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공허한 십자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였다. 단순 추리소설이라 하기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숙제를 던져주는 작품이다.
평소 내가 가졌던 부당한 사회규범에 관해 그는 약간의 해답을 제시해준 셈이다.
광고회사의 기획을 담당하고 있든 평범한 회사원 나카하라는 하나뿐인 외동딸을 강도에게 잃고 만다.
잠시 반찬거리를 사러 아내가 나간 사이에 침입한 범인은 아주 죄도 없는 소녀를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이다.
범인은 오래전 노부부를 살해하고 복역중 가석방으로 풀려났던 사내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돈이 필요했다고 했다.
겨우 몇 만엔을 구하기 위해 살인을 하다니.
그 뒤 나카하라 부부에게 남은 것은 절망과 깊은 상처뿐이었다.
당연히 사형을 당할 것이라고 믿었던 사건은 범인의 변호사의 적극적인 변호로 무기징역으로 선고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하지만 새로운 증거들이 나오고 결국 사형장에 이슬로 사라진 범인.
남겨진 피해자의 가족들이 짊어진 아픔의 무게는 너무나 엄청났다. 결국 나카하라와 아내인 사요코는 아픈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이혼을 하게 된다.
그렇게 11년의 세월이 흐른 후 나카하라에게 형사가 찾아오게 된다. 전부인이었던 사요코가 길거리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이다.
이혼 후 초반에 메일을 주고받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연락이 없었던 사요코는 아픔을 피하지 않고 '사형 폐지론이라는 이름의 폭력'
이라는 책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을 알게된다. 반려동물의 장례식장을 운영하고 있던 나카하라는 사요코의 장례에 참여하면서
사요코의 살해사건뒤에 숨은 비밀에 한 걸음씩 다가가게 된다.
세 살 무렵 병으로 엄마를 잃은 사오리는 일로 바쁜 아빠를 대신하여 살림을 돌보게 된다. 늘 외롭던 여중생인 사오리는 어느 날
자신과 비슷한 취미를 가진 한 학년 선배인 남학생 후미야를 알게되고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어린 두 중학생의 철없는 사랑은 훗날 커다란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만다.
우리 사회에는 범죄자를 심판하는 법이 존재한다. 법원 앞에서 눈을 가리고 칼과 저울을 든 동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유스티티아(라틴어: Justitia) '정의의 여신'은 법이 만인 앞에 정의롭고 평등하다는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죄를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살인한 자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가장 합당한 처벌처럼 보인다. 나역시 잔인무도하게 연쇄살인을 하고도 사형당하지 않는
범인들을 보고 분노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이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나카하라와 사요코는 막상 범인이 사형에 처해지고도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알고 허탈해진다. 죽은 아이도 돌아오지 않았고 범인에게 사죄의 말도 듣지 못했다.
다만 더 이상 재판에 휘둘리기 귀찮으니 죽게 해달라는 이기적인 답변외에는.
'사형'이 살인자에게 최선이었을까. 사요코역시 사형제도 폐지론이 피해자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폭력인지를 알리기 위해 자료를
모으면서 커다란 회의에 빠지게 된다.
만약 갱생을 확신하고 풀어주었던 범인을 사형시켰더라면 자신의 딸은 죽지 않았을까.
사형제도에서 유일하게 증명될 수 있는 것은 '범인은 이제 누구도 다시 죽이지 못한다는 것'뿐이다 라는 답만 얻을 뿐이었다.
단지 그 하나의 증명이라도 피해자의 가족들은 사형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과연 살인자에게 가장 합당한 처벌은 무엇일까.
아이를 잃은 부부의 아픔과 11년 후에 아내가 살해되는 기이한 사건뒤에 숨은 비밀을 풀어가는 미스터리의 플릇도 훌륭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지금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는 사회에 던지는 숙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살인자의 인권도 보호되야 하는가..하는 의문으로 오랫동안 사형이 집행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불만이 많았던 나로서는
사요코가 자신의 신념에 회의를 느꼈던 사형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오직 한가지 뿐이라는 결론에 '각각의 사건에는 각각의 결말이
있어야 한다'에 또 다른 숙제를 떠 안은 느낌이다.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가 다른 추리작가와 차별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싶다.
단순히 범인을 쫓는 것을 넘어서 독자에게 또 다른 공을 넘기는 방식.
책을 덮고도 한참동안 수 많은 피해자들과 가해자들의 삶을 떠올리게 된다. 때린 놈은 발뻗고 못잔다지만 실제로 교도소안에는
공허한 십자가를 진 무심한 범죄자들이 수두룩 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인간은 인간의 죄를 어디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정하게 처벌할 수 없다...이다.
최근 몇 년간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중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