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 평원의 혈투
이영수(듀나)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듀나 님은 꾸준히 단편을 써주시고 있는 듯, 많은 단편 모음집에 이름을 보이시더니 이번에는 자신만의 단편 소설집을 내셨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라는 재밌는 제목을 단 단편집이다. 장르문학에 있어서 듀나라는 이름의 지명도가 상당히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책도 상당히 인기를 끌지 않을까 생각된다. 기존에는 영화평론가로 더 알려졌던 것 같은데 이젠 소설가로 더 유명해지신 것도 같다. 여전히 신상정보가 베일에 가려져있다는 점도 특이하지만 말이다.

책은 [동전 마술]이라는 단편소설치고도 짧은, 그리고 그에 반비례하듯 불친절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선자리에 나간 주인공은 상대 아가씨가 세계의 틈새로 동전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마술을 하는 것을 본다. 그 뒤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하지만 어느 날의 사건을 계기로 이 동전 마술의 실체와 마주치게 된다. 일상공간 속에서 마주치게 되는 비현실성, 그리고 그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현실적이면서 감상적으로 반응하는 섬세한 인간의 심리가 독자를 단숨에 듀나 월드로 끌어당긴다. 
[물음표를 머리에 인 남자]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미스터리가 이야기를 휘어잡고 있지만 그 처음과 끝에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보게 되는 소소하면서도 사실적인 삶의 모습이 놓여 있다. 
[메리 고 라운드]는 세 명의 인물이 서로가 맺은 관계를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한다. 누구나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사실'이란 실은 각자에게 다 다를 수 밖에 없다는, 한계성에 대한 인식을 코믹하면서도 긴장감있게 그려나간다.
[A, B, C, D, E & F]는 넷상의 삶이 현실의 삶을 따라잡아가는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왠만한 독자에게는 상투적인 코미디로 보일 가벼운 이야기이지만. 이 작품이 처음 인터넷이 보급되던 10여년 전에 쓰여졌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달리 보이지 않을지?
[호텔]은 이 책 속의 몇몇 작품이 공유하고 있는, 인간보다 진화한 인공지능이 '시스템'으로써 사회를 관리하고 있는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이 세계관은 이어지는 작품인 [소유권]을 통해서 구체화되는데, 너무나 고도화하여 인간으로써는 더 이상 이해하기를 포기해버린 '시스템' 속에서 마치 연극을 하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상을 그려낸다. 미래로 갈 것도 없이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사로잡곤 하는 근원적인 한계에 대한 인식을 작가는 특유의 블랙 코미디를 사용하여 냉소하는 것이다.
[죽음과 세금] 역시 유사한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음모론이 사실은 진리였다는 영화적인 구조를 차용하지만, 시스템 안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개인의 모습은 섬뜩할 따름이다.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는 책의 제목으로도 쓰인 만큼, 가장 무게감 있고 분량도 많은 작품이다. 역시 가장 일상적인 생활상으로 시작하여 단숨에 비현실적인 세계로 치닫는 듀나식 오프닝을 사용한다. 동시에 현재의 사회상에 대하여 가장 직접적인 비판을 시도하여 눈길을 끌기도 한다. 인간의 이기심과 동물성, 그로 인한 잔혹함을 그보다 거대한 시간과 '그 무엇'으로 단숨에 묻어버리는 작품의 결말은 작가의 냉소와 허무가 가장 진하게 묻어나고 있다. 
전설의 현대적인 변주라고 할 [여우골]로 가볍게 숨을 돌린 뒤, 이어지는 [정원사]를 통해 인간의 오만한 자기 인식과 실존적인 사소함을 비웃고 나서, [성녀 걷다]를 통해 무한성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을 보여준 작가는 [안개 바다]를 통해 다시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가 보여준 세계로 돌아간다. 외계의 낯선 얼음성에 홀로 남겨진 남자 마티아스 볼츠만, 그리고 그 남자의 유일한 동반자인 개들.. 이들로 인해 시작된 창세기는 전복된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로 전개되어 간다.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창조주의 우위를 잃지 않았던 프랑켄슈타인 박사와는 달리, 피조물에 밀려나고 매몰된 끝에 재앙 혹은 세계의 종말로 화해버린 마티아스 볼츠만의 모습은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현상성에 대한 얄팍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낙관을 비웃는 듀나식 냉소도 몰론 빠지지 않고 말이다.
마지막 작품은 네이버 문학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디북]이다. 이 작품이 마지막을 장식하니 마치 [브로콜리 평원의 혈투]에서 보여준 결말을 책 전체에 적용한 듯한 인상이기도 하다. 미묘하게 남는 여운이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들기도 하고..

듀나의 작품은 강력한 냉소와 허무로 무장하고 있어 그의 작품에 익숙한 사람조차도 때때로 불편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를 압도하는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의 상상력은 독한 중독성이 있어 다시한번 그를 찾게 만들기도 한다. 한국 장르문학의 대표작가라 할 듀나의 내공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한다. (덧붙여 작품 곳곳에 인용되는 영화의 부스러기들은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주는 여분의 즐거움이 되지 않을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