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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껍데기 소녀 세트 - 전2권 ㅣ 블랙 라벨 클럽 16
이제언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연재평도 좋았고, 출간 소개에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쉼터, 마음이 편해지는 동화라 여기게 되는 여운'을 원했다는 작가님의 멘트를 보고 어떤 내용의 책인지 궁금했었다. 권당 6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두 권짜리 책인데다 장르를 의심할만큼 로맨스가 거의 없다는 지인들의 조언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책장이 너무 잘 넘어가서 신기했다. 심장과도 같은 요하가 없이 태어난 빈껍데기 소녀 샨아와 그 주변인물들이 서로에게서 위로받고 함께 성장하며 안식을 찾아가는 전개라 일반적인 로설의 남주, 여주 개념이 무의미한 책이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하며 서로를 보듬고 함께 걷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 책.
치유와 성장의 동화같은 분위기라고 해서 잔잔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어린 소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졸지에 길 안내겸 보모 역할을 떠맡게 된 거친 사내들과 무표정한 얼굴에 겁없이 당돌한 꼬마 아가씨가 긴 여정을 함께하며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었다. 사내들끼리 주고 받는 저렴한(?) 표현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나쁜말 인줄도 모르고 실생활에 바로 써먹던 샨아, 몸만 자랐지 어린 소녀와 정신연령이 비슷해서 늘 티격태격하던 개그스런 캐릭터들때문에 수시로 폭소가 터진다. 웃기기도 하면서 아이앞에서는 바른말 고운말을 써야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기도 했었다.
엄마, 저는 집에 가고 있어요.
안 아파요. 요하가 있어요. 건강해요. 반야야요. 밥도 잘 먹어요.
자울 새끼랑 호구 놈이랑 집에 가요.
비낙이 큰 오라버니 친구래요. 미친놈도 가요.
멀미해요. 걸어가요.
엄마도 사랑해요. 샨아.
-『빈껍데기 소녀』1권 274페이지 본문중에서
이 책의 주요 키워드는 < 요하와 요나, 숭고한 이래, 희생과 배려, 책임의 무게, 진심과 위선, 치유와 안식 >이다.
사실 도입부분에선 작가님께서 구축한 판타지적 세계관이 너무 독특해서 요나와 요하, 이래의 개념이 쉽게 와닿지가 않아 난감하기도 했었다. 만약, 이 책을 읽을 예정이라면 초반 이해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등장인물들 조차 몰랐던 사실들이 대부분이니 책을 읽어가면서 그들과 함께 알아가면 될 것이고, 그 세계관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주요 등장인물의 아픈 경험에서 얻은 교훈과 조언을 통하여 작가님께서 전달하고자 한 메세지만 이해하면 되니까.
나의 작은 아이야. 너는 사랑을 배워라, 용서를 배워라, 관용을 배워라.
미움과 증오와 분노는 내려 두고, 예쁜 마음을 키워라.
나의 작은 아이야, 나의 요나야, 나의 샨아야.
주인공인 샨아 뿐만 아니라 주요 등장인물들 모두 각자의 사정과 상처가 있으며, 각자 결여 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이다. 세상과 단절되어 갇힌 공간에서 홀로 자란탓에 나이보다 어린 외모만큼이나 또래에 비해 아는 것이 많이 부족했던 샨아는 무지하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던진다. 어른들은 난감해 하면서도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주려 노력하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람간의 관계에 서툴렀던 아이가 성장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어른들 또한 당연시 여겨왔던 소중한 것들을 되돌아보고 아이와 함께 조금 더 성장하게 된다. 조바심내는 아이를 위로하던 샨아의 요하, 반야의 현명한 조언이 인상깊었다.
" 언제 잘하게 돼?"
[ 여러 번 실수를 하고 나면. ]
반야가 샨아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 잘하려고 노력하면 된다는 뜻이다. ]
" 실수라며? "
[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지. ]
[ 사람과의 관계 또한 그런 것이지. 실패가 아닌 실수일 뿐이다. ]
[ 샨아, 너는 표현이 서툴 뿐 전부 알고 있다.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어. 그러니 어려워 말아라. ]
-『빈껍데기 소녀』1권 463~464페이지 본문중에서
초반까지만 해도 요하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검은 늑대 모습의 반야가 사람으로 변해서 샨아와 로맨스를 시작하는 남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평생의 반려라는 요하는 연인이나 배우자의 개념이 아닌 또 다른 나, 평생을 함께 하는 영혼의 동반자이자 생명과도 직결되는 심장과도 같은 존재더라. 그리고, 주인공인 샨아는 본편 거의 끝무렵까지도 그저 11세의 어린 소녀일뿐이니 로맨스가 개입될 여지가 애초에 없다. 단지, 로맨스를 아쉬워하는 독자들을 위한 선물인건지 본편이 끝나고 < 만약, ~했었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조금 더 성숙된 샨아의 가상(?) 로맨스 외전 두 편이 수록되어있을뿐이다. 짧지만 여운이 강했던 외전.
로맨스도 거의 없고 주요 등장인물들도 많아 취향탈만하지만, 재미와 감동으로 충만한 책이니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알콩달콩한 로맨스는 없지만 항상 진심을 다해 온 몸으로 부딪혀오는 꼬마 숙녀 샨아의 사랑스러움에 금방 매료될 것이다. 험상궂은 외모와는 달리 마음 여리고 다정 다감하던 자울과 들개처럼 온 대륙을 떠돌다 샨아에게 길들여진 혹우, 몸만 자랐을뿐 정신연령은 샨아와 놀라울만큼 비슷해 말이 잘 통하던 비낙, 절망속에 갇혀 홀로 고통에 신음하며 가시를 세우던 사유가 그랬던 것처럼. 빈껍데기로 태어났지만 사랑으로 충만해진 샨아가 진심을 다해 부른 자장가였기에 등장인물은 안식을 얻고 잠들 수 있었으리라.
샨아가 흥얼흥얼하며 율연이 들려주었던 자장가를 속삭이듯 불렀다.
" 수억 개의 꿈이 여기 있단다. 한들한들 날아올라 반짝인단다. 아이야, 너는 잠들렴. 꿈을 품고 기도하렴.
수억 개의 꿈이 꽃을 피운다. 찬란하게 피어나 하늘에 닿는다. 아이야, 너는 잠들렴. 꿈을 품고 기도하렴.
수억 개의 꿈이 네게 있단다. 굼실굼실 흘러와 네게 있단다. 너를 위해 반짝이고, 너를 위해 찬란하다. "
반야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실현하는 자신의 작은 요나를 응시하다 눈으로 가늘게 뜨고 웃었다.
모든 것이 잠드는 평화로운 시간. 안식을 나누어라, 나의 요나야. -『빈껍데기 소녀』1권 466페이지 본문중에서
평생 사는 것만이 전부였던 아이였기에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익숙치 않고, 마음을 내보이는 방법도 몰라 늘 목각인형 같은 무표정한 얼굴일수 밖에 없었던 소녀. 아이다운 떼조차 쓸 줄 몰라 전부 속으로 삭이기만 하던 어린 샨아가 소중한 이들을 만나서 차츰 평범한 소녀처럼 생기있게 웃고 소리내어 울음을 터트렸을 때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워 뭉클했었다. 그렇게 삶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아이는 본능적으로 소중한 이들의 고통과 상처에 민감해져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려 애쓴다. 그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겠다며 고집부리고 실천하던 아이. 어리지만 누구보다 강했던 샨아가 너무 사랑스러웠던 책이다.
" 나의 밤하늘아. 너에게 전부 배웠다. 슬플 때 우는 법,
기쁠 때 웃는 법, 애틋하게 사랑하는 법.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너로 인해 알았다. 온기를 나눠 주어 참으로 고맙다.
나에게 와 주어 참으로 감사한다. "
세계의 중앙에 위치한 태초의 가르신 대륙은 사람을 잡아먹는 붉은 독초외에는 누구도 살아 남지 못하는 불모지의 땅이었다. 그 황폐한 땅을 정화하여 백성들이 살 터전을 넓히기 위해 찾아온 동서남북 12명의 용사는 '대지의 기운을 가진 황금용을 몸에 두른 이래'와 '물의 기운을 가진 물고기를 자신의 심장이라 부르는 이래 아들'의 도움으로 독초를 녹여 정화하고 비옥한 대지로 일구었다. 이래 아들은 가르신 대륙에 이래 왕조를 세우고 왕이 되었고, 건국에 일조한 12명의 용사는 성과 문장을 하사받아 유훈가문이 되었다. 그후, 가르신 대륙에서 새로 태어나는 모든 아이는 이래 아들이 그랬듯 '또 다른 자기 자신'인 요하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가르신 대륙의 모든 사람에게는 '요하'라는 존재가 함께했다.
요하란 영혼의 반쪽이며, 평생의 반려다.
대륙민은 심장 위, 왼쪽 가슴에 인印을 지니고 태어나며, 그것이 요하의 증거였다.
요하는 평소에는 그곳에 깃들어 있다가 필요할 때면 금수禽獸의 형태로 존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가슴에 자리한 요하에겐 힘이 있다.
영혼의 공명이며, 파장이다.
형태를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으로,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함이다. -『빈껍데기 소녀』1권 25페이지 본문중에서
'요나'란 요하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요하가 없다는 것은 상대 요하의 힘을 속절없이 느낀다는 것이고, 그것은 상대의 힘에 눌려 죽는다는 뜻이다. 대륙민이라면 누구나 심장과도 같은 요하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동녘의 유훈가문 해나에는 요하없이 태어난 한 소녀가 세상에서 격리되어 '결의 방'에서 십년 째 살고 있었다. 심장이 텅빈채 태어난 '빈껍데기 소녀'는 요하를 얻게 된다면 어미의 품에 마음껏 안길 수도, 계속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안고 자신의 요하를 찾기위해 혼자 '요하의 숲'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샨아는 검은 늑대의 모습을 한 밤하늘 '반야'를 만나게 된다. 불완전했던 둘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운명이 뒤섞여 묶였다.
" 우리는 외따로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나는 너의 요나고,
너는 나의 요하이니
그 언제라도 함께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다. "
나라의 근간이 되는 요하를 지닌 이래 왕조의 숨겨진 비밀. 무자비한 통치자이면서 누구보다 책임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던 왕세자 온현. '숭고한 이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그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런 숙명을 타고난 온현이 너무 안스러웠다. 어쩌면 책 마지막 부분의 외전은 끝까지 '이래'여야 했기에 개인이 될 수 없었던 온현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이래'가 아닌 누군가에게 있어 '온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 남자이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던건 온현 본인이었을테니까.
그는 태생이 왕이었고, '이래'였다.
이성이 확립되기도 전인 유년기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달은 어린 소년은 한 사람으로 사는 것을 포기했다.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으며, 누구도 마음에 들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끝을 생각하며 침잠하는 '이래'였다.
숭고한 이래. 그것은 소년의 존재의 의미이며, 소년의 숨통을 졸라 죽이는 족쇄였다.
-『빈껍데기 소녀』2권 603~605페이지 본문중에서
< 본 리뷰는 서평이벤트에 참여하여 출판사에서 제공되는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