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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고대 그리스어 완역본) - 명화와 함께 읽는 ㅣ 현대지성 클래식 64
호메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평점 :
현대지성 출판사로부터 서평 도서를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일리아스>의 배경은 트로이 전쟁이다. 아킬레우스, 헥토르, 아가멤논, 파트로클로스 같은 익숙한 이름들이 등장하지만, 이야기는 단순한 전투의 나열이 아니다. 모든 것은 ‘분노’에서 시작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전리품이었던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기고 모욕당한다. 자존심이 꺾인 그는 전장에서 물러난다. 한 사람의 부재는 전세를 크게 흔들고, 결국 그의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대신 전장에 나섰다가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여기서 다시 불꽃처럼 타오르는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야기의 정점을 향해 달려간다. 그는 헥토르를 찾아 결투를 벌이고 복수에 성공하지만, 그 이후 헥토르의 시신을 능욕하며 분노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 뜨거운 감정은 프리아모스 왕이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몰래 진영을 찾아와 무릎 꿇는 장면에서 급격히 전환된다. 아킬레우스는 이 노왕의 슬픔 속에서 자신의 상실과 고통을 투영하며, 마침내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시신을 돌려준다.
<일리아스>는 바로 이 장면에서 끝난다. 트로이의 함락도, 아킬레우스의 죽음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충분히 완성된 느낌을 준다. 분노로 시작된 서사가 상실로 마무리되면서, 인간 감정의 복잡성과 그 안에 담긴 존엄이 또렷이 드러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이 서사 속에서 ‘에너지’를 느꼈다. 말 그대로 불꽃처럼 타오르는 감정의 힘. 영웅들의 용맹함, 자신을 감정을 결코 숨기지 않는 신들의 모습, 그 신의 힘에 굴복하지 않고 맞서는 인간의 모습까지. 마치 고대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 내 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이야기 속 신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변덕스럽고 매우 감정적이다. 신들은 사랑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연민을 느끼면서 인간의 일에 깊이 개입한다. 이들은 단지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반영하고 증폭시키는 거울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일리아스』는 인간과 신을 통해 그 당시 그리스인의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분노’가 단지 파괴적인 감정이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고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원동력임을 강렬하게 느꼈다. 호메로스가 이 위대한 서사를 분노에서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왜 우리는 이토록 오래된 고대의 이야기를 읽어야 할까? <일리아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정직한 고백이다. 감정에 휘둘리고, 실수하고, 후회하고, 때로는 용서하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인간이 감정을 마주하고 다뤄야 하는 방식,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 존엄을 지켜야 하는지를 말해준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 오래된 문장들 속에서, 나는 지금의 나를, 그리고 우리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