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동사니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잡동사니'입니다. 출간되는 분량으로 보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만, 창조력이 엄청나다고 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네요. 하나같이 거기서 거기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신작이 나올 때마다 읽게 되는 것은 '읽는 순간의 공간 이동'에 중독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녀의 소설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만 실은 한없이 가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소설을 읽어가는 동안에 현실에서 벗어나 그 가상공간을 유영하는 즐거움은 에쿠니 가오리의 애독자라면 누구나 느껴보았을 것입니다. 이 작품도 그런 면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 대해서 줄거리가 어떠니, 도덕성이 어떠니 이야기하는 것은 '지는 거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에쿠니 월드에 사는 여성들의 감정의 미묘한 흔들림을 감상하면 족할 따름이지요. 사랑을 굴레라고 느끼면서도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하지만 와중에도 겉보기에는 우아함과 침착함을 잃지 않는 '슈코'는 에쿠니 가오리 캐릭터의 전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슈코의 거울 속 모습이라고 할 '미우미'는 소녀에서 어른이 되어가는 사춘기 소녀의 불완전함이 아름다운, 어른스럽지만 자기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는 아이입니다. 슈코가 사랑의 굴레를 붙들고 늘어지는 모습과 미우미가 사랑의 굴레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이 번갈아가며 그려지고 있는 것이지요. (또 이들 못지않게 강렬한 매력을 뽐내시는, 슈코의 어머니 키리코 여사의 자신만만한 실버 라이프에 매혹될 분들도 많을 것 같군요.)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는 왜곡된 가치관에 따라 살아간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들의 삶이 작품 속에서 변명되는 방식이 기억에 남습니다. 슈코의 직업은 번역가인데요, 그녀는 작품을 번역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한 단어는 고유의 의미와 느낌과 질량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다른 언어로 바꾸어놓는 것이 좋을 리 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특징은 '모든 인생=일종의 완벽'이라는 진실과 닮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이렇게까지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구현화된 적은 드뭅니다만 에쿠니의 소설에서 유일하게 주제라고 할만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인생관일 것입니다. 뭐, 이런 인생관 역시 결국에는 에쿠니 월드를 보다 이질적으로, 그렇기에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만...

어떤 분께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에 대해서 쓴 서평을 보다가 한참 웃었는데요, 서평의 말미에 '언제나 그렇듯 읽고 나서 남는 것은 없지만..'이라고 하셨더라고요. 아이러니한 일이겠습니다만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다들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일 것입니다. 그녀의 소설은 한잔의 커피를 즐기듯 천천히 마시고 나서 잠시 잔향 정도만 즐기면 되는 것입니다. 이번 소설 역시 조금은 새롭지만 여전히 익숙한 커피를 만나는 기분으로 보실 수 있으리라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