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달려간다
박성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책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달려간다. 이상한 나라로... 정말로 지금까지 한국 문학에서 보지 못했던 사차원 같은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은 모두 소위 '순수소설'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마치 장르소설을 읽는 것처럼 재미있다. 아니 웬만한 장르소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대단한 흡인력과 ‘스토리’의 재미와 매력을 느끼게 하는 소설들이다.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가운데 특히 ‘우리는 달려간다’ 연작 2‘긴급피난’과 연작 5‘인타라망’, '실종' 등은 추리소설을 방불케 할 만큼의 치밀한 구성과 복선, 기막힌 반전이 돋보이는 수작이다. 근래 한국 소설에서, 아니 한국 소설을 통틀어서 참으로 보기 힘든 멋지고 낯선 소설들이다.

 

박성원의 소설들에는 이미지보다 스토리가 강조된다. 그로인해 우선 읽히는 재미가 대단하다.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사차원의 세계처럼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가 한편의 소설에 꽉 들어차 있다. 시시껄렁한 감상이나 사색, 혹은 어설프게 지껄이는 작가만의 교훈이나 늘어지는 감정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꽉, 차있다. 스토리가!

그렇다고 얕은 주제를 감추기 위해 잡다한 재미로만 치장한 가벼운 소설이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는 무겁다 못해 무서운 것들이다. 이런 주제로 소설을 써보라고 한다면 아마 웬만한 (실력 없는)작가들은 참으로 지겹고, 답답하고, 지리멸렬한 소설을 쓰고 말 것이다. 한마디로 재미없는 소설을 쓰고 만다. 바윗돌처럼 무거운 주제를 낑낑거리며 겨우 조금 굴려볼 뿐이다. 거대하지만 단조롭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바윗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말고는 그들이 딱히 할 줄 아는 일이 없을 지도 모른다. 바윗돌이니까 그냥 바윗돌 그대로의 모습을 감상해라는 식의, 난감할 정도로 재미없는 소설을 쓸지 모른다.

그러나 박성원은 세상에서 건져 올린 무거운 주제들을 치고 다듬어서 전혀 다른 조각품을 만들어 낼 줄 아는 작가다. 근간은 바윗돌이지만 그 결과물은 바윗돌과는 전혀 달라 보이는, 그래서 그것의 재료가 사실은 바윗돌이었다는 것마저 잊게 할 정도의 색다른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다. 바윗돌을 가지고도 자신만의 색다른 세계를 그려낼 줄 아는 작가다.

바로 그런 소설들이 이 소설집에 실린 것이다.

박성원의 소설은 흥미진진하고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정신없이 따라가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들어앉아 있는 무거운 주제를 느끼게 되는 그런 소설들이다. 읽을 때는 내내 흥미롭다가 읽고 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런 소설들인 것이다.

 

소설집에 실린 소설 가운데 특히 연작 소설 '우리는 달려간다'2와 5(긴급피난, 인타라망)가 압권이다. 두 소설은 각각 독립된 이야기와 주제를 가지고 있는 듯 하면서도 기막힌 구조와 스토리로 연결되고 있다.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치밀한 구성으로 이끌어내는 꽉 찬 이야기들과 놀라운 반전에 감탄을 하고, 극찬을 할 수 밖에 없는 소설들이다.

 

의식불명의 한 사내가 있다. 그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을 때 또 다른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는 누구인가, 나를 구해준 사람인가, 헤치려는 사람인가... 그럼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이며, 또 나는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것일까... 나를 바라보는 저 사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내의 기억이 하나 둘 복원되면서 끔찍한 과거가 되살아나고, 현실은 순식간에 악마의 탈바가지를 뒤집어 쓴 살떨리는 공포에 잠식된다.

 

그물처럼 촘촘히 얽혀진 인과관계 속에서 조금도 자유로울 수가 없는 인간의 비극을... 한 명이 웃으면 다른 한 명은 반드시 피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무시무시한 세상을... 작가는 차갑고 우스꽝스럽고 기이한 문장으로 만든 차갑고 우스꽝스럽고 기이한 이야기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그의 소설은 낯설지만 소설 속에 담긴 세상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박성원이 만든 이상한 나라로 나는 계속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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