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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를 사랑하였다
박경숙 지음 / 문이당 / 2023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항에서 빌린 렌터카는 성능이 좋은 편이었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이다.
많은 작가들이 첫 문장에 목숨을 건다고 하기에 주의깊게 읽어보았다.
넓은 공간감과 속도감이 느껴져 소설속으로 쾌적하게 진입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 같다.
주인공 길수는 LA에서 산야쪽으로 운전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들은 그의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
그리고 영화 장면이 현재에서 과거로 바뀌 듯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 고향으로 옮겨간다.
작가는 고향에서 길수와 함께 이야기를 구성할 주요 인물인 희림을 등장시키고 그 둘과의 특별한 인연을 인상깊게 그려준 뒤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온다.
현재로 돌아온 길수와 희림의 만남 현장은 짧게 묘사되고 곧이어 희림의 기나긴 과거회상이 다시 시작된다.
그녀가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자살하기까지 마음의 폭풍이 쉬지 않았던 그녀의 사연이 이곳에 적나란하게 펼쳐진다.
이야기의 중간지점에서 여주인공의 죽음은 약간 맥이 빠지게 한다.
하지만 책의 나머지 반은 어떤 식으로 메꾸어갈까 하는 궁금증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게 한다.
전반부가 희림의 사랑과 죽음을 그렸다면 후반부는 신앙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던 사제 탁신부의 애도의 과정이 들어있다.
보통 사랑 이야기는 삼각관계를 기본구조로 삼는다. 이 소설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지만 한변이 다른 한변과 중첩하는 구조로 변형된 형태를 띤다.
초반에 이야기를 이끌었던 길수는 희림과 관계를 계속 만들어 나갈 것이라는 독자의 예상을 깨고 중반이후로는 한 두번 머리를 내밀 뿐 사라졌다가 마지막 소설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한다.
길수는 형식상의 주인공 같고 내용상의 주인공은 사제인 탁신부 인 듯 보이지만 막상 또 끝부분에 가서는 반전을 보인다.
여주인공 희림은 일찍 이야기 무대에서 사라지지만 사실상 마지막장까지 다 그녀의 이야기다.
그녀는 죽었으나 길수와 탁신부의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존재였고 그녀를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하는 두 남자의 심리적 소용돌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의 삶을 지배한다.
그들은 희림에게 각각 반쪽 짜리 사랑만 줄 수 있었다. 희림은 길수에게 얻지 못한 육체적 사랑을 구하기 위해 탁신부를 만난다. 하지만 탁신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육체적 사랑 뿐이었다. 탁신부는 희림에게 묻는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욕망이지?" 희림이 답한다. " 사랑과 욕망은 하나예요"
이 소설은 종교적인 어휘들과 신앙생활 배경이 많이 등장하지만 엄밀히 보면 신앙소설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라 인간적인 사랑이다.
그리고 그 인간적인 사랑이 오히려 신앙적인 사랑보다 위에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탁신부의 입을 통해 " 이브가 하나님을 통해 사랑을 이루고 싶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겠나" 라고 읖는다. 그리또 다른 인물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는 길은 자연적인 사랑을 인정하는데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른다는 도발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사제인 탁신부가 육체적인 사랑을 담당하고 세상 사람인 길수가 정신적인 사랑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가 전통적인 종교적 사랑을 전복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베일에 가려진 부분들을 조금씩 들추어내며 독자의 의문을 풀어주고 완성된 그림을 향해 나아간다.
이야기는 차분하게 진행된다. 자극적이고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싶은 독자에게는 조금 밋밋할 수 있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과 잔잔한 감동을 사모하는 사람들에게는 한 여름밤의 꿈 같은 달콤한 시간이 되리라 믿는다.
이 서평은 출판사 서평 행사에 참여하여 책을 제공 받아 자율적으로 작성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