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에 얽힌 비화는 아마 아는 사람은 다 알만한 사건일 터다.
지나친 사창가 출입으로 성병을 크게 앓고, 생식기능까지 잃은 게 분명한 M은 가난때문에 서른이 넘어서야 장가를 든다. 정확히 1년만에 아내는 자식을 낳고, M은 몇번이나 자신이 불구자인지 의사인 `나`에게 검사받으려 시도하지만, 결국 아내의 음행에 대한 의심보다 그것이 오해이리라는, 자신이 후사를 두고 행복히 가정을 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더 컸기에 진실을 알기를 거부한다. 반 년 후, 이 아들과 자신이 발가락이 닮지 않았냐고 `나`에게 묻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러한 줄거리의 속의 M이 바로 염상섭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 그 당시에 얼마나 파격적인 가십이었을지 짐작가지 않을 정도다.
M의 결혼 연령이 염상섭과 같은 32세라는 점, 구식 혼례를 올렸다는 점, 신혼 초부터 아내를 학대했다는 점, 젊었을 때 술고래였으며 가난했다는 점, 소설이 나오기 얼마 전에 염상섭이 아들을 보았다는 점이 일치하고 있다.
게다가 전후 관계는 불명확하나, 그 즈음해서 염상섭의 아내가 외도로 낳은 아들이라는 소문이 성행했다고 하니, 이런 소설을 문단에 써 낸 김동인을 향한 염상섭의 분노는 아마 어마어마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즉시 <동광>지에 김동인에 대한 공격문을 보냈으나 주요한은 지면에 실어주지 않았고, 대신 조선일보로 이 이야기가 새어나가 당시 문단을 충격에 빠트렸다. 지면 상에서 그들의 반박문과, 재반박문, 그것의 재반박문이 올라오는 등의 난잡한 일이 벌어졌는데, 김동인이 ˝똥은 들출 수록 구린내가 나는 법이니까 이런 글은 그만 쓰겠다˝고 종결해버리는 바람에 염상섭의 속이 아마 크게 뒤집어졌을 것이다.
(사견이지만, 예전에 염상섭이 그런 식으로 논쟁에서 퇴짜를 놓았던 것에 대해 김동인이 내내 꽁해있다가 이 기회에 득달같이 되갚아준 것은 아닐까 싶다ㅋㅋㅋ)
지극히 극소수의 사람으로 이루어져 진행되던 문단이었음에 이러한 치사스럽고 질척질척한 가십거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날 수 밖에 없었고, 결과론적으로 봤을때도 사소설적인 면모가 10년대를 전후로 하여 몹시 성행했다는 것에서도 그들이 소설 내용을 단순히 허구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자신의 이야기나 남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완전히 김동인의 탓만을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애초의 발단은 염상섭이었다. 김동인과 우애가 깊었던 시인 김억을 겨냥한 <질투와 밥>이라는 소설을 써 냈던 것이다.
간단히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시골 부자인 인텔리 청년이 상경하여 술과 계집으로 가산을 전부 탕진해 버리고는 처자식을 먹여살릴 계책으로 재산 많은 과부를 첩실로 들인다. 제 돈으로 남의 자식과 남편의 처까지 먹여살려야 하게 된 첩실은 자연 남편을 몹시 구박하게 되고, 그는 화가 나 미칠 요량이지만 처자식을 생각해 눈물을 머금고 그 구박을 참고 견디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정주에서 5백섬 추수의 부자 집안에서 태어난 김억이 문학을 한답시고 서울로 올라와 집안 재산을 다 거덜낸 뒤 부자 여자와 동거하던 당시 상황과 소설 내용이 몹시 흡사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실제로 염상섭이 김억에게 엿을 먹일 목적으로 쓴 것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김억이 노발대발하여 김동인을 찾아간 것이 <발가락이 닮았다>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염상섭과 김동인의 불화는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근대 문학사에서 최초의 논쟁이라고도 불리는 논쟁의 두 주인공이 바로 그들인데 <발가락이 닮았다> 사건에서 약 10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1920년 김환의 <자연의 자각>에서 비롯된 소위 비평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갑부 중에서의 갑부였던(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었다고도 하던 때) 김동인의 개인사에 대해 이와중에 간략히 소개하고싶다. 솔직히 본인은 김동인 보다는 염상섭을 꽤 좋아했던 사람이었는데, 김동인의 갑부질(?)을 생각해보면 괜히 정이 안 갔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덕에 김동인의 말년의 삶을 알았을 때 나는 충격이 몹시 컸다.
젊었을 적에 <창조>지를 사비를 털어 발간했을 만큼 그는 문학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을 뿐만 아니라 돈도 어지간히 많았다. 평양에서 가장 컸던 400평의 저택과, 서울에 올때면 호텔에 자리잡고 앉아 기생 수십을 데리고 놀던 그의 호사, 이따금 중국이며 일본을 너무도 쉽게 건너다녀 만들어진 `동인식 동경 산보`라는 말을 통해서도 정말이지, 돈이, 어지간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점차 빈곤을 향해 하향곡선을 그리게 된다. 이전같지 않은 삶에 우울증을 얻게 되고, 수면제와 최면제를 우울증 치료의 한 방편으로 복용하게 되었으며, 결국 경제적 파산의 끝에 마약에도 손을 뻗고 말았다. 약물중독으로 인한 고통 속에 아내마저 도망쳤다. 그는 이제 스스로 돈을 벌어야하게 되었고, 새로 아내를 맞이해 살림살이를 시작하자 원고료에 의존한 가난한 삶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광수나 주요한에게 원고료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몇번이나 보내기를 마다하지 않았으며, 순결하고 콧대높은 예술지상주의의 대표주자였던 김동인은 그렇게 비난해대던 통속적인 신문 연재 소설을 연재하게 된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운현궁의 봄>이다.
흰 담비 이야기라는 것이 김동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비춰준다. 그 흰 털이 조금이라도 더럽혀지는 것을 염려하여 더러운 장소에는 절대 가지 않고 사람에게 쫓기고 있더라도 차라리 잡히면 잡혔지 더러운 곳에는 가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 흰 담비는 만약 조금이라도 더러운 것이 제 몸에 묻는다면 자포자기한 나머지 더러운 곳에 스스로 제 몸을 굴려 자신을 더럽힌다고 했다. 그것이 마치 김동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렇게 그는 통속 작가로서 생을 연명하다, 말년에 가서는 총독부에 직접 찾아가 친일의사를 밝히는 삶에 크나큰 오점까지 남기게 되는데, 황군 위문길에 직접 따라기기도 했다. 그당시 약물 중독으로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던 김동인은 돌아온 뒤 심하게 앓았으며 기억상실증으로 인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글을 못 쓰겠으니 다시 시찰을 보내달라˝고 하는 둥, 일본의 패망 와중 친일작가단을 만들겠다고 졸라대는 둥의 촌극을 벌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내려온다는 소식에 김동인의 아내는 당시 약물 중독으로 중병이라 움직일 수 없었던 김동인을 두고 자식들과 함께 한강을 건넌다. 떠나기 직전 덮은 이불 속에 3만원을 넣어 두었었는데, 다시 돌아와보니 이불과 돈은 사라지고 없고 냉방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 그가 누워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구병모는 이 책의 그에 대해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친일은 어떤 경우에도 옹호나 용인을 받아서는 안 되며, 유복했던 그가 가산을 녹여 먹고 폭발적인 매문의 길로 접어든 것은 기생을 옆에 끼고 한량처럼 놀아났던 그 자신의 탓이다. 이는 단지 그를 `비운의 작가`라고 에둘러 마무를 수 없는 요인이다. (중략) 그간 넘치던 붉은 빛이 바래다 못해 안쓰러울 정도의 횡설수설과 자기변호가 전체 작품 세계에 씻지못할 얼룩을 남긴 셈이 되어서, 마치 짝사랑하던 상대의 적나라한 실체를 보았을 때 느낄 법한 배신감이 들었지만, 어쩌면 그의 존재는 지금 이 자리에서 글을 써서 살아가는 나를 반사하는 거울 같기도 하다. 매문인이 아니기 위해서, 얼마나 큰 본인의 노력과 자존심과 더불어 사회문화적 기반과 운명의 협조까지 필요한가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된 지금은 말이다.
그의 개인사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자 했더니, 글자는 그에 반해 너무 많고, 그의 삶은 너무도 미진히 소개가 된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반 평생의 라이벌이기도 했던 염상섭의 대표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읽고서, 그에게 용감히 찬탄과 환호를 보냈던 그당시의 자신만만한 김동인을 가끔 만날 때면, 광복 후 자기 변호와 자기 분열로 횡설수설하던 그의 작품과, 비틀려 말라버린 고목과도 같았던 그의 마지막이 떠올라 조금 감상적이게 되곤 한다.
많이 돌아와서, 김환의 <자연의 자각>에 대해서 염상섭 뿐만 아니라 김동인도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창조>지의 동인이었던 김환을 김동인은 영 탐탁치않게 여겼는데, 어찌되었건 간에 같은 <창조>의 일원인 김환을 향한 염상섭의 공격에 그는 책임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당시 <폐허>의 염상섭은 써낸 작품도 없는 논객에 불과했으나, 김환의 소설을 향한 그의 비평이 인신공격에 까지 이르르는 다소 과한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더러, <창조>지를 저격하는 듯한 의도가 느껴졌기 때문에 김동인은 더더욱 자신이 나설 필요성을 가졌다.
˝형편없는 소설˝이지 않냐며 ˝내가 전에 무슨 소설을 <학지광>에 기고했는데 김환이 몰서하였기에 그는 얼마나 잘 쓰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꼴이다˝라는 식의 인신공격이었다.
김환의 소설의 허술함을 인정하면서도 김동인은 비평에 인격을 개입시켜선 안 되며, 소설의 기법적 측면의 해석을 통해 남이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 비평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염상섭은 어떻게 소설을 읽고 비평하는 것에 해석만 있고 평가가 빠질 수 있느냐며 작가의 성격, 사상, 이력 등을 판단하고 평가해야한다는 식으로 반박했다.
그리고 잇따른 김동인의 재반박글에 소위 `너랑은 말이 안 통하니 니가 뭐라하든 이제 신경 안 쓸거임ㅂㅂ`라는 식으로 나옴으로써, 기나긴 두 문학계의 거목들 사이의 불화의 씨가 뿌려지게 된다.
p.s.1 이같은 비화를 제쳐놓고 보자면 <발가락이 닮았다> 자체는 꽤 재밌고 괜찮은 글이었다. M이나 `나`의 심정에 확 몰입할 수 있어서 (누구누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읽어서 그런가) 나름 흥미진진하기도.
p.s.2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 당시 작가는 현진건이다. 조금 뒤로는 채만식. 하하하하하하사실 별 관심 없는 작가 둘인데하하하하하지금 시간이 몇시야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