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주
우지혜 지음 / 신영미디어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남주 정한의 복수극이 중심이긴 하지만 사실 이 책은 죽은 쌍둥이 언니 '서주'의 이름으로 어둠 속에서 가면을 쓰며 살아가느라 삶의 지표를 잃었던 여주 강주가 비슷한 상처를 가진 정한을 만나 서로의 온기에 위안받고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강주에게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남조 인혁과 정한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온갖 악행을 저질러 온 계모 화연때문에 주인공들이 행복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해 부딪혀서 그토록 바랐던 '평범한 일상 속의 행복'을 얻어 낸 의지의 주인공들이 기특하더라.  

어느 날 갑자기 시신으로 발견된 여주의 쌍둥이 언니 '서주'의 의문스런 죽음과 광기에 사로잡혀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주요 등장인물때문에 작가님께서 연재전 로맨스릴러(?)라고 경고했을 만큼 다크한 전개지만,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도 늘 능청스럽게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주던 정한과 그의 주변 밝은 캐릭터들 덕분에 땅을 파고들정도로 무겁기만한 전개는 아니다. 

스스로 이름을 버리고 서주가 되어야만 했던 강주의 절망스런 프롤로그로 시작된 이야기는 해묵은 원망에서 벗어나 편해진 강주의 에필로그로 끝이난다. 본편과는 달리 에필로그에서만큼은 강주의 진짜 모습을 아는 사람들만 등장하기에 지문에서 '강주'로 쓰여져있다. 책을 읽는 내내 여주의 본명이 '강주'인데 왜 제목이 강주가 아닌 '서주'인 것인지 궁금했는데, 뒷부분에서 왜 서주일수 밖에 없는지 그 이유가 나오더라. 진짜 이름을 알아주는 단 한사람이 있는 한 강주는 평생을 서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도 아마 괜찮을 것이다.  

이제 와서 그 이름과 내가 분리될 수 있을까. 내가 하강주라는 이름을 쓰게 되면, 나는 무엇이 달라질까.

이전의 내가 되는 걸까. 이전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되찾을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하강주는 이미 버려진 이름이었다. 그 이름은 오로지 서정한의 입을 통해서만 꽃을 피웠다.

나는 더 이상 하서주라는 이름을 훔쳤다고도, 그것을 억지로 뒤집어쓰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내 안의 깊숙한 곳에 켜켜이 스며들고 말라붙어, 이제는 도저히 뚝 떼어 낼 수는 없게 되어 버린 어떤 것이었다.

하서주는 힘겨운 날들을 버텨 온 내 흉터이자 훈장이었고, 가련한 내 쌍둥이를 추모하기 위한 꽃다발이었다.

그것을 버릴 수는 없었다. 버리고 싶지 않았다.

" 이렇게 살고 싶어. 하서주라는 이름으로. 너에게만 하강주인 사람으로." - 『서주』551페이지 본문 중에서

 

1인칭 여주시점과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이 혼합된 이중 시점으로 쓰여진 덕분에 죽은 언니에게 덧씌워진 인생으로 힘겨워하는 강주의 감정에 몰입하면서도 정한과 주요 등장인물들의 내면까지 두루 볼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주인공들과 깊이 얽혀있는 어두운 사연의 등장인물 시점도 보여주는 전개라 유쾌발랄한 분위기를 선호하고 주인공들에게 집중된 전개를 원하는 분들은 취향탈 만하다.

 

​과거 주인공들이 함께 지냈던 학창시절은 겨우 2개월도 채 되지않은 짧은 기간이었고, 십 여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떨어져 살며 서로 연락 한번 못했는데도 서로를 그리워하며 잊지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두 사람이 처했던 환경탓이 컸을 것이다. 보호받아야할 가족에게 외면당하고 정신적, 육체적인 학대에 시달리며 세상 어디에도 내 편이 없다 여겼던 주인공들. 끝도 없이 외롭고 고독한 외길을 홀로 걸어야 했던 그들이었기에 본능적으로 서로의 아픔에 공명하여 끌렸을 것이고, 황폐했던 삶속에서 '유일한 내 편'이라는 따뜻한 온기의 기억은 서로를 결코 잊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주문이 되어 주었을것이다.    

  ​

" ......언젠가 다시 만날 때까지, 기억해 줘.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네가 기억해 줘. 그걸 아는 사람은 너뿐이니까."

" 네가 어디에 있든, 어떤 얼굴을 하고 살고 있든 내가 찾아서, 불러 줄게. 네 진짜 이름.

그러니까 너도 나 잊지 마라." 

 

서로를 지켜주고 싶었으나 어리고 가진 힘이 없어 무기력하게 그저 견뎌내는 것 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어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던 주인공들은 그들의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에게 복수의 칼날을 들이댄다.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던 강주였기에 등 뒤에 안전하게 숨겨놓고 다시는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었던 정한의 마음만큼,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던 강주의 마음도 절실했기에 그녀는 정한의 뒤에 숨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나선다. 힘겹게 얻어 낸 행복인니 이제 서로의 곁에서 더이상 외롭지 않기를!

긴 여정이었다. 때로는 언제 올지 모를 그날에 대한 절망에 숨 죽였고, 오랜 시간에 지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날도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었더라면, 절벽에서 떨어지고 우물 속에 가라앉았을지도 모를 그런 사람들.

이제는 따뜻하게만 느껴지는 햇살이 찬란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그보다 더 따스한 서로의 품속에서 같은 미래를 꿈꾸며 걸어갈 얼굴들에 미소가 어렸다.

앞으로도 슬픈 일이, 아픈 일이, 절망적인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곁에 있는 이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이겨 낼 수 있으리라는 것을.

그렇게 기나긴 겨울이 끝나 가고 있었다. - 『서주』568~559페이지 본문 중에서

많은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나오지만 강주 편애모드로 읽었기에, 강주가 그런 힘든 삶을 살게 된 원인이었던 남조 인혁이나 강주 모친에 대한 연민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인혁과 강주 모친은 자신의 감정만 중요한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미성년자인 서주와 깊은 관계를 맺었던 과거부터 강주에게 집착을 보이는 현재까지 그는 법적으로 여전히 유부남이었다. 정말 사랑한다면 법적으로 정리부터 하고 구애했어야지. 이 부분은 강혁을 남주 정한보다 더 돋보이는 순정남으로 만들지 않기 위한 작가님의 의도적인 장치가 아닌가 싶다.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에 비해 이상하게 강주모친에 대한 시점은 부족했기에 그녀에게 어떤 아픈 사연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리 미워도 어린 딸에게 죽은 아이의 그림자를 덧씌운 그녀의 행동은 부모로서 결코 해서는 안되는 끔찍한 짓이었다. 그리고, 꽃다운 나이에 그렇게 져버린 강주의 쌍둥이 언니 서주. 영악하고 심술 궂긴 했으나 그래 봤자 풋내기 여자애였을뿐이던 그녀의 죽음이 안쓰러웠지만 그것이 강주의 잘못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번에도 도우미로 등장했던 도우찬씨~!! 다시 만나서 반갑긴 했는데 비슷한 상처를 가진 다른 주인공들 돕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좋은 인연 만나서 우찬씨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그가 '봉봉 오 쇼콜라' 중독인 것은 당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달달한 누군가가 절실해서 그런 것으로 추정되니, 도우미로 그만 좀 부려먹고 이제 남주가 된 우찬씨로 만나 볼수 있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자책] 나쁜 남자 늦은 사랑
김리원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주에게 못되게 굴다 뒤늦게 사랑을 깨닫고 후회하는 후회남 소재인 걸 대놓고 알려주는 스포성 제목. 요즘은 '개아가'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만한 남주도 많아서 이번엔 대체 얼마나 나쁜 남주인건지 궁금했다. 여주앞에서 대놓고 다른 여자와 관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개아가' 남주에 비하면 이 책의 나쁜 남자 강혁은 양호(?)한 편이지만, 여주 단영의 마음을 알면서도 철저하게 외면하며 자기욕심만 차려온 이기적인 나쁜 남자인 건 분명하다. 평이 엇갈리는 책인데 잘 모르는 작가님이라 큰 기대없이 읽어서 나쁘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부분도 다소 있었기에 취향타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
나쁜 남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존감없이 강혁의 이기심에 끌려다니기만 하던 단영때문에 초반에는 많이 답답했는데, 뒤로갈수록 자존감을 회복하고 당당해져서 다행이었다. 뒤늦게 자신의 마음을 깨닫게 된 강혁도 과거의 무심한 모습을 버리고 점차 내 여자에게만큼은 다정한 팔불출남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이유있는 나쁜 남자의 사정이야 어쨌든 단영이 그동안 그의 이기심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건 분명한데 직접 사과를 하지 않은 건 마음에 들지 않더라. 주인공들이 과거 관계를 맺기 시작하던 날의 회상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보여주기보다는 좀 더 절절하게 무너지며 후회하는 강혁의 모습을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짝사랑을 숨기지 못하고 술기운을 빌어 강혁을 먼저 유혹한 것을 계기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에서 단영은 철저한 약자였기에 자기욕심만 차리는 이기적인 강혁에게 휘둘리며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전직 의사에 영화제작사 사장, 종합병원장의 아들이라는 배경을 가진 강혁에 비해 중졸학력에 가진 것도 없고 말이 좋아 사장 비서일 뿐 회사 잡무를 도맡아하는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격지심에 강혁이 다른 여자와 맞선을 보러 가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선 스케줄까지 챙겨야만 했던 단영. 

미래가 없는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스스로 걸어들어간 덫에서 벗어나지 못해 괴로워하던 단영은 그가 여배우와 함께 있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무슨 일이 있었냐고 따져물을 자격조차 없다는 자괴감에 드디어 헛된 미련을 끊어내기로 결심한다. 질투심에 미쳐버리기 전에 그녀가 먼저 도망쳐 나와야 했으니까. 그에게서 벗어나서야 자기 자신을 좀더 소중하게 아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단영은 가정형편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자신의 꿈을 쫓아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간다.

 

​모친이 원하는 여자와 결혼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면 아끼던 부하직원이기도 했던 단영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책임질 수 없으니 그런 관계를 질질끌지 말았어야 하는데 강혁은 뻔히 보이는 단영의 마음을 모르는 척 외면하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이용한 이기적인 남자였다. 관계를 맺으면서도 늘 단영에게 차갑고 무심하게 대하며 맞선을 보러다니는 것을 숨기지 않는 것으로 두 사람은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가벼운 관계일 뿐이라는 사실에 단영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을 이 나쁜 남자는단영을 잃고 나서야 감정을 철저하게 잘 통제할 수 있다 여겼던 것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알게 된다.

" 널 잡을 거야.

​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어."

늘 승자의 위치에서 단영을 언제든 정리할 수 있는 여자라 치부했던 것이 무색하게 결혼 상대로 나무랄데 없는 맞선녀를 눈앞에 두고도 떠나버린 단영에 대한 기억으로 혼란스러워 하던 강혁는 점차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닫게 되지만 이미 강혁으로 인해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단영의 결심은 단단했다. 변해버린 강혁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또 다시 미래가 없는 관계에 집착하느라 스스로를 망가뜨리기 싫었던 단영은 그가 내민 손을 차갑게 거절한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는 진리처럼 이별전과는 달리 이제는 강자와 약자의 위치가 바뀌게 된 주인공들의 관계가 흥미롭다.


​" 아둔한 하단영은 죽었어요.​

나는 이제, 나로서 만족해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야 세트 - 전2권
진주 지음 / 신영미디어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출간이후 극찬이 쏟아졌던 책이긴 하지만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선호하는 분들, 평소 작가님 책과 맞지 않았거나 등장인물들 대사위주로 빠르게 읽어 내리는 분들은 취향탈수도 있으니 신중히 구매하시길~! 설야 주인공들을 '묵언수행 커플'이라는 애칭으로 부를만큼 대사보다는 눈빛이나 사소한 몸짓으로 감정을 보여주는 책이라서, 지문까지 꼼꼼하게 정독해야만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할수 있기때문이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눈빛이나 몸짓이 더 큰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

 

 

 

작가님 책은 수려한 문체에 해당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한 회화적 묘사가 특징인데, 설야는 유독 더 그랬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얀 눈밭을 걸어가는 붉은 옷의 여인. 들판은 눈으로 뒤덮여 새하얗고, 하늘은 시리게 푸르고, 햇빛은 쨍한. 친한 편집자님께 선물(?)받은 그 이미지가 바로 설야의 시작점이라고 한다. 여인은 왜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를 향해 가는 중인가. 이미지에 대한 수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던 과정이 '설야'라는 소설이 되었다고 쓰셨더라.

 

 

 

 

​일제 강점기가 배경이고 역사상 실존인물들이 일부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교과서나 기타 매체를 통하여 이미 수차례 배웠던 아픈 역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아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쓴 작가의 역사관은 명료하다. 주인공들에게 집중된 책의 흐름은 거스르지 않으면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배경묘사를 통하여 파국으로 치닫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작가님의 냉소적인 시각은 여실히 드러난다.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는 서글프고 잔인한 그 시절의 아픔을 구구절절 늘어놓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여내어 독자들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한 작가의 의도가 소름끼치도록 영악하다. 스토리텔링의 진수~!!

 

비토층이 많은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라 걱정했던것이 무색하게 초반부터 강렬하고 긴장감 넘치는 전개여서 절로 몰입하게 되더라. 암울해질수도 있는 시대적 배경과 설정임에도 작가님만의 색깔을 덧입혀 애잔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그려내셨다. 설야는 조국을 위한 우국충정에서 우러난 독립운동이 중심이라기 보다는 원수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에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여주 명은 줄리엣처럼 곱게 자란 순진한 귀족아가씨가 아니었고, 류타 또한 로미오처럼 세상물정에 어두운 로맨티시스트는 아니었다. 명은 복수를 위해 애국단이 내민 손을 잡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채, 원수의 아들을 유혹하려 노골적인 속물이자 어설픈 요부로 류타의 앞에 나서게 된다.

무참하게 살해당한 오빠. 오빠를 죽인 일제의 고관. 그 곁에 있던 그의 아들.

눈앞에서 세상 전부이던 오빠를 잃고, 복수를 위해 자신을 지운 소녀.

그리고 다시 만난 우에노 아키와 그의 아들.​ 

 

 

오라비의 처참함 죽음을 목도하고 삶의 이유를 잃은 명은 오직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원수의 아들에게 접근하지만 온기 없이 고독과 허무로 가득한 그의 눈빛에 흔들리게 된다. 평생 오라비에 대한 죄책감을 천형처럼 지고 가야 할 것을 알면서도 류타를 택할수 밖에 없었던 명. 그녀에게 류타는 다시 살아갈 생의 이유가 되어 주었다. 명은 사랑하는 남자의 혈통이야 어찌 되었든 그에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싶었던 평범한 여자였을뿐이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그대로이고. 그 한 줄의 시구 앞에서도 오빠는 가슴 아파했다. 아직 세상은 그대로인데, 그러나 나라는 망하여도 그대로인 산하에서 염치없게도 명은 그를 사랑했다. 그로 인하여 가슴 아팠고, 그와 더불어 행복하고 싶었다. 윤환의 누이 윤명이 그것을 꿈꾸었다. 그라는 의지처가 아늑하고, 혀끝에 닿는 과자가 달콤하며, 사랑하는 사내를 기다리는 시간은 설레었다. 

느리지만 분명히 봄은 오고 있다. 명은 살고 싶었다. 

- 『설야』2권 243페이지 본문중에서

 

죽은 어미의 흉내를 내는 어설픈 속물이라고 여기면서도 처음으로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준 명의 올무로 스스로 걸어들어간 류타. 초반 나쁜남자의 포스가 물씬했으나 아픈 사연이 드러나면서 모성애를 마구 자극하고, 명에게 보이는 맹목적인 집착과 과묵남 주제에 입만 열었다 하면 죄다 명언이라 류타앓이를 하게끔 만든다. 뿌리내릴 곳이 없었던 그에게 명은 전 생애를 걸어서 지켜내고 싶은 조국이 되어주었다. 자신을 기만하고 버린 여자라는 것도, 그의 아비가 명의 오빠를 죽인 원수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도 그녀를 잃느니 차라리 이기적이기를 선택한 류타. 그는 명의 오라비를 죽인 원수의 아들이 아닌, 그저 한 여자를 극진히 사랑하는 한 사내였을뿐이었다.   

그리웠다.

기필코 찾아내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나는 네가 그리웠다. 내 목숨을 앗으려 하였던 계집임을 알고도 나는 너를 놓지 못했다. 차라리 목숨을 내주고 너를 찾고 싶었다. 적어도 네 손에 죽어 가는 동안은 너를 볼 수 있을 테니. 이 끔찍한 마음이 그러했다. 너를 잃을 준비 같은 건 영원히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너를, 내가 너를....... 사랑하여서.  - 『설야』2권 95~96페이지 본문중에서 

 

살고 싶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환멸적이고 지루하였던 생을 이제는 가슴이 아프도록 간절히 열망한다.

명의 곁에서, 명의 사내로. 눈물겹도록, 류타는 살아가고 싶었다. - 『설야』2권 176페이지 본문중에서  

  

의지처 없이 공허한 삶을 살던 주인공들은 무의식중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던 건지도 모른다. 책속 누군가의 말처럼​그들은 생의 마지막 날까지 끝내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안고 살아가겠지만 어린 누이 명을 그토록이나 아꼈던 환이라면 분명 누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믿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환에 대한 죄책감은 이제 그만 내려두고, 그의 몫까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조선과 일본 절반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양국 모두에게서 멸시와 경멸의 시선을 받아야 했고 혈육에게 조차 외면당해온 외돌토리. 외로운 소년이 고독한 사내로 자라 스스로를 무엇도 되지 못한 눈물로, 증오로, 비탄으로 빚어진 괴물이라 자조하던 류타의 모습이 너무 애잔해 네 잘못이 아니라고 토닥거려주고 싶더라. 자신이 짊어진 죄의 무게는 기꺼이 감내하려 하면서, 사랑하는 이에게 씌워진 멍에를 벗겨주려 애를 쓰던 명이 덕분에 어둠의 심연에 잠겨 살아온 그가 밝은 빛의 세상으로 구원되어 다행이었다. 

 

세를 다한 어둠처럼, 그 악몽이 걷힌다.

원죄라는 속박 같은 거, 그는 이제 알고 싶지 않았다. 태어났고, 존재하고 있고, 그러므로 살아갈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이 밝은 빛처럼 명료하다. - 『설야』2권 206페이지 본문중에서 

 

윤명의 사내. 그 하나로 이미 존재의 이유는 충분하다.

그 이상의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 『설야』2권 311페이지 본문중에서

 

조선인을 금수로 길들이려는 일제에 펜으로 맞서다 아까운 목숨을 잃었던 윤환같은 깨어있는 지식인들. 김 선생, 최 부인, 규호처럼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 열사들 덕분에 어쩌면 이 나라를 이만큼 지켜낼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다수는 배움도 없고 가난해서 제 자식 굶기지 않고 그저 먹고 사는게 더 시급했던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들을 탓할수 있겠는가. 윤환이 어린 누이 만큼은 비의를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길 바랐던 것처럼. 최 부인이 조국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지만 명이에게는 같은 굴레를 덧씌우고 싶지않았던 것처럼. 그들이 원했던것은 그저 내 가족, 내 동포가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을 뿐일것이다. 설야속에는 그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세계의 황비 세트 - 전3권 블랙 라벨 클럽 19
임서림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9월
평점 :
품절


 

차원이동+ 황실암투의 판타지 로맨스로, 3권이지만 무겁지 않은 분위기에 어마어마한 벽돌두께를 자랑하는 다른 블랙라벨클럽 시리즈에 비해 그다지 부담스러운 분량은 아니라서 금방 읽을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1인칭 여주 시점이긴 하지만 중간 중간 남주시점이 외전으로 등장하기에 남주의 속마음을 몰라 답답하지 않았다. 책에서 황위를 둘러싼 여러 암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생각보다 계략들이 치밀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이 좀 아쉬웠다. 어쩌면 이 책에서 황실에서 일어난 암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주가 삶의 의미를 이해하고,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선택하게 된 과정인지도 몰랐다.

누구도 날 때부터 의미를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결국 그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자기 자신의 선택과 의지일 뿐.

삶을 향해 눈이 가려진 채 떨어지는 처지는,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이들이 같았다.

태어나는 데 특정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진 일 역시 그러하리라.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앞으로 직접 만들어 냈기에 가능한 것.

선택하고, 살아간 끝에, 그리하여 낯선 곳에 외따로 떨어졌어도 살아남아 행복을 잡는 것이,

곧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의미가 될 것이다.

나는 그리 확신하며 미소지었다. -『이세계의 황비』3권 386페이지 본문중에서

이유도 모른채 다른 세계로 넘어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방법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남주에게서 도망쳤다가 붙잡혀오길 반복하는 천편일률적인 차원이동 소재의 클리셰적인 전개에서 벗어난 점이 신선했고, 어느날 갑자기 지반이 침하되면서 사람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싱크홀'을 차원이동과 연관지은 것이 특이했던 책이다.

수능 치러가는 날, 갑자기 다른 세계로 차원이동된 여주 비나는 그녀를 발견한 이기적인 귀족에 의해 늙은 황제의 후궁으로 바쳐져 황궁에 들어가면서 황실암투에 휘말리게 된다. 황태자였던 남주 루크레티우스가 여색만 밝히는 무능하고 추악한 황제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 비나는 그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면서 동시에 살기위해서는 어쩔수없이 루크레티우스의 공범자가 되어 황실암투의 중심에 서게 된다. 거짓증언으로 루크레티우스는 황위를 차지하고, 비나는 적대관계인 태후의 타켓이 되어 목숨을 위협 받는다. 

" 태후를 몰아낼 때까지 방패 역할을 해 주면 돼.

네가 나서서 태후를 몰아내는 선봉장이 되어 준다면야 더 좋고."

그 세계의 최고 권력자가 된 황제 루크레티우스는 비나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는데 협조해 주는 대가로 황위를 노리는 태후를 몰아낼 때까지 그의 황비로서 조력자 역할에 충실하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녀를 태후를 견제할 도구로만 여기는 루크레티우스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고, 마음을 혼란스럽게하는 그의 미묘한 감정표현따위 전혀 달갑지 않은 장애물이었다. 비나는 황실의 암투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그녀가 태어나 살던 세계로, 가족들의 곁으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나는 이곳 사람이 아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였다.

살아서, 돌아간다.

그것뿐 이었다

루크레티우스에게 비나의 존재는 기적과도 같았다. 황실을 위협할만한 친정 세력이 없어야 하고 똑똑하고 능력있어야 하며 그를 사랑해서는 안된다는 평생의 조력자가 될 황후에게 그가 기대했던 모든 조건을 다 가졌기에. 영특하고 의심많은 아내를 만족스러워했던 것도 잠시, 비나에게 매료된 후부터는 그녀의 조심성 많은 경계심과 그를 향해 세운 벽이 거추장스러웠다. 그를 온전히 믿지 못하는 비나가 더 경계하지않도록 조금씩 능청맞게 다가가던 루크레티우스.

" 내 감정과 필요, 양쪽을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유일한 이가 그대야.

다시 한 번 말하지. 그대는 내게 내린 기적과도 같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빈껍데기 소녀 세트 - 전2권 블랙 라벨 클럽 16
이제언 지음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품절


 

 

연재평도 좋았고, 출간 소개에 '잔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 휴식을 제공할 수 있는 쉼터, 마음이 편해지는 동화라 여기게 되는 여운'을 원했다는 작가님의 멘트를 보고 어떤 내용의 책인지 궁금했었다. 권당 600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두 권짜리 책인데다 장르를 의심할만큼 로맨스가 거의 없다는 지인들의 조언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책장이 너무 잘 넘어가서 신기했다. 심장과도 같은 요하가 없이 태어난 빈껍데기 소녀 샨아와 그 주변인물들이 서로에게서 위로받고 함께 성장하며 안식을 찾아가는 전개라 일반적인 로설의 남주, 여주 개념이 무의미한 책이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하며 서로를 보듬고 함께 걷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 책.

치유와 성장의 동화같은 분위기라고 해서 잔잔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어린 소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졸지에 길 안내겸 보모 역할을 떠맡게 된 거친 사내들과 무표정한 얼굴에 겁없이 당돌한 꼬마 아가씨가 긴 여정을 함께하며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재미있었다. 사내들끼리 주고 받는 저렴한(?) 표현을 스펀지처럼 흡수하여 나쁜말 인줄도 모르고 실생활에 바로 써먹던 샨아, 몸만 자랐지 어린 소녀와 정신연령이 비슷해서 늘 티격태격하던 개그스런 캐릭터들때문에 수시로 폭소가 터진다. ​웃기기도 하면서 아이앞에서는 바른말 고운말을 써야한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닫기도 했었다.

 

 

엄마, 저는 집에 가고 있어요.

안 아파요. 요하가 있어요. 건강해요. 반야야요. 밥도 잘 먹어요.

자울 새끼랑 호구 놈이랑 집에 가요.

비낙이 큰 오라버니 친구래요. 미친놈도 가요.

멀미해요. 걸어가요.

엄마도 사랑해요. 샨아.

-『빈껍데기 소녀』1권 274페이지 본문중에서

이 책의 주요 키워드는 < 요하와 요나, 숭고한 이래, 희생과 배려, 책임의 무게, 진심과 위선, 치유와 안식 >이다.

사실 도입부분에선 작가님께서 구축한 판타지적 세계관이 너무 독특해서 요나와 요하, 이래의 개념이 쉽게 와닿지가 않아 난감하기도 했었다. 만약, 이 책을 읽을 예정이라면 초반 이해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등장인물들 조차 몰랐던 사실들이 대부분이니 책을 읽어가면서 그들과 함께 알아가면 될 것이고, 그 세계관을 전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주요 등장인물의 아픈 경험에서 얻은 교훈과 조언을 통하여 작가님께서 전달하고자 한 메세지만 이해하면 되니까.  

 

나의 작은 아이야. 너는 사랑을 배워라, 용서를 배워라, 관용을 배워라.

미움과 증오와 분노는 내려 두고, 예쁜 마음을 키워라.

나의 작은 아이야, 나의 요나야, 나의 샨아야.

 

주인공인 샨아 뿐만 아니라 주요 등장인물들 모두 각자의 사정과 상처가 있으며, 각자 결여 된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이다. 세상과 단절되어 갇힌 공간에서 홀로 자란탓에 나이보다 어린 외모만큼이나 또래에 비해 아는 것이 많이 부족했던 샨아는 무지하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끊임없이 왜? 라는 질문던진다. 어른들은 난감해 하면서도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설명해주려 노력하고, 그 과정을 통해 사람간의 관계에 서툴렀던 아이가 성장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어른들 또한 당연시 여겨왔던 소중한 것들을 되돌아보고 아이와 함께 조금 더 성장하게 된다. 조바심내는 아이를 위로하던 샨아의 요하, 반야의 현명한 조언이 인상깊었다.

 

" 언제 잘하게 돼?"

[ 여러 번 실수를 하고 나면. ]

반야가 샨아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 잘하려고 노력하면 된다는 뜻이다. ]

 " 실수라며? "

[ 네가 생각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지. ]

[ 사람과의 관계 또한 그런 것이지. 실패가 아닌 실수일 뿐이다. ]

샨아, 너는 표현이 서툴 뿐 전부 알고 있다.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을 가졌어. 그러니 어려워 말아라. ]

-『빈껍데기 소녀』1권 463~464페이지 본문중에서 

 

초반까지만 해도 요하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검은 늑대 모습의 반야가 사람으로 변해서 샨아와 로맨스를 시작하는 남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평생의 반려라는 요하는 연인이나 배우자의 개념이 아닌 또 다른 나, 평생을 함께 하는 영혼의 동반자이자 생명과도 직결되는 심장과도 같은 존재더라. 그리고, 주인공인 샨아는 본편 거의 끝무렵까지도 그저 11세의 어린 소녀일뿐이니 로맨스가 개입될 여지가 애초에 없다. 단지, 로맨스를 아쉬워하는 독자들을 위한 선물인건지 본편이 끝나고 < 만약, ~했었다면 >이라는 가정하에 조금 더 성숙된 샨아의 가상(?) 로맨스 외전 두 편이 수록되어있을뿐이다. 짧지만 여운이 강했던 외전.

 

로맨스도 거의 없고 주요 등장인물들도 많아 취향탈만하지만, 재미와 감동으로 충만한 책이니 한 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알콩달콩한 로맨스는 없지만 항상 진심을 다해 온 몸으로 부딪혀오는 꼬마 숙녀 샨아의 사랑스러움에 금방 매료될 것이다. 험상궂은 외모와는 달리 마음 여리고 다정 다감하던 자울과 들개처럼 온 대륙을 떠돌다 샨아에게 길들여진 혹우, 몸만 자랐을뿐 정신연령은 샨아와 놀라울만큼 비슷해 말이 잘 통하던 비낙, 절망속에 갇혀 홀로 고통에 신음하며 가시를 세우던 사유가 그랬던 것처럼. 빈껍데기로 태어났지만 사랑으로 충만해진 샨아가 진심을 다해 부른 자장가였기에 등장인물은 안식을 얻고 잠들 수 있었으리라.

 

샨아가 흥얼흥얼하며 율연이 들려주었던 자장가를 속삭이듯 불렀다.

" 수억 개의 꿈이 여기 있단다. 한들한들 날아올라 반짝인단다. 아이야, 너는 잠들렴. 꿈을 품고 기도하렴.

수억 개의 꿈이 꽃을 피운다. 찬란하게 피어나 하늘에 닿는다. 아이야, 너는 잠들렴. 꿈을 품고 기도하렴.

수억 개의 꿈이 네게 있단다. 굼실굼실 흘러와 네게 있단다. 너를 위해 반짝이고, 너를 위해 찬란하다. "

반야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실현하는 자신의 작은 요나를 응시하다 눈으로 가늘게 뜨고 웃었다.

모든 것이 잠드는 평화로운 시간. 안식을 나누어라, 나의 요나야.  -『빈껍데기 소녀』1권 466페이지 본문중에서

 

 

평생 사는 것만이 전부였던 아이였기에 주는 것도 받는 것도 익숙치 않고, 마음을 내보이는 방법도 몰라 늘 목각인형 같은 무표정한 얼굴일수 밖에 없었던 소녀. 아이다운 떼조차 쓸 줄 몰라 전부 속으로 삭이기만 하던 어린 샨아가 소중한 이들을 만나서 차츰 평범한 소녀처럼 생기있게 웃고 소리내어 울음을 터트렸을 때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워 뭉클했었다. 그렇게 삶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아이는 본능적으로 소중한 이들의 고통과 상처에 민감해져서 그들에게 안식을 주려 애쓴다. 그 작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하겠다며 고집부리고 실천하던 아이. 어리지만 누구보다 강했던 샨아가 너무 사랑스러웠던 책이다.  

   

" 나의 밤하늘아. 너에게 전부 배웠다. 슬플 때 우는 법,

기쁠 때 웃는 법, 애틋하게 사랑하는 법. 그 모든 소중한 것들을

너로 인해 알았다. 온기를 나눠 주어 참으로 고맙다.

나에게 와 주어 참으로 감사한다. "

세계의 중앙에 위치한 태초의 가르신 대륙은 사람을 잡아먹는 붉은 독초외에는 누구도 살아 남지 못하는 불모지의 땅이었다. 그 황폐한 땅을 정화하여 백성들이 살 터전을 넓히기 위해 찾아온 동서남북 12명의 용사는 '대지의 기운을 가진 황금용을 몸에 두른 이래'와 '물의 기운을 가진 물고기를 자신의 심장이라 부르는 이래 아들'의 도움으로 독초를 녹여 정화하고 비옥한 대지로 일구었다. 이래 아들은 가르신 대륙에 이래 왕조를 세우고 왕이 되었고, 건국에 일조한 12명의 용사는 성과 문장을 하사받아 유훈가문이 되었다. 그후, 가르신 대륙에서 새로 태어나는 모든 아이는 이래 아들이 그랬듯 '또 다른 자기 자신'인 요하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다. 

가르신 대륙의 모든 사람에게는 '요하'라는 존재가 함께했다.

요하란 영혼의 반쪽이며, 평생의 반려다.

대륙민은 심장 위, 왼쪽 가슴에 인印을 지니고 태어나며, 그것이 요하의 증거였다.

요하는 평소에는 그곳에 깃들어 있다가 필요할 때면 금수禽獸의 형태로 존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가슴에 자리한 요하에겐 힘이 있다.

영혼의 공명이며, 파장이다.

형태를 특정 지을 수 없는 것으로, 특별할 것 없는 특별함이다. -『빈껍데기 소녀』1권 25페이지 본문중에서

 

​'요나'란 요하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요하가 없다는 것은 상대 요하의 힘을 속절없이 느낀다는 것이고, 그것은 상대의 힘에 눌려 죽는다는 뜻이다. 대륙민이라면 누구나 심장과도 같은 요하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동녘의 유훈가문 해나에는 요하없이 태어난 한 소녀가 세상에서 격리되어 '결의 방'에서 십년 째 살고 있었다. 심장이 텅빈채 태어난 '빈껍데기 소녀'는 요하를 얻게 된다면 어미의 품에 마음껏 안길 수도, 계속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안고 자신의 요하를 찾기위해 혼자 '요하의 숲'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샨아는 검은 늑대의 모습을 한 밤하늘 '반야'를 만나게 된다. 불완전했던 둘은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가 되고, 운명이 뒤섞여 묶였다.

" 우리는 외따로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이다. 나는 너의 요나고,

너는 나의 요하이니

그 언제라도 함께해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다. "   

 

나라의 근간이 되는 요하를 지닌 이래 왕조의 숨겨진 비밀. 무자비한 통치자이면서 누구보다 책임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던 왕세자 온현. '숭고한 이래'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순간 그의 선택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런 숙명을 타고난 온현이 너무 안스러웠다. 어쩌면 책 마지막 부분의 외전은 끝까지 '이래'여야 했기에 개인이 될 수 없었던 온현을 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이래'가 아닌 누군가에게 있어 '온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한 남자이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던건 온현 본인이었을테니까.

그는 태생이 왕이었고, '이래'였다.

이성이 확립되기도 전인 유년기에 자신의 존재 의미를 깨달은 어린 소년은 한 사람으로 사는 것을 포기했다.

누구도 곁에 두지 않았으며, 누구도 마음에 들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끝을 생각하며 침잠하는 '이래'였다.

숭고한 이래. 그것은 소년의 존재의 의미이며, 소년의 숨통을 졸라 죽이는 족쇄였다.

-『빈껍데기 소녀』2권 603~605페이지 본문중에서 

 

 

 

< 본 리뷰는 서평이벤트에 참여하여 출판사에서 제공되는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