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 젊은 인문학자 27인의 종횡무진 문화읽기
정민.김동준 외 지음 / 태학사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때로는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이 어떤 기록물보다 충실한 역사 자료가 된다.

당시의 인물과 풍물은 물론 역사의 현장까지도 우리 눈앞에 가감 없이 전해주기 때문이다.

'옛글을 읽는 묘미! 옛 문인들의 삶을 한눈에 보는 재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한문학,국어학,

철학,음악사,미술사와 같은 각종 한국학 양념들을 적절히 버무려 스물 일곱가지의 맛깔난 만찬이

차려진 괜찮은 식탁이 차려졌다.

 



 

학교나 전공에 상관없이 그 분야에서는 내노라하는 전문가들이 가장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지고 솜씨있게 뽑아낸 작품이니 아마 한국 최고의 교양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과거 선비들이 즐길 수 있었던 문화는 시를 짓고 술을 나누는 정도의 소박한 것들 이었을것이다.

굳이 사치스러운 취미가 있다면 겨우내 추위를 이기고 가장 먼저 핀다는 매화 한그루를 작은 분을

옮겨 달빛을 벗하고 은은한 촛불아래에서 그윽한 매화향을 즐기는 '매화음'정도가 아닐까.

화원 신분의 김홍도역시 2000전을 들여 매화를 사고 800전으로 술 몇되를 사서 동인들을 모아

매화음을 마련하였다니 당시 매화 완상의 풍조가 대단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1810년, 두릉에서 다산 초당으로 편지와 함께 치마가 배달되었다. 빛 바랜 낡은 치마,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옷. 부부의 인연을 맺은 지 어언 34년, 떨어져 산 세월이 어느 덧 10년이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보기와 달리 곰살궂은 데가 있었다. 친한 벗과 제자를 위해 낡아 헤진 천을

잘라 멋진 글과 글씨를 써서 작고 예쁜 첩으로 만들어 선물한곤 했다. 그의 아내가 굳이 낡아 못 입게

된 치마를 보내온 것은 남편의 이런 소용을 헤아렸기 때문일 터.'       -본문중에서-

 

 

다산은 치마 솔기를 뜯어 잘라낸 다음 풀 칠하고 배접해서 공책을 만들어 잔뜩 풀 죽어 낙담해 있을

두 아들에게 줄 훈계의 말을 적어나간 가르침이 '하피첩' 세 책이 되었다.

실물은 몇 년 전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처음 공개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덥혔다.

 

'하피첩'을 만들고도 자투리 천이 남아 3년 뒤인 1813년 마침 강진사는 친구 윤서유의 아들 윤창모에게

시집간 딸을 위해 매조도(梅鳥圖) 한폭을 그려준다.

 



 

펄펄 나는 저 새가           

내뜰 매화에 쉬네

꽃다운 향기 매워

기꺼이 찾아왔지

머물러 지내면서

집안을 즐겁게 하렴.

꽃이 활짝 피었으니

열매도 많겠구나.

 

안마당에 찾아든 새 두마리는 사위와 딸이다. 멀리 떨어져 가까이 데려와 짝지어준

기쁨을 '머물러 지내면서 / 집안을 즐겁게 하렴'으로 표현했다.

꽃이 많이 피어 열매도 주렁주렁 달리겠다고 하여 딸에게 자식을 많이 낳으라고 축원했다.

 

 

2009년 6월 다산의 매조도 한 폭이 새롭게 공개되었다. 글씨도 그림도 영락없이 그의 솜씨다.

 



 

묵은 가지 다 썩어 그루터기 되려더니

푸른 가지 뻗더니만 꽃을 활짝 피었구나.

어데선가 날아든 채색 깃의 작은 새

한 마리만 남아서 하늘가를 떠돌리.

 

시가 왠지 슬프다. 1813년 8월19일에 지었다. 앞서 시집간 딸에게 준 매조도를 7월 14일에

그렸으니, 이 그림은 그로부터 35일 후에 그린 것이다.

누구를 위해 그린 그림인가?

 

다산은 초당 생활 중에 얻은 소실에게서 홍임이란 딸을 두었다.

혹시 이딸을 염두에 두고 그린 그림이 아닐까.

 

----------------------------------------------------------------본문발췌정리-----

 

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소실을 두었다는 것도 의외이지만 이렇게 매조도를 그리고 시를 지었다는

것도 처음 안 사실이다.

정실에게서 난 딸이 시집을 간 며칠 후 소실 정씨에게서 딸을 얻었다니 우리나이로 52세의 나이에

얻은 딸이니 얼마나 귀여웠겠는가. 유배생활이 끝나고 1818년 두릉으로 돌아오면서 다산은 홍임

모녀를 함께 데리고 왔으나 다시 초당으로 쫓겨 내려갔다. 본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어진 아내라도 어찌 시앗을 좋게 보겠는가.

다산이 아들에게 준 편지에서 '네 어머니의 속이 좁다'고 탄식하였다니 무릇 남정네의 이기적인 속성은

다산도 어쩔수 없었던 모양이다.

소실 정씨는 떠도는 얘기처럼 주막집 노파의 딸이 아니었다고 한다.

정씨가 두릉 본가에서 쫓겨나서 강진으로 내려와 지었다는 '남당사'를 보면 눈물겹기만 하다.

 

어린 딸 총명함이 제 아비와 똑같아서

아비 찾아 울면서 왜 안 오냐 묻는구나

한나라는 소통국도 속량하여 왔다는데

무슨 죄로 아이 지금 또 유배를 산단 말가.

 

'아빠 언제와"'하며 이제 대 여섯살 난 딸이 우는 모습을 상상하니 또 다른 유배의 모습이 아니던가.

결국 그녀는 평생 다시 다산을 만나지 못한 듯 하다. 그렇게 모녀는 무심히 잊혀졌다.

만년의 다산에게는 지울 수 없는 큰 상처였을 것이다.

인륜의 정도 여인의 투기앞에서는 어쩌지 못하는 것인가. 두 모녀의 삶이 슬프기만 하다.

홍임모녀를 생각하며 그렸다고 추정되는 다산의 두 번째 매조도는 절친인 이인행에게 건네어져

이인행의 집안과 누대 연비로 맺어진 문한가의 종손에게 물려진 모양이다.

 

정실 아내가 보낸 치마를 잘라 시집간 딸과 소실의 딸인 홍임을 위해 두 점의 매조도를

남겼다니...치마를 보낸 정실의 입장에서 보면 원통할 일이었을 것이나 다행히 정실부인이

살아생전에는 이 사실을 몰랐을테니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긴 하다.

정민교수님은 유배지인 초당에 열 여덟의 제자들이 와글와글하여 살림을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여 어쩔 수 없이 소실을 들였으리라고 변명(?)을 해주셨지만 남정네의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다산도 남자인 것을.

다산과 소실 정씨와 딸 홍임의 사연이 어린 매조도를 보니 사랑하는 이에게 잊혀지고 홀로

쓸쓸이 늙고 죽어갔을 한 여인네와 아비를 그리며 평생 서녀로 살아갔을 홍임의 삶이 아프기만 하다.

 

 

 '나는 초정 박제가(1750~1805)가 중국 지식인과 교류하는 과정을 주목하고서 그 증거물을 물색해왔다.

조선과 청의 지식인들은 시문과 서책, 그리고 서화를 주고 받았으나 그 밖에도 적지 않은 물건을 주고 받았다.

박제가는 그들에게 주로 청심환과 조선종이와 접부채를 선물했다. 또 조선 소주를 가지고 가서 맛을 보이기도

했고, 조선의 갓과 복건, 일본도 따위도 주었다. 그에 대한 답례로 중국 지식인도 적지 않은 물건을 박제가에게

선물했다. 박제가가 나빙(1733~1799)에게 준 시에 "나는 은화를 주고 산 물건이 하나도 없나니/ 시 주머니

그림 축이 엉성함을 비웃노라"고 읆은 구절이 있는데 그가 조선에 가지고 온 물건 중에는 은자로 산 것보다

선물로 받은 것이 많음을 실토했다.'                 

 

'박제가에게 많은 물건을 준 인사 가운데 손형이란 사람이 있다. 총독을 지낸 손사의의 아들이다.

그는 유독 박제가를 만나고자 늘 목을 빼고 기다렸고, 늘 선물을 주려고 안달이었다. 그 손형이 1790년에

초정 박제가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했다. 다름 아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황제 의종(1628~1644)이

황궁에서 사용하던 현금(玄琴)을 선물한 것이다. 검은 옻칠을 했고 휘는 자개로 만들었다.

줄은 일곱이고 길이는 가로로 무릎보다 길며 복판은 푹 파여 비어 있는 물건이었다.'

 



 

'손형이 박제가에게 이 물건을 준 이유를 명나라 황제의 물건이라 꺼림칙하여 자기 집에 두고 싶지 않아서라고

했는데, 설득력이 충분한 추정이다. 숭정제의 유품을 꺼림칙하게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본문중에서------------------------------------------------

 

청나라 건룽제 치하에서 총독까지 지낸 손사의의 아들 손형의 입장에서는 명나라 숭정제의 유물을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청조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해석 될 수도 있었겠다.

박제가는 1790년 선물받은 숭정제의 유물를 가지고 귀국하여 1792년 돌연 석재 윤행임에게 찾아가 건넸다고 한다.

윤행임은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심양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삼학사 윤집의 후손이다.

당연히 청나라에 의리를 지키는 집안이 유품을 지니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후에 윤행임은 사사되는 사건을 발생하여 숭정금은 다시 떠돌아 추사 김정희에게 흘러 들어갔다가 1853년 후손인

윤정현이 돌려 받았다고 한다.

 



 

안대회교수님은 윤행임의 사후 이 숭정금이 추사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증거를 추사가 쓴 <숭정금실>이란

네글자로 추정하고 있다. '글씨의 내용이 숭정금이 보관된 집이란 의미이므로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최완수 선생의 '숭정고금가 서문'을 들었다.

윤정현이 함경 감사로 재직 할 때 마침 이 지역에 유배온 추사를 만나 선친이 애지중지하던 숭정금의

존재를 물었고 추사는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다고 했고 모두 서울로 돌아온 위 추사는 숭정금을

윤정현에게 보냈다고 한다.

교수님은 아무래도 추사가 숭정금을 윤정현에게 돌려주며 숭정금을 보관하고 즐기는 집이라는 의미로

써서 보내준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정작 김정희는 숭정금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남기지 않은 것이 그 이유의

하나로 들수 있다는데..

추사가 숭정금을 실제로 보관했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왕이 애지중지하던 거문고가 어찌어찌하여 조선의 박제가에게 전해지고 다시 윤씨집안으로

흘러들어왔던 사연이 기구하게만 느껴진다. 그후 숭정금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이렇듯 한 학자에 의해 다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었으니 한 때는 찬란했던 명나라의 시간들이

퉁땅뚱땅하면서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듯 지나간 시간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림 한장 한장을 들여다 보니 그 곳에는 종이와 물감이 아닌

살아있는 인물과 사연들이 그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박물관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각 분야에 전문가들이 훅 펼쳐서 3D의 생생한 입체감으로 전달해주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의 시간속을 다녀온듯 뿌듯하기만 하다.

13년의 세월을 순수한 학문의 열정으로 나누고 조언하고 비판하며 이 책을 만들어 주신 젊은 인문학자

27분에게 진정한 감사의 마음을 보낸다. 내 서고에 아주 소중한 유산으로 남길 책을 만들어 주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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