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침묵 - 제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이선영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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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팩션의 붐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팩션들이 쏟아져나왔다. 팩션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흘러나오는 긴장감이 아닐까 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작가의 필력과 기본 구성이 뒤따르지 않으면 매력이 반감되겠지만 말이다. 그런 면에서 근래 접했던 작품들 중 다시 보고 싶어지는 작품은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접하게 된 이 책, 천년의 침묵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익숙하면서도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와, 제 3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이라는 이력으로 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작가가 상당히 오랜기간 가다듬어 온 작품이라는 소개를 보고 일단 수준 이상의 작품이겠구나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었다.
 

우선 간략히 작품 소개를 하자면 이 작품은 고대 그리스의 크로톤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크로톤의 귀족 아리스톤은 정치에 뜻을 둔 인물이지만 형 디오도로스가 살해되자 그 배후를 캐기 위해 형이 몸담고 있던 학파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 학파를 설립한 인물은 피타고라스 정리로 이름을 남긴 피타고라스. 그 곳에서 그는 형의 친우이자 피타고라스의 수제자 중 한명인 히파소스와 만난다. 아리스톤과 히파소스는 디오도로스의 죽음 뒤에 피타고라스 정리의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아채고 그 비밀을 알아내고자 디오도로스가 남긴 기호의 비밀을 파헤쳐간다. 


이상의 줄거리를 듣고 이 작품을 미스테리로만 생각한 독자는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스토리의 전개는 상당히 빠르지만 비밀과 반전의 짜릿한 손맛은 그다지 크지 않다. 주인공이 파헤쳐가는 비밀이 평이하여 쉽게 예측 가능한 수준이며 중반부에 접어들면 이미 범인은 명확히 드러나고 뒤따르는 반전도 없다. 그러나 실망은 금물. 이 작품의 미덕은 오히려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여가는 인물 군상의 묘사에 있다고 생각된다. 근래 출간되는 소설들의 특징 중 하나가 선악의 문제보다는 욕망의 문제를 중요시한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 작품 역시 등장인물의 선악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각기 다른 욕망선의 교차와 그에 따른 갈등 속에서 개인의 선택만이 부각될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서술자의 역할을 하는 아리스톤과 히파소스보다는 오히려 피타고라스와 테아노, 에우니케가 중심 인물이 되어간다(소재과 배경의 형태적 유사성도 작용하겠지만 이러한 욕망의 충돌과 파국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내게는 후일담을 짧게 요약하는 마지막 한장의 에필로그가 인상깊었는데 욕망의 무상함과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 알 수 없는 운명의 힘을 분주히 떠오르게 하며 작품 전체를 다시 곱씹어보게 해주었다.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던만큼 더 눈에 띄게 되는 아쉬운 점도 있었다. 우선 분량의 제한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이야기 전개를 너무 서둘렀다는 인상이 든다. 그리고 이 작품의 미덕이라 할 인물 묘사가 너무 직선적이고 서술적이었던 점이 아쉽다. 간략한 서술만으로도 강한 인물상을 남긴 작가의 능력은 존경스럽지만 좀 더 많은 분량을 인물 묘사에 할애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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