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야 세트 - 전2권
진주 지음 / 신영미디어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출간이후 극찬이 쏟아졌던 책이긴 하지만 밝고 가벼운 분위기를 선호하는 분들, 평소 작가님 책과 맞지 않았거나 등장인물들 대사위주로 빠르게 읽어 내리는 분들은 취향탈수도 있으니 신중히 구매하시길~! 설야 주인공들을 '묵언수행 커플'이라는 애칭으로 부를만큼 대사보다는 눈빛이나 사소한 몸짓으로 감정을 보여주는 책이라서, 지문까지 꼼꼼하게 정독해야만 캐릭터를 제대로 이해할수 있기때문이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눈빛이나 몸짓이 더 큰 의미를 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

 

 

 

작가님 책은 수려한 문체에 해당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지는 듯한 회화적 묘사가 특징인데, 설야는 유독 더 그랬었다.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얀 눈밭을 걸어가는 붉은 옷의 여인. 들판은 눈으로 뒤덮여 새하얗고, 하늘은 시리게 푸르고, 햇빛은 쨍한. 친한 편집자님께 선물(?)받은 그 이미지가 바로 설야의 시작점이라고 한다. 여인은 왜 붉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어디에서 왔고 어디를 향해 가는 중인가. 이미지에 대한 수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던 과정이 '설야'라는 소설이 되었다고 쓰셨더라.

 

 

 

 

​일제 강점기가 배경이고 역사상 실존인물들이 일부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교과서나 기타 매체를 통하여 이미 수차례 배웠던 아픈 역사를 구구절절 늘어놓아 독자를 지루하게 만들지 않았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면서도 글을 쓴 작가의 역사관은 명료하다. 주인공들에게 집중된 책의 흐름은 거스르지 않으면서 주요 등장인물들의 대사와 배경묘사를 통하여 파국으로 치닫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작가님의 냉소적인 시각은 여실히 드러난다. 일제 치하에서 신음하는 서글프고 잔인한 그 시절의 아픔을 구구절절 늘어놓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스토리에 녹여내어 독자들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한 작가의 의도가 소름끼치도록 영악하다. 스토리텔링의 진수~!!

 

비토층이 많은 일제강점기가 배경이라 걱정했던것이 무색하게 초반부터 강렬하고 긴장감 넘치는 전개여서 절로 몰입하게 되더라. 암울해질수도 있는 시대적 배경과 설정임에도 작가님만의 색깔을 덧입혀 애잔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그려내셨다. 설야는 조국을 위한 우국충정에서 우러난 독립운동이 중심이라기 보다는 원수 집안의 아들과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에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여주 명은 줄리엣처럼 곱게 자란 순진한 귀족아가씨가 아니었고, 류타 또한 로미오처럼 세상물정에 어두운 로맨티시스트는 아니었다. 명은 복수를 위해 애국단이 내민 손을 잡고 자신의 정체를 숨긴채, 원수의 아들을 유혹하려 노골적인 속물이자 어설픈 요부로 류타의 앞에 나서게 된다.

무참하게 살해당한 오빠. 오빠를 죽인 일제의 고관. 그 곁에 있던 그의 아들.

눈앞에서 세상 전부이던 오빠를 잃고, 복수를 위해 자신을 지운 소녀.

그리고 다시 만난 우에노 아키와 그의 아들.​ 

 

 

오라비의 처참함 죽음을 목도하고 삶의 이유를 잃은 명은 오직 복수하려는 일념으로 원수의 아들에게 접근하지만 온기 없이 고독과 허무로 가득한 그의 눈빛에 흔들리게 된다. 평생 오라비에 대한 죄책감을 천형처럼 지고 가야 할 것을 알면서도 류타를 택할수 밖에 없었던 명. 그녀에게 류타는 다시 살아갈 생의 이유가 되어 주었다. 명은 사랑하는 남자의 혈통이야 어찌 되었든 그에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아름답고 싶었던 평범한 여자였을뿐이다.

나라는 망하여도 산하는 그대로이고. 그 한 줄의 시구 앞에서도 오빠는 가슴 아파했다. 아직 세상은 그대로인데, 그러나 나라는 망하여도 그대로인 산하에서 염치없게도 명은 그를 사랑했다. 그로 인하여 가슴 아팠고, 그와 더불어 행복하고 싶었다. 윤환의 누이 윤명이 그것을 꿈꾸었다. 그라는 의지처가 아늑하고, 혀끝에 닿는 과자가 달콤하며, 사랑하는 사내를 기다리는 시간은 설레었다. 

느리지만 분명히 봄은 오고 있다. 명은 살고 싶었다. 

- 『설야』2권 243페이지 본문중에서

 

죽은 어미의 흉내를 내는 어설픈 속물이라고 여기면서도 처음으로 사람의 온기를 느끼게 해준 명의 올무로 스스로 걸어들어간 류타. 초반 나쁜남자의 포스가 물씬했으나 아픈 사연이 드러나면서 모성애를 마구 자극하고, 명에게 보이는 맹목적인 집착과 과묵남 주제에 입만 열었다 하면 죄다 명언이라 류타앓이를 하게끔 만든다. 뿌리내릴 곳이 없었던 그에게 명은 전 생애를 걸어서 지켜내고 싶은 조국이 되어주었다. 자신을 기만하고 버린 여자라는 것도, 그의 아비가 명의 오빠를 죽인 원수라는 사실을 알고나서도 그녀를 잃느니 차라리 이기적이기를 선택한 류타. 그는 명의 오라비를 죽인 원수의 아들이 아닌, 그저 한 여자를 극진히 사랑하는 한 사내였을뿐이었다.   

그리웠다.

기필코 찾아내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을 만큼, 나는 네가 그리웠다. 내 목숨을 앗으려 하였던 계집임을 알고도 나는 너를 놓지 못했다. 차라리 목숨을 내주고 너를 찾고 싶었다. 적어도 네 손에 죽어 가는 동안은 너를 볼 수 있을 테니. 이 끔찍한 마음이 그러했다. 너를 잃을 준비 같은 건 영원히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너를, 내가 너를....... 사랑하여서.  - 『설야』2권 95~96페이지 본문중에서 

 

살고 싶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환멸적이고 지루하였던 생을 이제는 가슴이 아프도록 간절히 열망한다.

명의 곁에서, 명의 사내로. 눈물겹도록, 류타는 살아가고 싶었다. - 『설야』2권 176페이지 본문중에서  

  

의지처 없이 공허한 삶을 살던 주인공들은 무의식중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는 서로에게 본능적으로 끌렸던 건지도 모른다. 책속 누군가의 말처럼​그들은 생의 마지막 날까지 끝내 지울 수 없는 상흔을 안고 살아가겠지만 어린 누이 명을 그토록이나 아꼈던 환이라면 분명 누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믿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환에 대한 죄책감은 이제 그만 내려두고, 그의 몫까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조선과 일본 절반의 피를 받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양국 모두에게서 멸시와 경멸의 시선을 받아야 했고 혈육에게 조차 외면당해온 외돌토리. 외로운 소년이 고독한 사내로 자라 스스로를 무엇도 되지 못한 눈물로, 증오로, 비탄으로 빚어진 괴물이라 자조하던 류타의 모습이 너무 애잔해 네 잘못이 아니라고 토닥거려주고 싶더라. 자신이 짊어진 죄의 무게는 기꺼이 감내하려 하면서, 사랑하는 이에게 씌워진 멍에를 벗겨주려 애를 쓰던 명이 덕분에 어둠의 심연에 잠겨 살아온 그가 밝은 빛의 세상으로 구원되어 다행이었다. 

 

세를 다한 어둠처럼, 그 악몽이 걷힌다.

원죄라는 속박 같은 거, 그는 이제 알고 싶지 않았다. 태어났고, 존재하고 있고, 그러므로 살아갈 것이다.

그 사실 하나만이 밝은 빛처럼 명료하다. - 『설야』2권 206페이지 본문중에서 

 

윤명의 사내. 그 하나로 이미 존재의 이유는 충분하다.

그 이상의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 『설야』2권 311페이지 본문중에서

 

조선인을 금수로 길들이려는 일제에 펜으로 맞서다 아까운 목숨을 잃었던 윤환같은 깨어있는 지식인들. 김 선생, 최 부인, 규호처럼 조국을 위해 헌신한 애국 열사들 덕분에 어쩌면 이 나라를 이만큼 지켜낼수 있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대다수는 배움도 없고 가난해서 제 자식 굶기지 않고 그저 먹고 사는게 더 시급했던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누가 그들을 탓할수 있겠는가. 윤환이 어린 누이 만큼은 비의를 모르는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길 바랐던 것처럼. 최 부인이 조국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지만 명이에게는 같은 굴레를 덧씌우고 싶지않았던 것처럼. 그들이 원했던것은 그저 내 가족, 내 동포가 조금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을 뿐일것이다. 설야속에는 그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애환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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