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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차일드
김현영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러브 차일드. 낭만적인 제목과 파스텔톤으로 그려진, 오아시스를 바라보는 소녀의 모습이 담긴 표지. 당연한듯 달짝지근한 사랑의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와 가장 처음 본 것은 난도질된 우리의 몸이었다.'
이 소설은 이러한 첫문장으로 시작된다. 낙태된 아기들의 이야기. 생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그렇기에 비극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 이 아기들의 영혼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우리'는 화자가 되어 미래로 날아간다. '수'와 '진'이라는 두 남녀가 재회하는 순간까지... 인간을 폐기하는 쓰레기장에서 재회하는 그 순간으로 말이다.
이 소설은 '수'와 '진'의 재회장면으로부터 시작되어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디스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려나간다. 그들이 사는 세계는 인간조차 '물화(物化)'된 세계이다. 인간의 감성과 가치관은 효율성 앞에서 사라져버렸다. 때문에 노인이 되어 사회에 기여할 수 없는 자들은 '폐기'되어 기름과 비누로 재활용된다. 특수하게 조작되어 늙지 않는 '인간'은 평생동안 아이의 모습으로 애완동물처럼 길러지다가 필요하면 권력자의 '디저트'로 먹힌다. 이 '먹힌다'는 말에는 아무런 은유적 의미가 없다. 영원히 늙지않고 싶은 욕망에 권력자들은 아이들을 요리하여 디저트로 먹어치울 뿐.. 이 책을 읽어가다보면 잔인한 묘사와 비인간화된 군상에 소름끼치고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의심이 생겨날 것이다. '너무 자극적으로 묘사한 것 아닌가? 게다가 현실성이 너무 없다. 아무리 비인간화가 진행되어도 이런 사회가 출현할 리 있겠는가?' 분명 다소간 과장된 부분이 없지는 않아보인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이러한 디스토피아의 씨앗을 너무나 많이 보게 되는 것은 어찌할 것인가...
노인문제가 심각하다고 한다. 고령화 사회가 도래되면 사회는 경쟁력을 잃고 존속조차 위험해진다고 한다. 그러면서 아이들을 많이 낳는 것이 애국이라고 한다. 이러한 말에는 노인은 '문제'거리이며, 사회는 개인보다 우선되는 '가치'이고, 개인은 애국이라는 이름 하에 아이들을 '생산'해야 된다는 함의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러한 함의를 진지하게 고민해본적이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아이돌의 연령이 20세 밑으로 쭉쭉 내려가 10대 초반까지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아직 가치관도 확실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더 옷을 벗으라고, 더 엉덩이를 흔들라고, 더 유혹적인 표정을 지으라고, 그 젊음을 소비하겠다고 외친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에 기대어 유치원생 아이들이 장기자랑에 나와 탱크탑과 숏팬츠를 입고 의미도 모르는 외설적인 춤을 춘다. 그것을 보는 어른들은 기특하다고, 심지어 신동이라고 칭찬하기까지 한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혹은 흐릿하게만 바라보는 사회의 어둠을 작가다운 예민함으로 잡아내어 소설 속에 그려나간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러한 모습을 그려내며 즐거워할 리 없다. 그래서 작가는 아팠다고 한다. 이 소설을 그려내며 내내 아팠다고 후기에서 밝힌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일단 아픔을 느껴야 한다. 아픔을 느껴야 치료를 하기 위한 행동을 하게 되니까.. 그래서 작가는 이렇게 우리가 경계하지 않는, 무감각해진 미래의 모습을 대신 아파하며 그려낸 것이리라..
태아인 '우리'들의 거꾸로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도달하게 되는 '수'와 '진'의 출발점을 용산참사 장면으로 잡아낸 것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리라. 근 몇년간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은-늘 그렇듯이-많고 많지만, 우리가 가장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 그렇지만 무감각하게 덮어버리고 만 사건이 용산참사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부끄러움과 경계를 잊어버리는 지점에서부터 비극은 시작되는 것이다. 늘 그렇듯이..
'쓰레기의 탄생' 지점까지 돌아본 '우리'는 다시 인간 폐기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수'와 '진'의 폐기 직전에 작가가 남기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본다. 애초에 이 책은 멜로적인 소설이라 보기 어렵고 '수'와 '진'이 평생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 역시 소설의 주제에 기여하는 바는 별로 없지 않은가 한다.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뿌려지는 희망의 씨앗은 다소 뜬금없게 느껴지기도 하다. (냉정한 듯 하면서도 사실은 지나치게 파토스를 많이 담아낸 문체도 다소 부적절하지 않은가 느껴지기도 했다.) 작가는 이런 면을 인정하면서도 '수'와 '진'의 인생이 너무 아파서 마지막 장면에까지 냉정할 수 없었다고 한다. 메시지를 위해서 다소간의 무리를 감수했다는 것이었다. 작가의 이런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픔'을 느끼라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미래에도 소중하기를 바란다면 무감각해지지 말라고 말하는 작가에게 다른 결말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었다.
태고로부터의 불멸의 진리 한 가지. 인간은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많다는 것. 그렇기에 인간에게 좌절해서도 안되고 지나치게 낙관해서도 안될 일이리라. 인간이 악해진다면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고 선해지는 것도 우리의 선택인 것이다. 물론 그 선택이 옳을지 그를지는 시간만이 아는 일. 하지만 최소한 '아픔'을 느끼고 그 아픔을 덜어내기 위한 선택을 해간다면.... 나는 현재 얼마나 예민한가, '어쩔 수 없다'는 말 뒤로 나의 둔감함을 키워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 다른 분의 서평을 보고 뒤늦게 러브 차일드가 사생아를 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차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