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연장통 - 인간 본성의 진짜 얼굴을 만나다
전중환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책에 있어 내용보다 중요한 것은 없겠지만, 책의 인상을 결정짓는 제목과 디자인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는 없으리라.

이 책 '오래된 연장통'은 그런 면에서 확실히 독자의 눈길을 끄는데 성공한 듯 하다.

'오래된 연장통? 진화론에 대한 책인데 왜 이런 제목을 달았지?'

'Evolution이라고 쓰여있는 티셔츠를 입은 이 남자는 왜 용접 마스크를 쓰고 있는거지? 어, 잘 보니 용접 마스크에 도시의 모습이 비쳐져 있네?'

보자마자 이러한 의문을 떠올리게 하는 표지라면 망설임없이 성공적인 디자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의문의 답은 책을 들추면 바로 풀리게 된다. 작가는 서문을 통해 이 책의 제목을 설명해준다.

p.19 '...인간의 마음은 톱이나 드릴, 망치, 니퍼 같은 공구들이 담긴 오래된 연장통이다. ... 인류의 진화적 조상들에게 주어졌던 다수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때로는 구차하기까지 한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설계되었다.'

또한 서문에서는 이 책이 입문서가 아닌 에세이임을 명시하고 있다.

p. 19 '그러므로 이 책은 진화심리학의 기본 개념과 주요 연구들을 잘 정리한 입문서는 아니다. ... 이 책은 그 모습들을 어설프게 스케치한 에세이다.'

이 두 가지로 이 책의 특성은 완벽하게 설명된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책이라는 소개를 듣고 이 책을 집어든 사람은 자칫 이 책을 진화심리학에 대한 개론서로 생각하고 읽게 될 위험이 있다. 그리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그만 실망해버리지 않을까.. 나 역시 그럴 뻔 했으니 말이다.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현대사회를 진화심리학이라는 돋보기로 조명해본 단상들의 모음집이다. 그 결과 전체적인 통일성이나 체계성은 일정부분 희생시켰지만 입문자에게 가장 중요할 재미라는 요소를 보장해준다. 작가는 이런 부분을 예상하고 미리 언급해둠으로써 독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해준다.

이 책은 21개의 꼭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꼭지는 우리의 일상 면면에 대해 진화심리학적 눈으로 접근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흥미롭지 않은 꼭지가 없지만, 나에게는 다섯번째 꼭지 '병원균, 집단주의, 그리고 부산갈매기'와 열여섯번째 꼭지 '가을빛이 전하는 말', 스물한번째 꼭지 '동성애는 어떻게 설명하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다섯번째 꼭지는 동서양 문명의 폐쇄성과 개방성 정도를 각 문명이 경험해왔던 병원균에 대한 피해 정도로 풀이해내고 있는데, 생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내용이었다. 열여섯번째 꼭지는 고인이 된 대석학 윌리엄 해밀턴이 단풍의 진화과정에 대한 통찰력을 발휘하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는데, 과연 대가는 대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구나 감탄하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스물한번째 꼭지는 동성애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서로 다른 관점들이 아주 재미있게 다가왔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소개서라 하지만 이 책의 내용 중 절반은 진화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들어본 적이 있는 내용이 아닐까 한다. 이미 우리 삶에 있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진화심리학이 접근해 있구나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반면 열일곱번째 꼭지에서부터 다루는 도덕에 대한 진화론적 '소개'는 생소하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도 했다. 전문적인 논의가 필요하고 논란의 여지가 큰 부분이니만큼 에세이적 접근을 꾀한 이 책의 구조상으로는 모험적인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작가는 진화심리학에 대한 굳은 신뢰가 있어서인지 여기저기 자신만만하면서도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짧은 글로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야 하는 칼럼들을 모은 책이니만큼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짧은 글 속에 모두 담아낼 수는 없었을 근거들에 비해서 지나치게 단정적이고 확신에 찬 설명은, 나같이 의심많은 독자에게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용할 듯 싶다. 수천년간 과학이 담아내지 못했던 종교와 도덕을 과연 진화심리학이라는 새 상자가 깔끔하게 포장해서 담아낼 수 있으리라 확언할 수 있을까? 과학이 어떤 가설이라도 편견없이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자체가 편견으로 작용한 예도 적지 않았다. 오해를 낳을 수 있는 표현은 조금 더 다듬어주었다면 어떨까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 역시 진화심리학에 대해 더 깊이 알아보아야겠다는 욕심을 불러일으킨 셈이니 결국은 작가의 판정승일까나? 젊은 글을 써낸 저자의 싱싱한 필력이 반갑고 그만큼 어떤 차기작을 낼지 기대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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