평도 찾아 읽지 않았는데
친구님의 글에서 읽기가 버거울 정도로 답답한 현실을 담은 책이란 글을 읽게 됐다.
어느 정도로 심각한 이야기이기에 읽기가 버거울 정도일까?
답답하면 얼마나 답답하겠어? 설령 답답하다고 해도 재밌으면 그만이란 생각에
내가 직접 읽어보고, 내가 직접 판단을 내리고픈 생각에 겁도 없이 책장을 넘겼다.
안개 낀 무진,
자애학원(청각장애인들의 학교와 기숙사)에 기간제 교사로 부임해온 강인호,
중국에서 벌인 사업의 실패로 생활고를 겪어야했던 그가
아내 친구의 연줄로 이 곳에 부임하게 됐다.
이제부터는 월급 타서 아내와 딸 새미를 더이상 힘들지 않게 해야겠다,
더럽고 치사해도 참아야지 굳은 결심을 하고 왔건만
들어보지도 못한 학교발전기금 명목으로 작은거 5장을 요구하는 행정실장,
자기를 홀대하는 교장과 박선생, 노기로 가득찬 학생들의 시선,
열차사고로 죽은 아이의 이야기까지 전해들은 강인호는
무언가 처음부터 아주 단단히 뒤틀리고 꼬였단걸 직감한다.
강인호는 교장과 행정실장, 교무부장까지 아이들을 지속적으로 폭행,협박하고
성폭행했단 사실을 곧 알게 되고 대학선배인 인권운동쎈터 소속 서유진과 함께
아이들을 보호하고 아이들을 학대한 그들을 벌주기 위해 노력한다.
강인호가 서유진의 입에서 아이들이 성폭행당했단 사실을 전해들은건 겨우 69페이지,
3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이 책에서 성폭행사실이 이렇게 빨리 밝혀졌는데
나머지 230페이지 가량은 뭘로 채워나가려고 작가는 이렇게 빨리 밝혔을까?
잠시나마 난 이런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다.
성폭행 사실이 밝혀진다해도 그 뒤 길고 지리한 재판이 이어지고
재판 뒤에도 힘있고 백 있는 그들을 벌주기는 쉽지 않단걸 어른인 나조차도
정말 한심하게 몰랐던 거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다.
순진한 건지 바보인건지 성폭행사실만 밝혀지면 그들을 벌주는건
경찰들, 지역사회가 알아서 처리해주겠거니
어른이 나조차도 순진한 연두,유리,민수처럼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니~
자기의 안정적인 직장을 걸고 아이들을 위해 싸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잠시나마 고민하는 강인호를 지켜보면서, 강인호의 아내를 지켜보면서
내가 한 생각도 스스로 놀라웠다.
이제 막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강인호가 나라면?
내가 강인호의 부인이라면? 생각해본다.
일가를 이루고 사는 능력없는 가장으로서
이제 막 월급 또박또박 나오는 일다운 일을 해보려는데,
아빠의 월급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맛있는걸 뭘 사달랠까 행복한 고민을 하는
딸아이와 아내의 눈망울을 외면하고 나라면, 내가 강인호라면,
그 간절한 눈빛을 외면하고 정의를 위해 싸울 수 있을까?
딸을 키우는 같은 엄마의 입장에서 마땅히 천인공노할 흉악한 범죄자들을 잡아넣도록
남편을 독려해도 시원찮을텐데
가진거 하나 없는 우리 말고도 정의의 칼을 휘둘러줄 사람은 분명 있지 않겠느냐고
남편의 힘을 빼놓는 강인호의 아내를 과연 비난할 수 있을까?
내가 강인호의 아내라면 강인호가 가려는 길을 믿고 그대로 가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까?
나라도 당연히 반대했을테고 어떻게든 강인호를 그자리에 주저앉혔을걸 알기에,
정의실현보다는 내 월급과 가족이 더 중요하단 생각에
나 역시 강인호처럼 망설였을걸 알기에 내 자신이 미워진다.
그동안은 가진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강인호와 강인호의 아내 입장에 서보니
나 또한 잃을게 많다는걸 깨닫고 지금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기도 했다.
옳은 길로 가려는 남편을 뜯어말리는 강인호의 아내가 백분 이해되는걸 보면
나도 세상사 찌든 때가 묻을대로 묻었나보다 싶어 뒷맛이 씁쓸하다.
지금부터 돈한푼 벌지 않고 펑펑 쓰고만 산대도 다 못쓸것 같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거머쥔 그들이
그저 과자 한봉지에 행복해하고 저녁 한끼 배불리 먹고픈게 소원인
불쌍한 청각장애아들의 가랑이를 억지로 벌리고도 그정도의 죗값을 받았다는건
정말이지 이해도 안되고 이해도 하기 싫다.
99개를 가진자가 100개를 채우기 위해 1개를 가지고 만족해하는 사람의 것을
억지로 빼앗는거나 마찬가지라 정말 화가 난다.
살아가는 세월이 길수록 점점 이해 안되는 일들을 직접 보기도 하고
언론매체를 통해 수없이 전해듣고 있지만
이 책만큼 집요하게 내 맘을 파고들어 아프게 한 사건은 없었다.
대사 정도야 작가적 상상력으로 채워넣었다고 한대도
인턴기자의 스케치 기사의 마지막 구절을 읽고
그동안 준비해오던 다른 소설 집필을 유보한채 이 책을 쓸 수밖에 없었단
작가의 말이 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기가 막히도록 잘 짜여진 픽션이길, 제발 해피엔딩이길 이토록 간절히 원했던 적도 없건만
내 작은 바람은 마지막 책장을 덮을때까지 절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달디 단 사탕인줄로만 알고 멋모르고 살살 녹여 꿀꺽 삼켰더니
입안 가득 거친 모래 알갱이들이 굴러다녀서 불쾌하기 짝이 없는 딱 그런 기분이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기 잘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나 한사람이 이런 불쾌한 현실을 알게 됐다고 해서 달라질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어쩌면 책보다 더 비참할 수도 있는 답답하고 비참한 그들의 현실을 알았기에
앞으로는 그들을 대할때 지금과는 아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면
그걸로도 이 책을 읽어야 했던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표지에 매료돼, 작가의 명성을 믿고, 현란한 글솜씨에 반해 겁도 없이 읽어내려갔던
이 책이 비록 입에 담기도 힘든 욕지거리를 하게 만들고 불같이 화나게 했지만
그래도 이런 비참한 현실이 바로 내 주위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는데
같이 분노하고 내가 처한 현실을 고맙게 여기도록 만들어줘서 감사한 생각이다.
불편한 현실, 하지만 꼭 알아야 할 진실,
바뀌지 않는다해도 언젠가는 꼭 바뀌었음 좋겠단 희망에
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게 만들어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