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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의 1부는 두 가지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데 바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똑같은 진행 방식이다. 열일곱 살에 만난 소녀와의 추억과 그리움을 담은 하나의 이야기와 그녀가 이야기한 벽으로 둘러싸인 이상한 마을에서 중년의 내가 겪는 이야기가 번갈아 진행되는데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에서의 이야기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세계의 끝' 파트와 거의 일치한다. 마을의 모습, 주요 캐릭터, 주인공이 하는 일과 행동, 서사의 흐름이 복사 수준으로 똑같다. '세계의 끝' 파트를 약간 축약하되 핵심은 모두 살려낸 모양새다.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의 이야기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중첩되고 있지만 그래도 소설적 재미와 무게감은 이쪽으로 실리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뺀 나머지 이야기, 즉 어엿하게 다른 한 파트를 장식하고 있는 열일곱 살 시절 소녀와의 추억담은 재미와 무게감에서 훨씬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 마나 한 이야기 같고, 이야기 자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야말로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 이야기의 희미한 그림자 같은 느낌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1부 내용 전체가 중첩+그림자 같은 인상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이미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은 독자에게는 있으나 마나 한 파트, 하나 마나 한 이야기로 1부를 채운 것이다. 작가 후기에서 하루키는 1부의 집필을 마친 시점에서 6개월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아직 뭔가 부족하고, 이야기가 더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2,3부 집필에 돌입했다고 한다. 당연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1부까지만 읽었을 때 내가 새롭게 얻은 것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은 독자를 위해서라면 1부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하고 중첩되고 의미를 찾기 힘든 작업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1부를 읽는 내내, 그리고 1부를 마치는 순간까지 나는 모종의 불만과 허탈감을 안고 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1부가 끝나버리나. 2,3부 내용은 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위해 과연 1부 내용이 정말 필요하긴 했을까.
2부를 읽으면서도 1부에 대한 불만은 여전했다. 역시나 불필요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길게('세계의 끝' 파트와 상당 부분 중첩되면서까지) 쓸 필요까진 없어 보였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작품이 이미 출간되어 있으니 중첩된 내용을 신작에 옮겨 담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굳이 언급하고 싶다면 간단히 몇 줄, 혹은 몇 페이지로만 요약하여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대한 내용이 더 궁금하다면 독자는 알아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찾아보면 될 일이다. 어쩌면 2부 내용부터가 작가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 혹은 독자가 진짜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가장 길게 진행되는 2부에서 비로소 전작(前作)의 후일담이 진행되는데 전작(前作)의 중첩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하루키 전작(全作)에서 보았던 이미지의 중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양 사나이를 연상케하는 모호한 존재의 출몰, 끝내 독자에게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는 모종의 비밀을 품은 소년(보통은 비밀을 품은 소녀로 많이 등장했으나 이번에는 소년), 그리고 결코 미인은 아니지만(항상 그랬다) 젊고 매력적이고 주인공에게 호감을 가지는 여인(불륜녀로 많이 등장했으나 이번에는 이혼녀)과의 연애담, 그리고 남자의 기억 속에서 계속 반추되는 소녀의 이미지 등. 그럼에도 2부가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하루키만의 중첩되는 이미지야 이제는 참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단련이 되었고, 중요한 것은 결말이었다. 2부는 그 자체만으로 새로운 미스터리를 자아내고 있었고, 그 해결책과 전작에서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의 해결까지를 작가가 어떤 식으로 '확실'하게 마무리 지을지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속 시원한 해결 같은 것은 없을 것이라는 예감은 있었다. 그것도 하루키만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니까. 하루키는 애초부터 '불확실'의 늪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작가이거나 불확실 그 자체를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일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 작품 자체가 원작이 된 중편소설, 혹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작품의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40년 전의 그림자가 아직까지도 하루키의 작품 속에서 아른거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써도 어쩌면 이런 결과밖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어느 순간 우리는 본체가 아니라 그림자로서(그림자라는 것조차 인식 못 한 채)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본체라는 진실은 어딘가 멀리 저 너머에 두고(잃어버리고) 망각 속에서 유령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다는 이야기만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걸 한 번 더 강조하고자 이 이야기를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다 읽은 후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다시 펼쳐 보았다. 역시나 중첩되는 이미지, 이야기, 캐릭터가 많았다. 순수하게 읽히는 재미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쪽이 더 좋았다. 그 작품은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 이야기(세계의 끝)도 좋았지만 암호를 취급하는 계산사로서 주인공의 활약을 담은 이야기(하드보일드 원더랜드)도 흥미진진했다. 놀라운 것은 당시 작가 후기의 내용이었다. 그때 하루키는 그 작품의 탄생 배경을 설명하면서 몇 년 전에 문예지에 발표했던 중편 '마을과 그 불확실한 벽'이 미완으로 끝난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그 이야기를 완결 짓고자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썼다고 했다. 그 장편을 마친 후 작가는 작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만족했지만 여전히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 아직 미완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를 다시 쓰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과연.
다시 쓸 일이 없을 거라 호언했던 이야기를 기어이 다시 쓴 결과물이 바로 이번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인 것이다. 글쎄.
이런 정도의 이야기라면... 그때의 하루키 결심처럼 다시 쓰는 일이 없었던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마치 '1Q'84'의 3부를 굳이 쓸 필요가 없어 보였던 것처럼.
이번 신작의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또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작품(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은 여전히 미완인 것 같고 적절한 결말을 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고. 그래서 그때와는 다른 형태의 대응이 또 있어도 좋지 않을까 싶어, 덮어쓰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병립하는, 상호 보완적인 또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이번 신작 집필에 착수한 것이다.
일단 신작이 나왔으니 작가는 자신의 그런 바람들이 어느 정도 반영된 성공작인 양 소회를 밝히고 있지만 과연 앞으로 다시 몇 년, 몇 십 년이 흐른 후에도 작가는 이번 신작에 대한 만족감을 지금처럼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야 물론 모든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돌아볼 때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는 법이겠지만 이번 작품은 작가가 피하고자 했던 그 중첩의 이미지가 너무 강한 데다가 하루키 특유의 낯익은 이미지의 중첩도 많았다. 마무리 또한 전작과 마찬가지로 '불확실한 채'로 종결된다.
또 작가는 후기에서 보르헤스의 말을 인용하며 한 작가가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이야기의 수는 제한되어 있다고도 한다. 그 말 그대로인 것 같다. 소설가 김훈도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퍼내도 퍼내도 창작의 샘이 마르지 않는 천재가 아닌 이상 작가가 쓸 수 있는 이야기의 양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즉 어느 순간 동어반복, 이미지의 중첩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하루키 또한 이미 그런 한계치에 다다른 느낌이다.
순수하게 환호하며 읽었던 하루키의 작품은 '1Q84'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조차도 3부는 아니었다. 이후의 작품은 확실히 이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내 독서력에 너무 깊은 파장을 불러일으킨 작가라 신작이 나올 때마다 늘 기대하고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바람이 있다면 하루키가 다음 신작에서는 의도적으로라도 전작과의 차별을 선언하며 완전히 다른 이야기, 다른 이미지, 다른 캐릭터로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변화를 모색해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다.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다면 과거에 발표한 숱한 중단편들에서 영감을 취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예전부터 하루키는 장편보다 단편을 더 잘 쓰는 작가라 생각했고, 실제로 훌륭한 작품은 단편에 더 많았다. 하루키의 작법 스타일도 장편보다는 단편에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도서관에서 있었던 기이한 이야기', '빵 가게 습격', '빵 가게 재습격', '개똥벌레', '헛간을 태우다', '땅속의 그녀의 작은 개', '코끼리의 소멸',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 '드라이브 마이 카' 등 뛰어난 단편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 중에서 장편화되거나 영화화된 것들도 많다. '개똥벌레'의 경우 '상실의 시대'라는 장편이 되었고, '태엽 감는 새와 화요일의 여자들'은 '태엽 감는 새'라는 장편이 되었고, '헛간을 태우다'는 이창동 감독에 의해,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 의해 각색되어 각각 영화로 만들어 졌다. 나는 특히 '시드니의 그린 스트리트'라는 단편을 좋아하는데 다른 하루키의 작품과는 달리 경쾌하고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로 일관하며 주인공이 괴짜 탐정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분위기로 탐정이 주인공이 장편소설을 써 준다면 두 팔 벌려 환영할 것 같다. 분명히 새롭고 흥미로운 장편이 나올 수 있을 것 같다. 세계적인 상을 여럿 수상하고 노벨상에 거론된다고 너무 진중한 작품만 쓸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벼운 분위기의 탐정 소설 같은 것도 하루키는 얼마든지 잘 쓸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식의 변화로 동어반복이나 소재 고갈의 늪을 피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SF나 호러 소설을 써도 좋을 것 같고. 이제와서 변화를 모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미 하루키의 단편들에서 나는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장르색을 경험한 바 있다. 나는 여전히 하루키의 다음 작품을 다시 기다린다. 전작의 그림자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난 새로운 하루키의 소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