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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봄 - 상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7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0년 3월
평점 :
귀신보다 무섭고 끔찍한
깊고 깊은 인간의 악의...
얽히고설킨 원한과 악의, 명분과 희생, 그리고 사랑의 여러 모습들을 '세상의 봄'에서 볼 수 있었다. 초반부는 '외딴 집'을 연상시켰는데,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도 그런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에도 시대 기타미 번의 젊은 번주 시게오키는 모종의 이유로 폐주되어 고코인이라는 별저로 유폐된다. 그곳에는 시게오키를 충심으로 모시는 무사, 관리인, 의사, 하인 등 여러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다키도 고코인으로 불려가 시게오키의 시중을 들게 된다. 짧은 결혼 생활을 실패로 끝낸 다키는 오래전부터 젊은 번주 시게오키에 대해 동경과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곁에서 지켜본 시게오키는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정신이 병들어 있다. 병든 영혼의 틈새에 어린 소년부터 야수 같은 사내, 사악한 여인까지 여러 인격들이 깃들어 있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다키와 주변 인물들은 시게오키의 여러 인격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 속에서 단서를 찾아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추적해간다. 사소한 이유로 번 내의 일가가 몰살되는가 하면 마을 곳곳에서 어린 소년들이 실종되는 등 기이한 사건들이 과거에 여러 차례 발생했음을 알게 되고 그 사건들이 시게오키를 덮친 비극과 맞물려 있음을 간파한다. 저주와 악의로 일그러진 과거의 괴물은 마침내 현재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며 피바람을 예고한다. 살의를 내뿜는 자객이 등장하고, 백골이 발견되고, 산자의 몸에 생령이 깃들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등 무시무시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마침내 번을 뒤흔들 끔찍한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초중반까지는 단서와 복선을 꾸준히 깔며 다소 더디게 진행되던 서사가 중반 이후부터 급물살을 타며 클라이맥스를 향해 내달린다.
드라마의 여왕답게 첨예하게 충돌하는 감정선과 갈등을 드라마에 녹여내는 솜씨가 탁월했고, 공포와 미스터리, 판타지와 액션, 멜로까지 적절히 섞어내는 장르 마술사로의 역할도 손색없이 해낸다. 다만 비극과 불행의 시류를 찾아 거슬러 오르는 과정에서 기존 미미 여사의 작품에서 보기 힘들었던 선정성이 언뜻언뜻 등장해 조금 당혹스러웠고, 무수한 등장인물의 이름과 직업, 마을 지명 등을 익히는 일도 다소 버거웠다. 전작들과 비교해도 인물간 관계를 파악하는 일이 심하게 복잡한 편인데, 다행히 2권 말미에 인물 관계도가 수록되어 있어 틈틈이 참조하며 읽었다.
'외딴 집'과 마찬가지로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주는 독서가 되었는데, 이름과 지명, 인물 관계를 익히는 일이 그랬고,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이 그랬고,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 공존하는 나약함과 잔혹함, 깊고 깊은 인간의 악의를 직시하는 일이 그랬다. 그러나 모든 사건이 해결된 후 두 인물이 소회를 밝히는 라스트는 겨울을 지나고 맞이하는 세상의 봄처럼 따스한 위로와 희망을 안겨줬다. 미미 여사는 역시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절대로 놓지 않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