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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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살 터울의 자매 이름을 합쳐놓으면 '도토리'가 되는 아주 재미있는 이름의 자매 이야기이다.

일본어로 '도토리'는 '돈구리'라고 발음하는데 언니 이름은 '돈코' 동생의 이름은 '구리코'이니

그 이름의 유래부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자매를 낳은 병원 뒷마당에 도토리나무가 있었고 아이를 낳던 날 나무밑에 떨어져 있던 도토리를

주우며 아이이름을 떠올렸다는 자매의 부모는 조깅을 하러 나갔다가 졸음운전을 하던 생선운반트럭에

치여 죽었단다.

그 후 구리코는 오래도록 회를 먹을 수 없었다. 맛있는 회맛속에 녹아든 부모님의 목숨이 생각나서..

 

 

활달하고 솔직한 언니 돈코에 비해 내성적이고 섬세한 구리코는 그 사건으로 심한 트라우마를 갖게 된 것같다.

부모님을 잃은 후 여기 저기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던 자매들은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기에 자신들의 존재가

짐이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 했다. 아이가 없던 삼촌집에 있을 때는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자매를 입양하여

데릴사위를 보고 싶어하던 까탈스런 이모집에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기어이 언니 돈코는 눈이 내리는 어느 날 구리코에게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가출을 하고 만다.

몇 년후 언니는 친할아버지를 설득하여 구리코를 찾아와 함께 살게 되지만 혼자 남겨졌던 구리코는 몸과 마음에

병을 얻게 된다.

 

연로하신 할아버지 집에서 할아버지를 돌봐드리며 살아가던 날들도 평화스러웠지만 혼자사는 삶에 익숙한 할아버지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남몰래 노력을 하는 모습에서 두 자매의 외로움과 처지가 가슴아프게 다가온다.

좋은 감수성을 가진 언니 돈코는 작가로 활동하고 자유연애를 즐기며 활기차게 살아가지만 동생 구리코는 마치 은둔자처럼

세상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한다. 건강도 좋지 않았지만 뭔가 구리코에게는 특별한 영의 세계가 존재하는 듯 느껴졌다.

오래전 같은 학교를 다녔던 남자친구의 꿈을 꾸면서 막연하게 그에게 불길한 일이 일어났음을 짐작한다.

결국 그에게 닥친 불행한 소식을 접하고 그의 흔적을 쫓아 떠난 여행길에서 실제 본적이 없는 그의 엄마를 한 눈에 알아보고

꽃을 건네는 장면은 꿈인듯 현실인듯...구리코의 특별한 영적세계를 확인하게 된다.

 

 

할아버지의 유산으로 당분간 돈걱정이 없어진 자매는 뭔가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찾는다.

그 것이 바로 '메일 보내기'였다.

누구에겐가 말을 하고 싶은 사람에게 문을 열어놓고 기다리면 누군가 도토리자매에게 메일을 보낸다.

정해진 틀안에 정해진 글 자 수만큼이라는 규칙은 있지만 반드시 답장을 해주는 도토리자매.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전전하던 외로움과 아픔이 있어서인지 그녀들의 답변은 수많은 외로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는다.

'가끔, 책도 쓰지 않고 텔레비젼에도 출현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자신이 믿는 것과 해 온 일을 말하지 않은 채

죽어간 위대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내면이 호수처럼 맑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 잔잔하고 우아한 죽음.

살아 있는 동안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던 만큼 고요하게 하늘에 안긴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생채기투성이

손도, 지치고 늘어진 육체도 아름답게 사라진다...' -67p

 

구리코는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함을 볼 줄아는 사람이다.

아무에게도 기억되지 않을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도 내면이 아름다웠고 부지런한 삶을 살았을 어떤 사람들을

생각해낼 줄 아는 그녀의 감성이 바로 작가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죽은 친구 무기를 찾아가는 여행을 빼면 대단한 사건도 없는 잔잔한 작품이지만 묘하게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누구나 숨어있는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구리코의 은둔을 보면서 그리고 다시 세상밖으로 발을 내딛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옷을 사는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예감하게 된다.

그 희망과 트라우마를 상쇄시키면서 숨어있는 내 안의 어둠에게 작별을 고하는 것 같은 쾌감이 느껴졌다.

바로 이게 요시모토 바나나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일 것이다.

내가 왔다 간 흔적조차 희미해질 어느 날이 오게 되어도 남들은 몰랐지만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격정의 순간이

담겨졌던 내 삶을 그녀만큼은 위대한 사람이었노라고 말해 줄 것만 같아 기운이 난다.

바로 이게 요시모토 바나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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