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니그마 세계 2차 대전 3부작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은 로마사 시리즈와 폼페이를 읽어 보았는데요, 이 소설 '에니그마'는 그보다 이전에 쓰여졌다고 하더군요. 팩션 소설의 열풍이 한풀 꺾인 요즘입니다만 확실히 그의 소설들은 독자를 끄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랬기에 이렇게 재출간되기도 했을 테지요. 이전의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생각했던 부분입니다만, 당대의 시대상을 그려내는 그의 솜씨는 확실히 여간이 아닙니다.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분위기를 행간에 뿜어낸다고 할까요? 이것이 그의 소설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에니그마'가 독일군의 전설적인 암호장치임은 잘 알려져 있는데요,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승리는 이 장치의 해독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정도지요. 이 장치의 해독을 위해 각 분야의 천재들을 끌어모은 곳이 블레츨리 파크로써 소설 역시 내내 이곳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제가 이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앨런 튜링의 전기를 통해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의 삶이 워낙 드라마틱하고 그의 천재성이 너무나 뛰어나서, 그가 대활약을 했던 이 곳을 잊을 수 없었죠. 하지만 사실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잘 알지는 못했는데요, 이 소설을 다 읽은 지금은 분위기로나마 짐작해볼 수 있게 되었다는 소감입니다. 막상 소설 속에서는 기대했던 튜링의 등장은 없었고 이름만 간간히 나와서 아쉽긴 했습니다만^^;

 

 

 소설의 주인공은 블레츨리 파크에서 암호 해독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그려지는 수학자 '제리코'입니다. 아마도 실존 인물은 아닌 듯 합니다만 튜링의 소개를 받아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으로 그려지지요. 그의 이름은 성경 속에 나오는 불굴의 성채인 '여리고'를 떠올리게 합니다만, 그런 이름을 가진 그가 불굴의 암호체제인 에니그마 해독에 대활약을 하는 모습이 작품의 한 축이 됩니다. 전쟁으로 인한 열악한 환경과 가혹한 암호해독 작업에 시달리느라 거의 정신분열의 상태에 놓인 그의 모습은 상당히 실감나게 그려지는데요, 수학자의 전형처럼 느껴지는 사고와 가치를 가진 그가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모습은 전쟁의 한 단면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다른 한 축은 '클레어'라는 여인의 실종 사건입니다. 제리코는 블레츨리 파크에서 일하는 직원인 그녀를 만나 잠시나마 위안을 받게 되는데요, 가벼운 만남 정도로 관계를 생각했던 클레어와 달리 정신적인 궁지에 처해있던 제리코는 상당히 심각하게 그녀에게 집착을 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 집착 때문에 클레어가 암호문을 유출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할지,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해야할지.. 그리고 곧이어 그녀가 실종면서 그녀를 '알고' 싶어하는 제리코는 사건을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음모의 실체를 밝혀가지요.

 

 후반부의 속도감과 마지막의 반전 때문에 추리 소설적인 부분에서도 '에니그마'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저는 소설이 그려내는 역사적 상황이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실은 사건을 파헤쳐가는 제리코의 행동 패턴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불합리한지라 내내 몰입하기 힘들었거든요. 물론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선택을 잘못하다 보니 소위 '말렸다'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뛰어난 두뇌와 놀라운 행동력과는 너무 상반되는지라 어색한 기분을 떨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반전 부분에서 밝혀지는 사실이 작품이 그려낸 사회 분위기나 정치적 상황과 기가 막히게 어우러져 마지막 장면에서 느끼게 되는 허무하면서도 아릿한 맛은 최고라고 할만 하군요. 역시 보통의 필력을 가진 작가는 아니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소설 속에서 밝혀낸 연합군의 '어두운' 부분은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지식이 짧은 저로써는 처음 알게 된 부분이라 사실인지 확인해보고자 나중에 따로 검색을 해보았는데요, 상당히 악명높은 사건이더군요. 전쟁은 일으킨 사람 뿐 아니라 참가하는 사람 모두를 비이성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은 익히 알던 바입니다만, 이토록 많은 인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고 어이없이 숨겨질 뻔 했다는 것은 여전히 가슴아픈 일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정도로 전쟁의 본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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