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라는 책에 있을 거라고 오해했습니다.
'수사학'은 그냥 일종의 '실용적 글쓰기', 에세이 정도라고 생각하면 비슷할 듯 합니다.
(물론 똑같지는 않습니다)
'시학'이라는 단어에서도 현재 통용되는 '시'에 대한 정의와 불협화음이 있습니다.
현재 '시'는 문학의 한갈래지만, 기원전 그리스 사회에서 '시'는 범위가 넓습니다.
'시학'에서 '시'의 범위는 '창작물의 통칭'에 가깝고,
'서정시, 서사시, 비극, 희극'도 '시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시'는 바로 '문학의 원형이 아닐까'하고 짐작해봅니다.
또한 문학 작법과 소설 작법의 원형이 여기 '시학'에 담겨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이 플라톤을 만나 '이데아론'이라는 형이상학적인 방향으로 틀어지면서
현실에서 그 뜻을 펼치지 못했습니다.
꼭 조선시대 신유교('신'이 붙으면 거의 변종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리학의 병폐와 비슷합니다.
모든게 '이데아론'으로 귀결되고 모든게 의미를 잃게 됩니다.
나중에 신학성경의 철학적 기반이 되는 게 '이데아론'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철학이 '이데아론'이기도 합니다.
'이데아론'이라는 껍질을 깨고
다시 소크라테스의 방법론을 우리 일상으로 돌아오게 한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진리(이데아론)를 바탕으로 윤리, 도덕만 주장했던 플라톤 이론에 한계를 느낀
아이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감정, 그 감정이 풍겨나오는 성품에 주목했습니다.
플라톤의 '절제'라는 대명제를 '시학'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공포와 연민'이라는 감정을 대리경험하게 하고
그것을 카타르시스로 해소하고 정화하면서
그에 걸맞는 성품과 감정을 단련하고 연습하게 하는 목적이
바로 '시학'에 있었습니다.
비극, 즉 이야기를 통해서 사람들은 진리와 선 그리고
그것을 넘어 철학의 목표인 '진정한 행복'으로 인도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의 원류를 찾는 것은
어쩌면 근본, 본질, 기저를 향해 가는 시작점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비극의 구성요소 6가지
'플롯, 성격, 사상, 대사, 시각적 요소, 노래'를 보다보니
어쩌면 우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관문이
'감정'이 아닌가란 생각을 해봅니다.
현재 뇌과학계에서도 '감정'이 없인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이란 있을 수 없다고 합니다.
사고로 뇌의 '감정 부분'이 다친 사람의 경우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오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행위자의 말(대사)과 행위에 '성격과 사상'이 드러난다고 하는 부분과
관객의 감정을 요동치게 하는 요소로서 '플롯'은
극과 노래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는 가능성, 아니 그 부분까지 통찰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소설, 드라마, 시나리오, 영화, 노래, 음악까지 플롯은 통용되고,
그로 인해서 감정을 일깨우고 조율하고 정화시켜줍니다.
이 정화(카타르시스)작용을 통해서 우리는 도파민을 느낍니다.
합법적인 마약이라는 노래, 이야기에 중독되는 것이죠.
결국 인간이 창작한 모든 것의 대부분이 이것으로 귀결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생각은 희미하지만
어떤 영화, 이야기에서
창작자는 어떤 의도 이전에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서 창작 작업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의도'를 물었지만,
그냥 '그때 느꼈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거라는 얘기였죠.
서양철학사에서 스승인 플라톤과 함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깊이를 이 짧은 책을 통해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주변 여러 작법서는 '시학'에서 파생된 내용을 너무 장황하게 확장한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혹여 요즘 작법서의 장황한 설명에 방향을 잃었다면 '시학'을 통해서 다시 제대로 방향을 잡아
그 전에 본 작법서마저도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통해서 '작법서들의 근원'을 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