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 1 버지니아 울프 전집 17
버지니아 울프 지음, 진명희 옮김 / 솔출판사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버지니아 울프는 제게 있어 소설가, 문학가라기보다 하나의 아이콘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름이 신비화되어 곳곳에서 회자됩니다만 막상 그녀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일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통 소설가가 그의 대표작으로 논의되는데 비해 버지니아 울프가 작품이 아닌 여성운동가, 모더니스트로만 기억되는 것은 독특한 현상일 것입니다. 그가 살아있다면 한국에서의 자신의 이런 위치가 조금은 슬플 것 같기도 하네요.

 

 

 

아무튼 그렇게 잘 아는 듯, 전혀 모르던 그녀와 만나게 된 첫 소설이 '출항'입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처녀작이라고 하는데요, 27세에 집필을 시작하여 장장 6년에 걸쳐 완성된 소설이라고 합니다. 2권으로 분책되어 나오긴 했습니다만 판형도 작고 두껍지도 않아서 사실 그렇게 긴 소설이라 할 수는 없겠는데요, 그런 소설을 6년에 걸쳐 썼다는 것은 소설의 문을 처음 두드린 그녀의 조심스러움과 신중함, 고민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레이첼 빈스레스라는 스물 네살의 아가씨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남미여행을 떠나는 외삼촌과 외숙모와 함께 유프라지니 호를 타고 남미로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그 와중에 개성강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처음 사랑의 감정을 알려주는 테렌스 휴잇이라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혼의 결실을 맺기 전에 파괴되고 말지요.

 

 

 

사실 스토리라인으로만 이야기하면 제인 오스틴 식의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책을 읽어나가는 감상은 전혀 딴판입니다. 사실 술술 읽어나가기는 버거운 작품인데요, 가장 방해되는 것은 어찌보면 계속되는 작가의 방해입니다. 이 소설은 상당히 강력한 전지적 작가시점이라고 하겠는데요, 인물의 행동과 사고를 묘사하는데 있어서 끊임없이 작가가 개입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소설이 레이첼의 성격과 사고를 지속적으로 묘사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변화해가는지 드러내는데 주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다른 등장인물들 역시 그 성격과 행동을 통해서 당대의 시대상과 사상의 변화를 드러내도록 조종됩니다. 당연히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긴밀하게 연결되는 사건의 전개가 이 책에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죠. 사고의 흐름이라는 악명높은(?) 표현기법이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 작품임에도 확실하게 모더니즘의 정서가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서술방식을 택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군요.

 

 

 

작가를 등장인물과 동일시하는 것은 흔히 저지르는 실수입니다만 레이첼에게 현실과 미래를 고민하던 젊은 울프의 모습이 비쳐있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듯 합니다. 가부장적 질서에 묶여 인형처럼 자라나 성격의 일부분만이 웃자랐던 레이첼이 일련의 개인적 경험을 거쳐 새롭게 눈을 뜨는 모습, 그러나 그러한 눈뜸이 무르익기도 전에 결국 운명적 파국에 의해 끝나버리고 마는 과정은 평생 정신질환을 앓으며 자기파괴를 거듭했던, 당대의 사회상에 숨막힘을 느끼고 반항을 꿈꾸었지만 결국 시대의 일부분이기도 했던 울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니까요.

 

 

 

작품평과 주석을 보면야 이 작품의 문학사적 위치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만 사실 강렬하게 기억될 작품은 아닌 듯 합니다. 파편화된 작품의 알맹이들을 제대로 소화하기 못했을 수도 있겟습니다만 작품이 쓰여진지 100년이 넘은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강하게 호소하는 부분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니까요. 지나치게 자기세계에 빠져 쓴 작품이라는 평은 너무 건방진 것이겠지요? 울프의 작품세계를 따라가는 시발점 정도로 생각해두고 일단은 덮어둘까 합니다. 그녀의 다른 작품과 만난 뒤에 다시 펴볼 생각이 들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