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시간 - 온 가족을 잃고 바다를 표류하며 홀로 보낸 11세 소녀의 낮과 밤
테리 듀퍼라울트 파스벤더.리처드 로건 지음, 한세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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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가 거칠게 휘몰아치는 표지에 [96시간]이라는 제목, 그리고 그보다 강렬한 [Alone]이라는 원제가 눈을 끕니다. 나흘 동안 망망대해를 떠돈 여자아이의 이야기라니, 이 설명을 보자마자 바로 떠오른 것은 [파이 이야기]였습니다. 워낙 인상깊게 읽은 책이었습니다만, 그 책 역시 파이라는 소년이 해난사고로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아 바다를 표류하며 겪게 되는 체험이 이야기의 틀을 이루고 있었지요. 다만 파이가 소설 속 인물인데 비해서 이 책의 주인공인 테리는 살아숨쉬는 11세의 소녀였다는 것.. 그러한 체험은 그녀에게 어떤 흔적으로 남아있을까 불현듯 궁금해졌습니다.



이 책은 주인공 테리가 직접 쓴 수기는 아닙니다. 이미 소녀 테리는 할머니가 되었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 덕에 그녀는 비로소 과거의 아픈 체험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가 봅니다. 그렇게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그녀의 친구이자 저술가인 리처드 로건이 책으로 엮어낸 것이지요. 이런 방식을 택했기 때문일까요? 이 책은 상당히 색다른 구성을 보입니다. 그녀의 체험은 분명 강렬한 것이었겠습니다만 이 책은 '96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가 생환한 후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에서야 테리라는 인물이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 전까지는 오히려 스릴러 소설처럼 사고 전후의 상황이 전개되어갑니다.



이처럼 스릴러적인 구성이 가능했던 것은 이 책의 또다른 기둥인 [하비]라는 인물 때문입니다. 테리의 가족은 블루벨 호라는 배를 타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하비를 배의 선장으로 고용합니다. 하비는 미남이고 매력적인 인물인데다 전쟁영웅이기도 하지요. 유쾌하게 항해에 나선 블루벨 호는 그러나 곧 실종되어버리고 표류하고 있던 하비만 구출됩니다. 하비는 배가 조난을 당했다고 진술하지요. 그러나 그의 말과 행동은 미심쩍은 데가 있습니다. 게다가 머지않아 그는 호텔에서 자살을 하고 말지요. 그리고 실종 96시간 만에 비로소 테리가 구출됩니다. 쇠약해진 소녀가 힘겹게 내뱉는 말들은 하비의 그것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블루벨 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왠만한 스릴러 소설 같은 전개 아닌가요? 어떤 의미에서는 기대를 배반하는 책이라고도 하겠습니다만 그만큼 다른 색깔의 즐거움이 있었다고도 해야겠네요.  




사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저자 후기였습니다. 유일하게 테리가 스스로의 목소리로 써내려간 후기에는 그녀의 일생에 대한 담담한 회상이 간결하게 담겨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삶을 살아갔다고 하겠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실수를 하고 고통도 받으며 사랑도 하면서 말이죠. 그녀의 96시간이 특별하다고 하겠습니다만, 그녀의 나머지 삶은 특별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그런 것 아닐까 합니다. 어쩌면 '평범하다'라고 불리는 삶의 대부분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특별한 것은 아닐까, 엉뚱한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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