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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이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꽉 채워지지 못한 사람들의 허름한 인생사가 잡초처럼 질기게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민들레처럼 제 존재를 흩뿌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마음 한 구석이 골절되거나 온전한 울타리를 갖지 못한 어설픈 가족들 사이에서
버려지고 상처받아 비루하게 살아가지만 생떼같은 자식을 차가운 땅에 묻고 돌아와서도
밥은 먹어야 하는 에미처럼 눈물 섞고 설움 섞어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무게감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이미 충분히 말랐음에도 살찌지 않으려는 여자 소희는 먼저 간 남편이 과도한 간섭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아내가 온실안에 빚깔고운 꽃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길 바랬던 남자는 그 자신도 억압과 폭력을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세상에 주눅 들었던 소희는 사랑이라고 믿어지는 남자들에게 쉽게 몸과 마음을 열고
다치면서도 죽일 놈의 사랑을 향해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곤 한다.
닭집 여자 효임은 제대로 된 사랑하나 물어다 줄 요량으로 얼굴이 반쪽이 된 소희를 위해 통통한 닭 한마리를
튀긴다. -그늘 바람꽃-
오직 저 남자와 눈부신 아침을 맞고 살을 부비고 살고 싶어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점점 시력을 잃어가고
고향으로 전근되어 할 수 없이 시어머니와 살게된 여자는 낮술로 답답한 일상을 이기고 있다.
아들을 보려고 들였던 후실의 자식이었던 여자는 태생의 열등감으로 시어머니에게 주눅들 수밖에 없다.
오랜만에 남편과의 나들이에서 그토록 고고했던 시어머니 역시 후실의 자식임을 알게되고 비로서
스스로 옭아맨 족쇄에서 풀려난다. 아슬아슬했던 삶에서 벗어나와 제법 힘을 내서 살아보겠다고 다짐한다.
-그 집앞-
'엄마 시집가'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훌쩍 떠나버린 딸은 저를 닮은 딸 하나를 낳고서야 제에미를 찾아왔다.
사업에 실패한 사위를 위해 제 집을 팔고 딸집에 얹혀 살게된 한내댁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돈의 뒷치닥거리를
하며 늙어가는 딸의 인생을, 자신과 딸을 닮은 손녀의 인생을 지켜보면서 오늘도 성경이 든 가방을 움켜쥐고 새벽길을
나선다. -어스릅녘-
'오래 한곳에 박혀 있던 돌을 들었을 때, 그 바닥에 고여 더 짙어진 흙 빚깔, 여자의 어딘가에 그런 빚깔이 고일 거야.'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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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의 단편들에게서는 바닥에 고여 더 짙어진 흙 빚깔같은 무게감과 오래된 도배지에 피어난 곰팡이꽃의 알싸한
내음 같은 것이 느껴진다.
해가 지기 시작한 골목에서 갑자기 길을 잃은 듯한 막막함과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엄마의 묵은 옷에서
맡아지는 이상한 서러움 같은 것.
선한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선 신축 아파트 옆에 허름하게 자리잡은 판잣집에서 우울하게 퍼져나오는 흐린 전등불처럼
'그래도 저 안에 누군가 치열한 삶을 살고 있겠구나'싶은 이상한 안도감과 서글픔. -우리들의 털켜-
이혜경작가의 작품은 처음이다. 아주 오래된 한국문학단편집을 읽은 느낌이다.
문장 하나 하나가 수 많은 자갈돌에서 잘 생긴 것만은 골라낸 것 같은 정성스러움과 애틋함이 깃들여있다.
우울하고 어둑한 유년의 기억과도 만나고 시장에서 목욕탕에서 등산길에서 마주친 낯선 이들의 비밀스런 삶을
들여다 본 것같다.
이미 무거워진 삶의 무게에 조그만 짐 하나가 더 얹어진 묵직함이 슬프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앙 다문 입술에 찍힌 시퍼런 잇자국처럼 기어이 일어나고 말 것같은 희망을 자꾸 구부러지는 허리춤에 찬 복대처럼
둘러 놓았기 때문이다.
우린 때때로 자꾸 느슨해지는 일상을 벗어나 빛나는 어느 시절, 혹은 어두웠던 어느 시간들을 향해 똑바로 맞서야
한다. 아련하긴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그 집앞'을 찾아가 나를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