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나 오랜만에 읽는 에쿠니 가오리의 신간이다.
역시나 에쿠니 가오리~
처음은 별거 아닌 듯한 이야기의 시작이라 초반 흡입력은 언제나 그랬듯이 그럭저럭이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버리는 그런 작품이 바로 그녀의 소설이 지닌 특징이자 장점인 거 같다.
이 작품도 그렇다.
세 명의 대학 동창이자 30년지기 친구인 리에와 다미코 그리고 사키라는 57세 중년 여성들의 이야기이지만 그저그런 50대 대학 동창생들의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다.
세 사람이 꾸준하게 연락을 하고 있지만 한 명은 전업주부로, 한명은 결혼을 한번도 하지 않은 작가로, 한명은 금융전문가로 세계 곳곳을 누비는 커리어우언에 이혼을 두번 했지만 여전히 연애에 자유분방한 여성이다.
늘 그렇듯이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경제적으로 괘나 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성공한 여성들이다.
이 세 사람 중에 세간의 시점에서 가장 무난한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사키는 대학 졸업 후 결혼해 아들 둘과 남편과 살다가 최근에 큰아들이 독립을 했다.
정원을 꾸미고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것이 취미인 평범한 듯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그녀이지만 최근에 23살 된 큰아들이 갑자기 결혼을 하겠다며 여성을 집으로 데려와 골치가 아프다.
고작 23살에 6개월 만난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니
게다가 이 여자 벌써 아들을 쥐락펴락하고 예비 시어머니인 자신마저 마음대로 할 요령인지 행동 하나하나가 통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미코는 작가이다.
크게 성공한 작가는 아니지만 여전히 일거리가 끊이지 않는 괘 괜찮은 글쟁이인 셈이다.
애인은 있었지만 결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오래전에 헤어진 애인인 모모치를 가끔 만나 밥을 먹기도 하고 수다를 떨기도 한다.
모모치와는 대학시절 사귀었지만 특별한 뭔가가 있어서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멀어져 헤어졌다.
최근에 이혼을 했다는 모모치는 중년의 아저씨가 되었지만 은퇴를 하고 혼자 살기를 시작했다며 이런저런 가사일에 대해 다미코와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기는 거 같다.
옛 애인이지만 벌써 30년 전 이야기이고 다미코도 모모치도 서로가 수다 친구인 그 정도 거리라고 다미코는 생각한다.
80이 넘은 다미코의 어머니인 가오루는 다미코의 몇 년 전에 암으로 죽은 친구의 딸의 남자친구가 일하는 수영장에 다니고 있다.
다미코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반대했지만 스포츠 강사로 일하는 청년의 권유와 설득에 공감이 가서 용감하게 시작했고 지금은 수영장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조차 즐겁다.
그라고 카오루의 즐거움은 다미코의 친구인 리에가 일본에서 살 집을 구하는 동안 이 집에서 지내고 있다.
모든 것에 무덤덤하고 반박자 느리고 '작가'라는 작가답게 야행성으로 아침에 일어나지 못하는 다미코와 달리 모든 것에 활력이 넘치고 자신이 준비한 아침식사 맛있게 먹어주고 이런저런 이야기까지 잘 통하는 리에와 한 집에 사는 것은 즐겁다.
일본에서 두 사람과 함께 대학을 다녔지만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그곳에서 직장을 구했고 그 후에도 세계 곳곳의 회사로 이직하다 영국에서 10년이 넘게 일을 하다 최근에 일본으로 돌아온 리에는 셋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이다.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오래 일을 한 만큼 투자에도 두각을 보여 일본에도 여러 채의 집을 가지고 있지만 이 집들은 투자용이라며 자신이 살 집을 구하는 동안 대학 동창인 다미코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다.
다미코는 어머니와 단둘이 사니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해서 부탁했는데 다미코도 큰 반대 없이 받아들여 주었다.
자신의 본가라고 해도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가지 않는 것이 일본인들의 보통일텐데 친구 집에 기한도 없이 무작정 지낸다는 것만으로도 리에는 전형적인 일본인 아니 보통 사람의 사고 체계는 아닌 거 같다.
다미코는 반대할 이유가 없어서 리에를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역으로 리에의 이런 부탁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다.
처음 리에가 등장했을 때 ' 뭐 이런 제멋대로인 사람이 있지~'
리에가 지낼 곳이 없을 정도의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이라면 조금 이해가 되지만 이 소설에서 리에는 이 작품의 등장인물 중에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이다.
짐은 대여 보관소에 맡기고 본인은 호텔에서 지내면 될텐데 왜 굳이 손님방조차도 제대로 없는 친구의 집에서 묵겠다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고 내가 다미코라면 바로 거절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리에가 다미코의 집에 묵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다짜고짜 영국에서 돌아온 리에는 영국에서 거의 남편처럼 지냈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워 헤어졌고 영국에서 그 남자와 결혼해 살 계획이 틀어져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 리에는 호텔에서 혼자 지내는 것이 싫지만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만날 때마다 자신을 좋아하지 않은 티를 팍팍 내는 남동생 부부가 살고 있는 본가는 이제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보기 싫은 저택일 뿐이다.
남동생의 아들인 조카는 너무 귀엽고 사람스러워 외국에 살 때도 방학이면 초대를 해서 함께 여기저기 여행도 다녔고 자주 연락도 하지만 그 아이의 엄마는 정말이지 만나면 기분이 나빠지는 가능한 한 만나고 싶지 않은 여자일 뿐이다.
남편의 누나가 너무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인데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도 엄마인 자신보다 고모를 의지하고 동경하니 질투하는 심정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잘난 시누이가 있는 것이 못난 시누이가 있는 것보다는 휠씬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ㅋㅋ
아내의 말대로만 하느라 부모님의 유품과 불단까지 대여 창고에 처박아두고 부모님이 사시던 집도 아내의 취향대로 천박하게 엉망으로 고친 남동생도 이제는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런 리에에게 자신에게 살가운 다미코의 어머니 가오루는 자신에게 어머니같은 존재가 아니었을까~
또 남들이 보기엔 이해가 가지 않는 리에의 막무가내를 덤덤하게 받아주는 다미코는 친구라기보다는 고국이자 집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다미코의 방까지 차지하고 다미코가 모아둔 비싼 와인들을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꺼내 마시며 집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하고 집도 못 구해 다미코에 집에 있으면서 차를 구매하고 이런저런 물건을 구매해 그렇지 않아도 좁은 집을 짐으로 가득 채우는 등 민폐를 넘어 행패로 보이기까지 하는 리에의 행동은 보통 사람은 참아내기 힘들 것이다.
밤늦게 일을 하는 작업실까지 와서 와인 잔을 내밀며 일을 방해하며 자신과 놀아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리에를 보면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왠만한 사람이었다면 '꺼져~ ' 라는 한 마디로 30년 우정이고 나발이고를 정리했겠지만 리에의 특별함에 큰 반응을 하지 않는 다미코는 예나 지금이나 속으로만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다미코의 무던함에 리에가 너무 기대는 듯하지만 이야기 진행될수록 그들이 누가 누구에게 기생이 아닌 서로 주고받는 공생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다미코가 천성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어머니에게 할 수 없는 것들을 리에가 자연스럽게 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이 함께 보낸 30년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암으로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의 딸인 마도카와 그녀의 남자친구 리쿠토는 다미코의 집에 자주 드나든다.
특히 리쿠토는 가오루의 이런저런 집안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부탁을 들어주기도 해서 가오루는 리쿠토가 오는 것이 반갑다.
다미코는 남인 리쿠토에게 그렇게까지 편하게 구는 어머니가 이해가 가지 않아 몇 번이나 이야기했지만 가오루는 달라지지 않는다.
어차피 마도카를 통해서 만난 사이라지만 마도카와 리쿠토가 헤어진 후에도 가오루는 그들의 이별과 자신과 리쿠토의 관계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다미코의 이야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모르고 그러는 것인지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조차 자신의 특별함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리에, 너무나도 별난 친구 리에를 받아들이는 다미코의 무던함, 리쿠토에 대한 가오루의 예전과 다름없는 행동들, 자신이 싫어하는 며느릿감이 거의 강제로 안긴 강아지 둥글이에게 빠진 사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던한 듯한 무던하지 않고, 특별 아니 별난 듯하면서도 평범하다.
소설은 리에가 그 별남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자신의 집을 구매해 다미코의 집에서 나오면서 끝이 났다.
상식적인 듯 상식적이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고저가 없는 잔잔한 에쿠니 가오리의 문체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상식적'이라는 것에 고집하지 않고 '비상식적'에 유난을 떨지 않는 에쿠니만의 빛나는 잔물결 같은 소설을 읽을 수 있었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