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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3 2 1 (1) (양장)
폴 오스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1월
평점 :
이미 밝혀진 대로 퍼거슨이라는 주인공의 네 개의 삶을 교차해서 그리고 있다. 독특하다면 독특한 방식인데 문제는 삶이 바뀌는 시점에서 뭔가 특별한 소설적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당연히 어떤 특별한 계기(스크루지처럼 유령이라도 나타나거나...)를 통해 퍼거슨의 삶이 다시 시작되는 줄 알았는데 그런 거 없이 작가는 그냥 퍼거슨의 삶을 조금씩 다르게 네 번을 쓴다.
네 명의 퍼거슨의 삶의 모습이 비슷비슷했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다를 수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하다. 네 개의 삶이라고 해서 나는 각 퍼거슨의 삶의 서사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줄 알았다. 작은 선택 하나로 삶의 모습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줄 알았다. 하나의 삶에서 작가로 성장하는 퍼거슨이 있다면 또 다른 삶에서는 완전히 다르게 암흑가의 보스가 된다거나 마술사나 마법사, 혹은 아주 과거로 돌아가 전쟁 영웅이 된다거나 뭐 이런 식의 거창한 상상을 했었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내 부푼 상상력은 무참히 깨어졌다.
소설 속 네 명의 퍼거슨은 모두 작가 자신이 살아왔던 50년대부터 60년대까지의 미국을 배경으로 소년기~청년기를 살아가며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며 작가로 성장해가는 자전적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었다.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의 삶이 이런 식이니 나중에는 지루하고, 헷갈리고(말했다시피 네 삶이 비슷비슷하니까), 꾸역꾸역 읽는 기분마저 들었다. 특히 소년기 후반에서 청년기까지 대부분의 이야기를 차지하는 퍼거슨의 연애(혹은 성애)사는 정말 짜증 날 정도로 지루하고 방만했다. 이건 뭐 과도한 체험담이거나 아니면 그때 이루지 못한 자신의 연애 판타지나 로망을 뒤늦게 글로 분출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늘어지고 넘쳐나고 불쾌하기까지 했다. 늘어지는 줄도 모르고 혼자 심취해 신나게 썼다는 느낌이 들었고, 어쩌면 이 장면들을 맘껏 쓰기 위해 이 소설을 시작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좀 들어내도 괜찮았을(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분량이 이렇게 늘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노작가의 절제가 아쉬웠다.
만일 이 이야기를 순서대로 읽지 않고 네 명의 퍼거슨 각각의 이야기를 하나씩 떼어서(1-1, 2-1, 3-1... 식으로 읽은 후에 다시 1-2, 2-2, 3-2... 식으로) 읽어나간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아마도 나라면 1과 2의 퍼거슨까지는 읽어내도 3부터는 읽기를 포기했을 것 같다. 큰 차별성을 느끼지 못하는 한 인간의 또 다른 삶을 다시 처음부터 읽어야 한다면 지난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독후감을 제대로 쓸 것 같으면 아직 할 말이 쌓였으나 일단 기대치에 못 미친 작품이기에 여기에서 감상을 마친다. 물론 장점도 있고, 재미있게 읽은 부분도 있지만 과도한 홍보 문구와 기념비적 작품임을 상기한다면 만족보다 실망이 컸고, 이전의 대표작들보다 나은 점을 찾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