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작과는 전혀 상관없는 작품에 대해서 말하고싶다. 편혜영의 <몬순>이 대상으로 뽑혔던 작년도 이상 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면서 이미 한 번 읽은 작품이었다. 정확히 작년의 3월 께였던 것 같다.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
요즘 단편에 대한 선입견같은 것이 있었다. 보기 좋지 못한 편견이라 해야 옳을 만한. 병든 세상, 병든 우리들, 눈이 먼 미아처럼 휑뎅그렁하고 척박한 우리에 떨궈져 우는 우리들.
그것을 쓰고, 읽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몇번쯤 이런 문학상 작품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김영하라든지, 박민규라든지, 신경숙이라든지, 기억에는 없지만 김중혁이라든지. 다 이런 문학상을 수상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혹은 이전부터 드러냈는지도. 그러나 지금 그들의 신간을 읽으면서 도무지 그들에게서 이 병적일 만큼 집요한 불명확성, 모호함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싫었다.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읽기시작했을 무렵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옳다고 믿기도 했다. 요즘 상은 지네들끼리 돌려받는거 아니냐며 이유없이 야유하고 김숨을 미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읽게되었다. 황정은이라는 이름을 접하고 혹해서 집어든 책에서 였다. 황정은에 대한 감상은 추후로 미루고, 이 형편없이 엉망인 감상 덩어리 글을 시작하게한 그 작품. 다시 만난 이장욱의 그 단편을 읽고 나는 그동안의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서두가 몹시 길었다.)
몇 번이나 읽었던 작품이기에, 흥미를 잃은 채로 습관적으로 장을 넘긴다. 그러다 넘길 수 없게 되었다. 갑자기 너무, 슬펐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 기린에 대해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건 순수하게 당신의 머릿속에서 태어난 당신의 기린이니까요.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그것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중)
이 말이 너무 슬펐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 1년동안 공부를 좀 더 했다. 꼭 1년 만큼의 공부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저런 공부를 할 수록 내가 미진했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질 나쁜 모욕과 비난을 던질 수 있었음을 알았다. 어느 나라, 어느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경멸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출처도 불분명한 이 말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런데도 몰랐던 것이다. 나도 그 인간임을. 그런 짓을 나도 이미 하고 있을 수 있단 사실을.
차츰 그 뜻을 알고 읽기 시작했다. 무식하게 읽을 줄만 알던 내가 조금씩 조금씩. 그러한 요즘에 이장욱의 기린이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대면하게 된 것은 마치 운명과도 같게 느껴진다.
알아가는 것의 기쁨을,
드디어 글에서, 사랑하는 소설에서 발견한 것이 못내 기쁘다.
내년 이맘때에는 같은 글에서 또 다른 기쁨을 찾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