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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신 날
김혜정 지음 / 델피노 / 2023년 9월
평점 :
품절
누구에게나 일생에 하루쯤은 '눈이 부신 날'이 있지 않을까.
다만 그걸 알았는지 몰랐는지만 다를 뿐. 나는 스물 중반이 오기 직전 어느 화창한 봄 날에 아, 오늘이 내 일생에 가장 눈부신 날로 기억되겠구나 했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그 눈이 부신 날이 계속되지 않는 법, 누군가는 그 눈부신 순간이 섬광처럼 지나가고 누군가는 오래 오래 머물기도 한다. 사랑이 내게 왔던 어느 날은 눈부신 하루였겠지만 아픈 이별은 언제든지 다가오고 다시는 살아질 것 같지 않는 날들로 변해 고통이 시작되기도 한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이 하필 내 친한 친구로 인해 깨져버린 날, 그건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친했던 친구의 배신 합작품이라는 것 때문에 더 아픈 이별로 남고 마음정리를 위해 떠났던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의 한 마디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모든 인연에는 수명이 있어요.'
아 그래서 내가 걸어온 길에 있었던 인연들과의 이별들도 수명이 있었던 것이었구나.
갑자기 소설속 은처럼 나에게도 위안이 몰려왔다. 내 잘못이 아니었어.

갑작스런 팬데믹 이후 온라인 수업을 들었던 아이들에게 이상징후들이 보인다고 한다.
어울려 살아가는 법이 낯설고 위험에 대처하는 방법이 결핍되고...그런 결핍들로 자란 아이들은 어떤 세상을 살아가게 될까.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것 또한 앞선 세대 누군가의 잘못은 아니었는지.

아날로그 시대를 뛰어넘어 디지털 시대가 오고 생각지 못했던 편리의 세상이 도래했을 때, 과연 인류는 행복할까. 서울과 수원을 13분만에 돌파하고 심지어 뉴질랜드를 1시간만에 도달할 수 있는 그런 편리한 교통시스템이 깔리고 재택근무는 일상이 되는 그런 세상.
하지만 지구오염은 더 심해져서 여러명이 함께 모이는 것이 불가능한 일상이 되는 그런 세상이 인류가 꿈꾸는 세상은 아닐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별이든 천지개벽의 세상이든 결국 오고야 말 것이다.
가끔 나는 내가 살아왔던 시간속에 존재했던 가난과 불편함과 오류의 어떤 것들이 그리워지는 시간이 올 것이라 생각한다.
결핍이 없어지는 세상이 왔지만 또 다른 결핍이 기다리는 세상따위을 맞고 싶지 않다.
불편하지만 서로 부대끼고 배려하고 섞여사는 시간들이 그리워지는 시간이 올 때-이미 왔을지도 모르지만-나는 비겁할지도 모르지만 기계로 끼워맞춘 장기같은건 하지 않은 채 점잖은 죽음을 맞고 싶다. 그리고 남겨진 내 아이들이 맞을 미래의 시간들이 편리함에만 길들여 많은 것들을 잃고 새로운 결핍의 시간들을 겪지 않고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눈부신 어떤 날'이 미래에 존재하지 않고 이미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했던 따뜻한 소설이었다. 그리고 조금쯤은 두려운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