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박사는 누구인가?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의 탄생

 

 

언젠가 유년 시절 살았던 옛 동네를 찾은 적이 있었다. 그곳은 이미 옛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낯선 동네로 변해 있었다. 천천히 기억을 더듬으며 골목과 골목을 거닐다보니 아직 남아 있는 낡은 연립주택 돌층계에서, 길섶 화단가의 흙길들에서, 때로는 딱딱한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도, 희미하게 찍힌 어린 발자국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롭게 포장되어버린 풍경들의 틈새에 고여있는 옛 시간의 자취들을 목도한 것이다. 수많은 아이들이 돌층계를 오르내리며, 흙길을 내달리며, 지금은 아스팔트로 변해버린 골목 곳곳을 누비며, 아름드리 웃음과 이야기를 남겼을 그 시절의 신화는 이제 무성했던 잎과 열매를 잃고 처절한 시간의 터널을 통과하면서 한 줌 씨앗으로 돌아가 있었다. 유구한 시간과 사연을 품고 화석처럼 단단하게 굳어 버린 작은 씨앗들을 나는 반갑게 두 손으로 집어 올릴 수 있었다. 이 작은 씨앗을 옛기억의 텃밭에 심고 물과 거름으로 가꾼다면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그것은 의식의 밑바닥을 흐르는 이야기의 강과 맞닿을 것이다. 그 강은 시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수많은 물줄기들이 흐르고 흘러, 모이고 모여 이뤄진 것일 테다.

 

이기호는 이번 소설집에서 의식의 밑바닥을 흐르는 이야기의 물줄기를 찾아내 그것을 따라가는 작업을 한다. 문득 발견한 이야기의 기원을 쫓아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도달하는 경우가 있다. 이야기가 탄생된 지점이 무척 낯설어서 놀라고, 그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반대로 이야기의 결말을 알기 위해 하구로 향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도 수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내가 쫓던 하나의 물줄기가 전혀 다른 시류에서 내려온 또다른 물줄기와 합쳐지고, 다시 그 물줄기가 새로운 물줄기에 합류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낯설고 흥미롭다. 그렇게 굽이를 돌며 합쳐진 물줄기는 마침내 거대한 바다의 어귀에 당도한다. 이쯤에서 이야기는 인간으로 탈바꿈한다. 이야기가 결국 '인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야기의 하구에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어떤 인간의 얼굴로 바뀌는 지. 작가는 수록된 단편들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의 시원과, 그 하구에 퇴적되어 있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여준다. 시원과 하구의 모습을 물줄기의 중간 지점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이야기의 운명이란 결국 우연을 가장한 필연, 혹은 필연을 가장한 우연에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연이란 결국 필연의 또다른 이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하나의 이야기가 탄생된다면 그 이야기의 탄생을 위해서 그 계기는 필연적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생에 난무하는 우연의 의미는 이야기 속에서 필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며,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밀수록 다시 가까워지는'은 이런 의미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20세기 명차 가운데 하나인 '프라이드'를 몰고 사라진 삼촌의 행방을 쫓는다. 그것은 삼촌의 이야기를 쫓는 동시에 만들어가는 작업이다. 그 과정에서 삼촌의 인생이 드러난다. 사라진 이야기를 쫓고, 끊어진 이야기를 이어 붙이고, 불현듯 합류되는 다른 이야기들을 목도하는 과정이 말하자면 한 인간의 '삶'이고, 삶이라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의 이야기는 수많은 시류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들의 합류로 완성되듯, 수많은 우연과 필연의 교차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생에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설집 마지막에 수록된 '내겐 너무 윤리적인 팬티 한 장'은 하나의 이야기가 '우연'에 의해 어떻게 변화하고 폭주할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그 이야기가 짊어지고 갈 '필연'적인 운명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부모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 형의 자취방으로 도망쳐 온 젊은 남자는 우연히 반바지 차림으로 문 밖에 서 있는 신세가 되는데, 문제는 그 남자가 입고 있는 반바지가 과연 반바지가 맞느냐, 아니면 팬티냐 하는 것이다. 남자는 굳건히 반바지라고 주장하지만 그를 발견한 사람들은 죄다 팬티라고 반박한다. 반바지가 팬티로 여론몰이되는 순간 이야기는 활개를 치며 새로운 방향으로 질주한다. 희/비극이 공존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인생의 물줄기가 시시각각 방향을 바꿔가며 도도히 흘러가는 것이다. 

 

이기호의 신작 소설집은 이야기로 가득 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진짜 이야기들의 향연도 있고, 이야기에 대한 고민도 있다. 이것은 어쩌면 작가의 '소설 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반영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이기호는 첫번째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부터 두번째 소설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를 거쳐 지금까지 늘 그런 작업을 해왔던 것 같다.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해 인간과 인간의 삶을 그린다. 이야기의 시류를 쫓는 작업이란 인간의 초상을 그리기 위한 스캐치에 다름없을 것이다. 이야기란 인간의 기억 속에 늘 씨앗으로 잠재되어 있으며, 언제든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인간의 삶을 이야기의 물줄기로 가득 채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을 탐구하기 위해 인간의 기억을 더듬고, 그 기억 속에 흩어진 이야기의 씨앗들을 발견하는 일은 그래서 흥미롭고 진지한 작업일 수밖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