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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만들다 - 특별한 기회에 쓴 글들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9월
평점 :
[장미의 소설] 이후로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을 쭉 읽어오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쉽지는 않습니다. 소설의 전형에서 벗어나는 부분이
많은지라, 한번에 소설의 이곳저것을 잡아내며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품고서 책을 펼치게 되니까요. 실은 한번은 커녕 서너번은 읽어야
한다는 것이 솔직하겠지요. 워낙 박식한 양반인지라 책의 기저에 어찌나 이것저것 깔아대는지! 그럼에도 이런저런 요소들이 결합하여 점점 더 독자를
빠져들게 한다는 것이 에코 소설의 힘이겠지요. 에코의 소설이 버겁다 느껴질 때 오히려 손에 들게 되는 것이 그의 에세이입니다. 꾸준히 출간되는
그의 에세이는 부담도 적고 무엇보다 유머감각이 넘쳐나는지라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거든요.
'적을 만들다'는 그의 강연과 칼럼을 정리하여 책으로 낸 것이네요. 때문에 14편의 글들은 일관성있게 흘러가기보다는 각각 개성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런 구성이기도 하다보니 저 역시 처음부터 차례로 읽기보다는 관심이 가는 글부터 찾아 읽었네요. 책의 제목과 동제인
글이 책을 여는 첫번째 꼭지가 되고 있는데요, [적을 만들다]는 그의 고고학적 역사연구 방식을 잘 드러내는 글이 아닌가 합니다. '적'이란
무엇이었는가 혹은 무엇인가를 역사 속 사례의 적절한 '보여주기'만으로 효과적으로 논증해내고 있는 것이죠. 외국인, 야만인, 악취, 러시아인,
레즈비언, 마녀, 향락으로 규정되는 '적'이 조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고 그만큼 끈질기게 창조되어 왔다는 것을 흥미롭게 들려줍니다. 이
글이 책의 첫번째에 놓인 것도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 빅토르 위고, 과잉의 시학]도 흥미로웠습니다. 역사소설가 하면 손꼽히는 인지도와 작품수와 분량(!)을 자랑하는 위고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소설 전반에 걸친 '흘러넘침'이 문학성과 신뢰성을 갉아먹지 않는가 생각했었는데요, 에코는 그러한 넘침이 그의 소설을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임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위고는 역사를 '쓰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호흡과 포효를 '느끼게 하고자' 소설을 썼다는 것이죠. 흥미로운
통찰이 아닌가 합니다.
[상상 천문학]과 [섬은 한번도 발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는 상당히 비슷한 인상을 주는데요, 비록 주류에서 벗어나 점차 잊혀져 가는
지식들입니다만 이것 역시 시대가 부여하는 임무에 따라 움직여간 인물들이 만들어낸 성과물일 것입니다. 사실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역사 속
사실들을 장광설로 늘어놓는 것이 에코식 서사의 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데요, 그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이 두 꼭지였다고 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작가에 정신없이 끌려다니는 독서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로 즐거운 여행이고 보면 이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조만간 한번 더 펼쳐봐야 되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