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연탄
윤인기 지음 / 아우룸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가 들면 어려서는 쳐다보지도 않던 음식들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맛이 맹숭맹숭 맹물같았던 설렁탕이며 곰국, 그리고 이름도 모르던 산나물의 깊은 맛들이

혀에 착착 감긴다. 맵고 짠 음식들로 익숙해진 입맛이 뭔가 순수한 것들을 알아가는 것 같다.

글도 그렇다. 범인을 추적하는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물의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가도 잠시

가미되지 않은 순수의 글을 만나고 싶어진다.

나보다 1년 먼저 세상에 나온 저자의 글을 보노라니 나의 어린시절이 겹쳐지는 것 같아

잠시 추억에 잠겨보기도 하면서 '맞아 그땐 그랬지'하며 읽었다.

 

 

 

 

5남매였던 우리집은 -그 땐 그 정도가 보통- 겨울이 오면 연탄이며 김장을 갈무리를 하느라 바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조그만 방들에 한 가정씩 세를 들어 사는 집이 대부분인지라 마당도 좁고 광도 좁아서 수돗가에는 늘 부산했었다. 지금이야 20포기를 담네, 사먹네 하지만 우리 어려서 김장은 먹을 것 없는 겨울에 소중한 양식인지라 한 집에 100포기, 200포기는 기본이었던 것 같다.

서로 품앗이를 하며 그 많은 김장을 담그고 없는 돈을 끌어모아 연탄을 광에 쟁이고 쌀 한가마니

들여 놓으면 비로서 엄마가 마음을 놓곤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자의 집도 그랬나보다. 자꾸만 없어지는 공동 광의 연탄. 저자의 엄마는 옆집 아낙이 연탄을 몰래 꺼내가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려준다. 그리고 어느 날, '집 나간 연탄이 돌아왔다'며 기뻐한다.

나 같으면 당장 왜 우리 연탄을 가져갔냐고 한바탕 난리가 났을텐데 그 어머니 참 무던도 하셨다.

그런 어머니를 너무 일찍 여워 마음이 싸해진다. 살다보니 부모, 특히 어머니는 오랫동안 내 어리광을 받아주시는 유일한 분이란걸 알게되어 더욱 그렇다.

 

 

 

 

결혼 후 집들이며 백일, 돌같은 잔치가 끝나고 한동안 친구들 결혼식에 불려다니다가 마흔 무렵부터 친구 아버님들의 부음에 불려나가는 일이 잦아지더니 그 다음은 어머님들 차례가 왔다.

그래도 7순 넘기고 팔순 넘겨 돌아가셨으니 그리 애통한 죽음은 아니라고 해도 역시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픔이다. 그러더니 요즘은 나와 연배가 비슷하거나 어린 지인들의 갑작스런 부음을 받는다.

이게 더 아프다. 아직 살날이 많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예고도 없이 훌쩍 떠나고 나면 정말 사는게 뭔지, 죽음이란게 바짝 다가와서 '이제 실체가 보이니?'하며 달려드는 것만 같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고 정승이 죽으면 그저 그렇다는 속담처럼 누군가 하나의 죽음이

오면 그 사람이 지나온 모든 시간들을 보는 것 같다. 부잣집 사람들은 여전히 부가 넘치니 문상객들도 넘치고 가진 것 없었던 사람들중에는 평소 덕을 쌓아 없는 와중에도 서로 십시일반하는 사람들로 넘친다. 내가 죽으면 내 장례식장은 어떤 모습일까. 내 지나온 모든 시간속에 해답이 있을텐데 말이다.

 

 

 

 

 

저자의 참회서라고 할까 고백서라고 할까, 그동안 슬쩍 거짓말이나 속임수로 넘어갔던 일들을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웃음이 절로 터진다. ㅎㅎ 이 분 너무 선한 분이시네...하면서.

그 사소한 거짓말도 가슴에 담아놓고 있다가 요렇게 고백하고 털어버리다니 귀엽다고 하면

예의가 없다고 하실런가. 그래도 한번 실컷 웃으니 좋았다.

 

학교 앞 분식점에서 먹던 라면이며 떡볶이. 나도 회수권으로 사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이 회수권을 액면가보다 조금 싸게 구입하는 아이들도 있었던 것 같다.

15원하던 회수권으로 떡볶이를 사먹고 친구들과 노래부르며 하교하던 시간들.

오랜 시간이 지나 학교 앞 떡볶이 집을 가보니 이미 분식집은 사라지고 그 골목도 너무 작아서

놀랐었다. 나이가 들면 오랜 기억은 남고 가까운 기억들은 자주 지워진다고 한다.

참 다행이다. 오랜 기억들이 다 사라지고 나면 버틸 추억들이 없어져서 무슨 힘으로 살 것인가.

이렇게 또 잠자던 추억들을 일으켜 세운 책이 있어 잠시 행복했고 코끝이 찡했다.

 

남산 기슭의 벚꽃은 이제 한 달 여 후면 만개할 것이다.

오랫동안 그 길을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 10년 후쯤 추억을 쌓아 또 만났으면 좋겠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