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딘스키.몬드리안.폴록 명화로 보는 세계의 미술가 20
이은재 엮음 / 지경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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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폴락의 작품은 뭐가 뭔지 모르겟다. 그냥 술에 취해서 물감을 캔버스위에 휙휙 던지거나 붓으로 뿌리거나 해서 낙서 비슷하게 그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보게되면 뭔가 시각적인 쾌감 내지는 즐거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뭔가 광기 비슷한 것도 살포시 감지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는 미국 현대회화에서 한 획을 그었는데, 후대의 사람들은 이것을 액션페인팅이라고 칭한다. 아마도 평론가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캔버스에 질서정연한 것들만 담는것이 예술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기 때문이 아닐까? 고정관념에 휩싸이지 않는 것은 예술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극히 필요한 발상의 전환이다. 한편, 잭슨 폴락을 다룬 예술영화도 개봉이 되었는....바로 폴락 'Pollock, 2000' 이다.


필자는 이런 예술가를 다룬 영화를 즐겨보는 편인데, 이런류의 영화는 그렇게 많이 만들어지지도 않고 또 국내에서 개봉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대부분이 큰 영화관에는 명함도 내밀어보지 못하고 DVD로 발매되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요즘에는 인터넷상에서 다운로드 받아 보는 경우도 많아서 웬만한 매니아가 아니면 정보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또한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작하는 쪽에서는 제작비용을 건지기도 어렵기 때문에 더욱 시장이 좁아지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간혹가다 한 두 편씩 나오기는 하므로 상당한 고정 팬이 있는 모양이다. 필자가 보건데, 이런 류의 영화를 만들때 꼭 사실에 근거해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약간의 상상력과 영화적인 재미도 가미해주면 좀더 많은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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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드리안이 조선의 보자기를 본다면 - 정은미 동서양미술감상
정은미 지음 / 열림원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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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디자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화가가 바로 피에트 몬드리안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수직수평의 검은선과 빨강, 파랑, 녹색의 삼원색을 예술적으로 배치하여 만든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 외에는 어떤 일체의 잡스러움도 들어가있지 않다. 필자는 몬드리안의 회화를 볼 때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항상 오버랩이 된다. 아마도 알게모르게 이런 문화적 토양이 그의 잠재의식을 거치면서, 예술작품으로 배어나오지 않았을까?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입생 로랑의 패션에 의해서 다시 재탄생하게 되는 것 같다.


그의 작품과 예술성은 현대적이고 도회적인, 그리고 감각적인 디자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의 초기작도 지금처럼 선과 색, 면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인물화나 정물화를 그리다가 점차로 --아마도 입체파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듯-- 대상을 선과 면으로 해체하는 일련의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의 초기작과 현대의 추상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일련의 작품을 훑어보면, 마치 모핑기법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하다. '붉은 나무' - '회색나무' - '활짝 핀 사과나무' - '컴포지트' 까지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가는 시기라면, 이후부터는 몬드리안의 독특한 추상회화가 전개된다. 나무를 점차로 직선과 수평선으로 모핑해가는 과정이 무척이나 흥미롭다. 단순한 선과 컬러, 면이 보여주는 단순한 구도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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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칸딘스키 마로니에북스 Taschen 포트폴리오 3
마로니에북스 편집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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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심미안이 부족해서 그런가? 항상 바실리 칸딘스키의 그림과 호안 미로의 작품을 구별하기가 어려웠었다. 칸딘스키는 추상화의 거장이며 미로는 초현실주의임에도 매우 많은 점을 공유하는 것 같다. 전자가 회화에 음악을 추상해 넣었다면 후자는 꿈속에서 미로를 걷는 듯 한 느낌이다. 원래 그는 러시아에서 법학교수가 되려고 했었으나,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잠재해있던 화가로서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현대회화의 한 유파인 추상화를 그려내게 되는데, 바로 컴포지션 시리즈를 통해서 였다.


칸딘스키는 30이라는 젊은 나이에 법학교수로서의 길을 접고, 자신 내면의 외침을 따라서 화가로서의 첫 발을 내디기게 된다. 당시 그가 살던 러시아는 예술을 금기시 하던 때라, 이런 선택은 그로 하여금 조국인 러시아를 떠라게끔 한다. 거기서 그는 로댕에게 까미유 끌로델이 있었듯이 아내 대신 가브리엘레 뮌터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후 아내와는 이혼을 하지만, 뮌터와 재혼을 하지는 않고 영원한 연인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가 러시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는 27살이나 어린 여자와 결혼을 한다. 이것이 간략한 그의 일생인데, 칸딘스키를 칸딘스키 답게 만든 주요 작품은 대개 뮌터와 함께 했던 시기에 창작된다. 그는 피카소처럼 바람둥이에 여성편력이 심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평범을 벗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양 예술사에서 러시아의 면목을 어느 정도 세워준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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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8
하종현 엮음 / 서문당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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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쉬르레알리즘을 살다간 호안 미로, 그는 회화 뿐만 아니라 도예와 벽화, 조각가로서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특히나 미로는 무의식이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자유분방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어린아이의 낙서와 같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미로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그려진다. 즉, 기호를 통한 아이들과 같은 상상력, 꿈속을 거니는 듯한 경쾌함, 저절로 미소짓게 만드는 소박함 등을 버무려 놓았다. 그에 대해서 좀더 알고 싶다면 1969년에 제작된 [후안 미로, 타인들] 이라는 영화를 보면 된다. 그런데 예술영화고 오래되어서 구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 싶다.


한편, 초기 그의 작품은 피카소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입체파적인 그림을 많이 남겼다. 그러나 이후 기호속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가게 된다. 갑자기 뜬금없는 얘기를 해볼까 한다. 우리나라 현실을 보자면, 힘있고 권력있는 사람들의 자식들은 거의 대부분 군대를 면제받았다. 젊은이들중에 과연 군대를 가고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젊은 나이의 미로도 입대 영장을 받게 되는데, 아버지에게 부탁을 하여 면제를 받게 해 달라고 청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술가의 길을 가려는 미로를 탐탁치 않게 여긴 그의 아버지는, 혹시나 군생활이 그를 남자답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 청에 응하지를 않았다. 결국 미로는 열달 동안 군복무를 하게 되었다. 아니 뭐여? 누구는 거의 3년을 다녀왔는데, 이건 뭐 방위도 아니고 말이야. ㅋㅋㅋ 이해해달라. 한국에서 현역복무를 한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방우라고 깔보느 것은 그에 대한 보상심리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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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9
정영렬 엮음 / 서문당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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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랩탑 바탕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미지가 바로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이다. 정확히는 [내란의 예감] 이라는 작품인데, 이 그림을 그리고나서 약 한달 후에 스페인 내란이 발발하였다고 한다. 아뭏든 그는 돈키호테적인 기행으로도 유명한데, 그 원인은 어린시절의 정체성 혼란에 기인한다. 달리에게는 죽은 형이 있는데, 그의 부모는 달리를 첫째 아들의 환생이라고 여겼었다. 그리하여 형의 아바타로써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트라우마가 일종의 광기를 형성하여 그를 쉬르레알리즘의 대표 화가로 만든 원동력이다. 한편, 그는 알프레드 히치콕, 루이스 부뉴엘과 함께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스펠바운드, 안달루시아의 개가 바로 그 영화다.


필자가 달리의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신선함이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여러 많은 회화작품을 남겼지만 그 중에서도 필자는 '기억의 영속성' 과 '폭발하는 라파엘로의 두상' 에 시선이 간다. 한편, 그는 지독한 자신감과 기행으로도 잘 알려져있는데, 그의 카이제 수염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를 다룬 단독의 영화는 없지만, '미드나잇 인 파리' 라는 영화에서 조연으로 잠깐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예술과 대중문화 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각종 기행을 하기도 했는데, 츄파춥스라는 사탕의 로고를 디자인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게 그냥 흔하디 흔한 미국의 막대사탕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스페인 태생이라고 한다. 1958년에 첫 탄생하여 세계 각국에서 판매되고 있다고 하는데, 필자도 보기는 했지만 한 번도 먹어보지는 않았다. 아뭏든 이 츄파춥스의 꽃모양 그림을 주황색과 노랑색으로 멎지게 디자인 한 것이 달리라고 하니, 그의 평소 행동을 볼때 특별이 기이한 점은 아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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