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목사님 열린어린이 창작동화 10
로알드 달 지음, 쿠엔틴 블레이크 그림, 장미란 옮김 / 열린어린이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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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이 작가만큼 어른과 아이의 선호도가 확연히 갈리는 작가도 없지 싶다. 그의 책은 부조리하고 억지스럽고 어른이 봐도 별루인 어른들이 한마디로 똑 부러지는 아이들에게 당하는 이야기들이나 너무도 잘 큰 아이들의 활약상이 주를 이루는 책들이다. 아이들에겐 그의 이야기에 카타르시스를 느끼지만 어른들은 불편하다. 우리 집 아이들도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꼽으라고 하면 첫 손에 로알드 달을 꼽는다. 무조건적으로 달려들어 읽어내곤 했었다. 그런 아이들을 따라 읽노라면 벌써 녹익은 어른의 시선인 나는 불편하다. 하지만 그의 책 속에 담겨 있는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알기에 아이들의 책상에 슬그머니 놓아주곤 했다. 책상에 놓여진 책을 슬쩍 보더니 로알드 달이라는 이름에 반가워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신간이라며. 거기에 짝궁 퀜틴 블레이크의 유쾌한 그림과 함께니 그 즐거움은 배가된다.

‘거꾸로 목사님’은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거꾸로 난독증을 가진 목사님의 얘기다. 요즘 개그 프로그램에서 같은 발음을 연속적으로 이어나가는 코너를 본 기억과 연결된다. 난독증이라는 낯선 병명은 언젠가 영화에서 난독증으로 글을 읽을 수 없는 주인공이 녹음을 해 우수한 성적으로 당당히 사회에 나서는 것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어릴 적 난독증을 앓았지만 증세가 좋아져 목사님이 된 목사님은 첫 부임지에 도착해 혼자서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에 불현듯 난독증이 재발한다. 그나마 중요 단어만 거꾸로 읽는 정도지만. 누구나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은 불안하기 마련이다. 목사님의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목사님의 이런 어법에 마을 사람들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황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목사님 내면의 착하고 다정한 모습을 알기에 누구도 깊이 미워하지 못했다. 목사님이라는 자리가 사람의 일과 하늘의 일을 잇는 자리이기에 얕은 행동과 가벼운 말실수도 흉꺼리가 될 수 있는 조금은 묵직한 자리다. 그렇다보니 목사님의 설교 역시 무겁기 마련이다. 좋은 말씀인 줄 알면서도 졸기도 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졸 사이가 없다. 늘 지겹도록 듣던 말이 아니라 새롭고 익살스러운 말들로 듣는 설교는 신선하고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또 모른다. 누군가는 목사님이 어떤 말을 거꾸로 하는지 귀를 쫑긋하고 들었을지도.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는 이쑤시개처럼 가벼이 여기고 남의 실수는 여의봉처럼 부풀려 생각하기 쉽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신선한 것은 마을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목사님의 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설교 내내 뒷걸음치는 목사님을 아무렇지도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말이다. 어찌보면 참 쉬운 일이지만 내 앞의 현실이라고 생각하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거꾸로 난독증의 목사님을 마을의 든든한 목자로 사랑하며 함께 한 마을 사람들을 우리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나와 다름이 별 일이 아니라 다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 사회에서 다름으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과 손을 맞잡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렇게 해 주길 기대하기 보다 오늘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보면 어떨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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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이를 위해 건배 열린어린이 창작동화 9
에밀리 체니 네빌 지음, 최순희 옮김, 이형진 그림 / 열린어린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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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아이들의 소원은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는 것이다.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기에 낯선 환경에 대한 동경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애완동물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공동 주거 공간이라는 이유를 대고 법까지 들먹이면서 반대하는 어른들이 버티고 있기에 가능한 공간으로의 이주를 꿈꾼다. 사실 아이들이 강아지를 좋아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워하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의 심사엔 반대하니까 더욱 애가 닳는 것은 아닐런지.

개가 교육적인 동물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대뜸 고양이로 응수하는 데이브. 열네 살의 사춘기 소년이다.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 때마다 위로를 받는 이웃의 왕따 케이트 아줌마를 통해 냥이를 집에 들여온 데이브는 냥이를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나간다. 무엇보다 가장 먼저 이웃들에게 이상한 아줌마(‘나홀로집에’에 나오는 비둘기 아줌마와 같은 인상이 아닐까한다.)로 통하는 케이트 아줌마를 만나고 소심한 엄마에게 아줌마를 소개해 준다. 그저 이상한 아줌마로만 알았던 케이트 아줌마에게도 아픔이 있다. 데이브는 한 사람은 돈만 사랑하고 다른 한 사람은 고양이만 사랑하며 살도록 만든 부모들이 궁금해 진다. 아줌마의 부모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부모님을 비추어 본다. 잔소리꾼이지만 그것이 애정이 묻은 잔소리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냥이를 통해 만나 또 한 사람, 톰. 밖으로 돌아다니다 지하실에 갇힌 냥이를 구해주다 만난 톰도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크다. 자신을 버리고 연락을 끊어버려 결국 대학을 자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다니던 톰을 만난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보다 자신이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막막함은 나이를 떠나서 큰 충격이 된다. 변호사로서 톰의 문제를 함께 의논해 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데이브에게 또다른 아버지의 한면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눈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눈이 모두 같은 모습을 보지는 않는 것 같다. 각자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 차이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애증을 드러낸다. 나와 같지 않음이 서로에게 자신을 겨눈 칼처럼 다가오는 모양이다. 그래서 애정 담긴 아버지의 잔소리와 참견이 데이브에겐 자신을 믿지 못하고 투덜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보여진 건 아닐까한다.

늘 자신이 주도권을 쥔 대장이어야 하는 친구 닉과 함께 한 나들이에서 만나게 된 메리다. 비트족(귀에 귀걸이를 몇 개씩하고 가죽 바지에 둘쑥날쑥안 앞머리를 한 모습이 연상된다.) 엄마와 철학자 아빠를 둔 메리의 모습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겨우 공통 부분을 잇닿은 동그라니 세 개라고나 할까? 역시 데이브는 메리 부모를 통해 자신이 진짜 부모를 가졌음을 깨닫는다.

냥이를 위해 데이브는 냥이를 거세한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 이론이 머리를 스친다. 남자 아이들이 한번씩은 아버지가 자신을 거세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정립한다는 조금은 거부감 느껴지던 이론. 데이브가 스스로 냥이의 안전을 위해서라곤 하지만 냥이를 거세시키며 스스로 자신이 아버지에 대해 갖고 있던 거세의 불안감을 냥이를 통해 해소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토록 거부감으로 제한을 두던 고양이인데 아버지 스스로 새끼 고양이를 다시 집에 들이며 둘의 관계를 그렇게 묶여 나갔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이름으로. 톰은 말한다. 데이브와 아버지가 줄곧 티격태격하는 이유의 절반이 두 사람이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렇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자신의 못난 모습을 너무도 빼닮아버린 내 자식을 보며 나와 같은 삶을 살까 걱정하며 분노하는 것이 부모라는 것을 경험으로 깨닫고 있다.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주며 나를 들여다 볼 수 있게 해 준 냥이를 위해 건배를 든다. 나도 내 아이들을 위해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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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된 친구들 (그림책 + 한글자모스티커 + 놀이용공책) - 한글자모 예술놀이책 -1 재미마주 A'Q시리즈
이호백 글.그림 / 재미마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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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와 독특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바로 알파벳그림책이었다. 이젠 만국공용어가 되어버린 영어의 알파벳이 다양한 형태의 그림책으로 출간되고 있었다. 단순히 첫글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그림으로 그려놓은 개념책 정도가 아니라 동사나 형용사를 알아볼 수 있도록 구성한 책들도 있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글 속에는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그 무엇도 주지 않고 글로 추론해 그림과 연결짓는 고단수의 책들도 많이 있었다. 그야말로 단순히 알파벳을 알려주는 학습보다는 다양한 구성으로 아이들과 즐기며 놀 수 있다는 생각에 무엇보다 그 책들이 부러웠다.

언젠가 아프리카의 한 부족에게 우리의 한글을 가르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문자와 말이 없던 그들에게 여러 가지 언어를 가르쳐 보았지만 한글만큼 쉽고 이해하기 쉬운 문자는 없다는 말과 함께. 짧은 기간 동안 그들은 한글을 배우고 말로 글로 표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세상의 어떤 언어든 한글로 표현되지 않는 문자는 없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런 한글을 배우며 진저리를 칠까? 그 이유는 아마도 한글이 놀이가 아닌 공부로, 전쟁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엄마와 함께 그림책을 읽으며 동네 재래 시장으로 가는 길목의 간판 속에서 제 이름 글자를 찾으며 한글을 배운 울 아이들에게 글은 놀이였다. 자모음으로 된 자석을 냉장고에 붙이며 무슨 글자인지도 모를 글자를 붙여 놓고 자신의 활동이 글자를 만들어 낸다는 기쁨으로 한글을 만났다. 그래서인지 책읽기를 좋아하고 국어 공부는 거저하는 아이들을 보며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 준 유일한 선물인거 같아 뿌듯하다.

‘한글이 된 친구들’세상에 친구만큼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 아이들에게 부모만큼, 아니 어느 땐 그 이상의 위로와 즐거움을 주는 이가 바로 친구이다. 일단 제목에서 한글과 친구가 만났다는 것이 좋았다. 색깔도 선명한 빨간색에 노랑, 파랑, 흰색의 자음과 모음이 만들어 내는 알콩달콩한 그림들이 시선을 끈다. 자모음으로 이렇게 다양하고 앙증맞은 그림들이 나오리라고 상상도 못했다. 나도 어느새 그저 한글을 글로서만 본 모양이다. 기구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자모음들은 무언가 되고 싶어했다. 뒤편에 담겨 있는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스티커를 이용해 아이들도 뭔가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젠 부쩍 커버려 한글로 논다는 것이 유치할 수 있는 아이들도 슬쩍슬쩍 넘겨보며 관심을 보인다. 작가의 기발함에 탄성을 올리며 말도 안되는 동물을 만들어 놓고는 우긴다. 어느새 책이 우리 가족들의 새로운 놀이기구로 중심이 놓여 있었다.

정말 자음과 모음이 아이들을 공부로 몰아가는 첫 단추가 아닌 즐거움의 시작이고 그 부산물로 한글을 알게 되어 우리 글과 만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책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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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번의 약속 - 김수연 산문집
김수연 지음 / 문이당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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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한다. 부모는 땅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지 않는가. 목사님이라는 겉옷만을 보고 조금은 어렵고 윗분인 것만 같아서 마음으로 다가서기 힘든 분이라고 생각했다. 깊은 신앙심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종교인으로서의 삶은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늘의 사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다. 신은 당신의 사랑을 더 많은 시련과 아픔을 통해 보여주신다고 하지만 인간의 굴레를 벗지 못한 나약한 존재로서 그것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방송국 기자라는 잘나가는 타이틀을 벗어던지고 아무 것도 손에 쥐지 않고 도리어 내 것을 내어주면서 세상을 책을 통해 열어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 더욱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참 부끄럽게도 모태 신앙이라는 축복을 받았지만 인간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신앙을 지켜내지 못한 사람이라 김수연 목사님의 삶에 더욱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변명이라면 변명이지만 사실 한국 교회에 대한 실망감이 신앙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게 한 이유라고 뻔뻔스런 변명을 해 본다. 개척교회나 큰 교회나 ‘내 교회, 내 식구’를 챙기고 더욱 큰 성전, 더 화려한 성전을 세우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을 많이 했다. 어린 시절부터 주일 학교를 다니고 성당을 다니며 교리 공부를 하면서 가슴에 새겨 두었던 말은 ‘교회란 땅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 속에 자리한 것이라 한 사람이 모이든 두 사람이 모이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모인 곳이면 어디든 교회’라는 말씀이었다. 신앙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던 철부지가 어떻게 그 말을 깊이 새겨두었던지 몇 십 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진리하고 여겼다. 그래서인지 화려한 성전을 짓기보다 책으로 세상의 벽을 허문 목사님의 신앙 생활에 먼저 공감하게 되었다.

세계 제일의 IT공화국으로 모든 것이 영상으로 이어지는 세대에 활자를 매체로 하는 책은 퇴물이 될 것임을 예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은 아직도 굳건하게 자신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영상과는 또다른 매력이 책에 있음이다. 책의 역사가 하루 아침이 이루어지지 않았듯 그리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 귀하고 부모님이 책을 읽어주며 키워주시던 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영상으로 책을 본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사각거리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좋고 손 끝에 닿는 책의 느낌이 좋은 구 시대인이다. 아이에게도 책을 첫 장난감으로 주고 하루하루 좁아져 가는 책꽂이는 바라보는 일이 즐겁고 벽면 가득히 채워져 있는 책장을 바라보는 일이 배부르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책을 다른 사람들과 나눈다는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책을 나누는 일이 하늘로 먼저 보낸 자식과의 굳은 약속이라고 하지만 그 약속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모습은 아무나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삶에 두 번 째로 고개가 숙여진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감동보다는 내 삶을 돌아보며 부끄러움이 더 컸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버지가 아닌 굳건한 신앙을 이끌어주시는 목사님이 아닌 인간 김수연님의 삶이 내 남은 시간을 지나간 시간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새로운 이정표가 되어 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느낌이 무엇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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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둘 하나
최나미 지음, 정문주 그림 / 사계절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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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4, 3, 2, 1. 발사!

카운트다운은 숫자를 거꾸로 헤아린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놓는듯 원점으로 돌아오는 카운트다운은 무엇을 의미할까? 기존의 것을 새로 시작하는 출발점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아무 것도 없는 0의 상태에서 앞으로 발을 내딛는 바로 그 지점으로의 회귀에 무게를 실어 주고 싶다.

‘셋 둘 하나’라는 특이한 제목을 보면서 과연 어떤 내용일까하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수호천사, 마술 모자, 셋 둘 하나의 세 단편이 등장하는데 그 중 한편의 것을 제목으로 삼은데는 나름 이유가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하나 글을 읽어나가며 단지 한 단편의 제목이 아니라 세 글이 모두 한 곳을 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건이 모두 해결되어 슬프게 혹은 기쁘게 마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글의 끝이 새로운 시작을 열어 놓고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받은 아이로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자혜. 그래서인지 늘 당당하다.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친구들의 관심조차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혜에게 의외의 적수가 나타난다. 전학 온 선우의 엉뚱스러움은 아이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런 선우를 견제하던 자혜는 적보다는 친구로 만들기로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며 선우에게 영원한 우정을 맺으려는 자혜에게 선우는 칼날을 꽂는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영원한 것은 없다는 선우의 말에 자혜는 선우에게서 멀어져간다.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님을 바라보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먹을 것이라고 하는 선우에겐 ‘영원’이란 의미가 부질없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기본적인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먹을 것의 소중함을 부르짖는 선우의 마음을 자혜를 헤아리지 못했다. 인간의 감정이란 일방적일 수 없다. 일방적이라면 누구든 한 쪽은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귀신 소동을 통해 선우의 아픔을 알게 되고 선우의 손을 잡은 자혜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자혜와 선우의 우정은 또다른 시작을 열었다.

중학교 입학을 거부하는 효주는 자신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결정한 권리가 있다고 강조한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고집쟁이, 독불장군으로 문제아 취급을 받는 자신이 중학교에 간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아빠도 할머니와 고모의 걱정어린 잔소리도 효주의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가족들과의 갈등으로 밖으로 나온 효주는 손수레에 여러 가지 물건을 싣고 다닌 아줌마를 만난다. 마술 모자로 덮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사를 알 수 없는 노래가 효주를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가족이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마술 모자에 빌고 피붙이는 아니지만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사는 아줌마와의 만남을 통해 효주는 노래의 정체를 알게 된다.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지며 불러 주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 속에서 발견한다. 의도적으로 아니라고 부정하던 엄마를 다시 찾는다. 일상적인 생활을 거부하던 효주의 반란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보여 다시 시작된다.

삼세판. 3이란 숫자가 적용되는 일들이 참 많다. 그런 3에 대한 연구마저 있었으니 참 희한한 숫자다.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완전함을 찾고자 했음일까? 단짝 친구 세 명은 늘 누군가는 하나가 된다. 서로에게서 그 하나가 되고 싶지 않은 위태위태함을 발견한 재희는 전학 온 왕따 은혜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함께 한다. 비로소 둘 둘의 편안함을 발견한 친구들이 우정은 평온을 맞은 듯 하지만 사회 시험을 통해 금이 간다. 자신과 함께 해주는 친구들을 위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은혜의 절절함을 믿지 못한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은혜를 몰아친다. 함께이면서도 늘 셋과 하나였던 은혜의 비참함을 아이들은 동정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은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들 자신들이 하나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잡아 둔 것임을 스스로 깨닫는다. 자신들의 우정이 비겁했음은 인식하고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어야 함을 깨달은 아이들에게 새로운 우정이 자랄 수 있는 시작점이 생긴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우리는 수많은 카운트다운을 통해 새로 시작하지만 늘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하고 아쉬워한다. 오늘이 바로 그 카운트다운의 0이 되는 날임을 안다면 오늘보다는 한 뼘쯤 성숙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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