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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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중 소설은 재미라는 면에서는 실망스러운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같은 문화권이기 때문에 감성이 비슷한 덕이기도 하고, 워낙 넓은 시장에서 걸러진 책들만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때문이기도 하지 않나 합니다. 특히 미스터리나 공포 소설은 기대 이상인 경우가 많더군요. 일본 미스터리의 경우,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은데요, 하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트릭에 집중해서 짜릿함을 주는 소설이고 다른 하나는 사실적 묘사에 집중하면서 묵직한 메시지를 던지는 소설이지요. 전자는 판형이 작고 표지가 양장본이며 두께가 얇은 반면, 후자는 판형이 크고 표지도 하늘하늘 하며 두께가 상당하다는 선입견(?)을 덧붙이고 싶군요. 굳이 이런 선입견을 덧붙이는 건, 이 책은 후자의 유형에 속한다고 하겠는데 전자의 유형을 기대하고 읽으신 뒤에 실망했다는 후기를 쓰신 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전반부는 지루하고 후반부의 반전(!)은 시원찮다고 하셨더라고요. 역시 어떤 책을 기대하고 보는가에 따라 평가는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책의 외양을 보고 책의 성격을 예측했기 때문인지 초반부터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겠습니다만 근접한 유형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소설의 한 축은 경찰의 대실패로 기록된 64라는 이름의 유괴사건이, 다른 한 축은 중앙과 지방, 지방 내 경무부와 형사부의 권력 다툼, 그리고 한 개인의 선택 등 욕망의 충돌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64사건은 사건 흐름의 중대한 실마리이자 결말에서 재현되는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기에 중심을 두고 사건 해결을 기대하며 읽는다면 당연히 지루하리라 생각됩니다. 책의 5분의 4는 나머지 한 축에 할당되고 있으니까요. 경찰이라는 조직 내에서 이익과 가치관이 첨예하게 충돌하는 양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그 중간에서 경찰로써, 혹은 한 인간으로써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주인공의 심리를 써내려가는데 작가는 주력하고 있는 것이죠.



책의 포인트는 여러 곳이 있겠습니다만, 일단 10년이 넘게 고민해서 써내려갔다는 말이 수긍될 정도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면 묘사들이 인상적입니다. 예컨대 경무부의 음모를 알게 된 주인공 미카미가 서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서장실로 뛰어드는 장면이 있는데요, 열변을 흘려듣던 서장이 갑자기 미카미의 구두가 지저분하다는 말을 던집니다. 아, 구두를 보니 자네가 형사부에서 일했었다는 것이 납득이 가는구나 하는 식으로요. 이 말을 듣고 불현듯 미카미가 느끼는 지독한 피로, 소통이 불가능한 벽에 부딪혔음을 깨닫고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는 장면이 너무나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또 주인공 미카미의 절묘한 위치 설정도 눈길을 끄는데요, 애초에 형사부에 소속되어 있던 미카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경무부로 발령된 후 대 언론 홍보를 담당하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경무부와 형사부, 경찰과 언론의 경계선에서 서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의 딸이 가출을 하는 사건이 더해짐으로써 미카미는 경찰과 사건 피해자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게 되기도 합니다. 경계에 선 자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백안시,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한 내면적 갈등은 미카미에게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하지만 바로 그 위치 덕에 미카미는 주변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 그리고 자신도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이후 미카미의 행보를 지켜보는 독자로 하여금 그의 선택에 공감하게 되는 든든한 밑거름이 됩니다.


조직에 대항하는 개인의 무력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자그마한 희망을 그려내면서 마무리된다는 점까지, 이 책은 정통적이고 한편으로는 고루하기까지 한 이야기를 펼쳐냈다고 하겠습니다. 책장을 덮으면서 냉정히 돌이켜보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읽을 때 느꼈던 둔통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만,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힘은 저자의 이름을 기억해두게 만드는군요.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하는 본성을 타고 났다고 하던데요, 스토리텔링이 가지는 본연의 매력을 한번 더 체험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작가는 '미~'로 시작하는 이름을 좋아하나 봅니다. '미~'로 시작하는 이름이 많아서 초반에 헷갈리더군요. 안그래도 일본 이름인데다 등장인물도 많은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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