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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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 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것은 어쩌다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속은 기분이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은 이런 소설이 아니었다. 스웨덴. 북유럽의 무료한 감정을 덤덤히 그려내서, 건조한 느낌이 들지만. 그의 소설은 유머가 넘쳤다. 이야기 전개가 느렸지만 소소하게 미소 지을 부분이 넌지시 내비칠 수 있는 작가, 그가 프레드릭 배크만이었다. <베어타운>은 그의 전작과 완전히 다른 결의 소설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읽었을 때는 동명이인인가 싶을 정도로 다른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프레드릭 배크만이란 작가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내게 선물해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속은 기분이라며 읽었지만, 속임을 당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알던 프레드릭 배크만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키는 한심하고 별 의미 없는 스포츠다. 우리는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거기에 몇 년의 세월을 바친다. 스포츠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게 이해가 안 될 만큼 사소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초월을 느끼는 몇 번의 순간들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불사르고 피를 흘리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인생에 또 뭐가 있을까.

 

이 책은 어느 작은 소도시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끔찍한 비극을 둘러싼 이야기이자, 하키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이 서로에게 혹은 스스로가 상처를 주고 또 받은 이야기다. 마을의 희망이자 열망 그 자체였던 존재가 더럽혀진 것이 대한 이야기다. 하키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베어타운은  쇠락해가는 마을이다. 그 저물어가는 마을에 열정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하키"다. 모든 것이 용인되고, 승리 앞에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베어타운의 공동체는 정말 끈끈함 그 자체다. 하지만 3월 어느 토요일에 있었던 두 개의 사건이 "베어타운"에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희망은 마을 전체가 느끼고 공유했지만, 절망은 소수의 사람만 느꼈다는 그 사실을 글로 읽어가며 마음이 아팠고, 동시에 서늘해졌다.

 

세상에는 왠지 모르게 상처가 되는 것들이 많다. 불안감은 내면의 인력과도 같아서 영혼을 쪼그라뜨린다.

 

하키가 삶의 전부이자, 살아가는 이유인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잠깐 동안 보험을 판매하며 하키와 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그의 삶은 자신의 피를 끓게 만드는 아이스링크장으로 이끌었다. 얼음판에서 서걱이는 소리를 내고 승리에 대한 강한 투지를 불태우며 그는 이 마을의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을 지도하고 있다. 모두가 그에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지만, 그 불가능에 망설임 없이 도전했고, 수많은 고통이 따라왔지만 결국 그는 훌륭한 멤버들을 모았고, 그 멤버들이 팀을 이루는 성과를 냈다. 그리고 최강자 아이스하키 청소년 대표 팀과 경기를 앞두고 있다. 그에게 하키는 삶의 전부였다. "그때 나이가 고작 네 살이었지만 하키는 그에게 완벽한 몰입을 요구할 거라고 지체 없이 선언했다. 그는 그래서 좋았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아이스하키는 무료할 수 있는 인생에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생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것 자체였다. 이 남자의 이름은 페테르다. 하지만 그의 삶에 아이스하키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의 삶에는 아이스하키를 좋아하는 레오와 아이스하키를 사랑하는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딸 마야가 있었다. 하키와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자녀들과 함께 베어타운에 머물며, 그는 자신이 온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을 찾은 행복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3월 어느 토요일 전까지는 말이다.

 

이런 그에게 말도 되지 않는 일이 고작 일주일 사이에 벌어진다. 사건만 두고 본다면 하루에 행복과 불행이 동시에 오간다.


그가 이끈 청소년 대표 팀이 승리한 것이다. 그의 도전이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고, 베어타운에 하키에 대한 사랑과 활력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마을의 스타가 되었고, 승리의 기분 좋은 여운이 마을 곳곳에 스며들었다. 승리만을 바라보았던 학생들은 이길 수 없다고 모두가 생각한 경기에서 승리한 짜릿한 감동을 맛보았다. 문제는 이들이 승리를 했지만, 그 승리를 위해서 훈련받았던 과정에서 용인될 수 없는 폭력적인 생각이 거리낌 없이 오갔다는 것이다. 이기는 방법이자, 이기는 생각이라는 명목하에 굉장히 잔인한 생각이 공유되고 있었다. 이 생각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했고, 어느 정도 받아들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술과 폭력, 섹스와 같은 단어가 거칠게 오가던 아이스하키팀의 에이스가 결코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저지르고 만다.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이 두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폭력이 벌어지고 만다. 그리고 피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바로 내지 못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왜냐면 여긴 빌어먹을 하키 타운이니까."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무력감과 고통을 느끼지만 이를 말할 수 없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 하키팀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보다 가해자인 하키 선수의 편이란 걸 열다섯 살 소녀는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야가 겪었던 일은 머리로 넘길 수 있는 일도 아니었고, 넘겨서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칠 틈도 없이 마야의 마음과 영혼을 순간순간 파고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밤 이 아이가 빼앗긴 수많은 것들 중에는 절대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공간도 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그런 공간이 있지만 도둑맞으면 다시 되찾지 못한다. 마야는 앞으로 모든 곳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 문장이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이 문장은 베어타운에 살고 있던 마야에게 현실이 되고 만다. 그리고 일주일간 견디려 몸부림쳤던 마야는 결국 입을 연다. 눈을 감고서 입을 열고 말을 한다. 하기 쉽지 않았던 그 모든 것을 전부 이야기한다. 자신의 딸이 겪은 이야기들. 그 모든 것을 듣고 페테르의 삶은 달라진다. 하키를 정말 사랑했고, 베어타운을 아꼈던 그의 생각에 균열이 일어난다. 아니 시작은 마야에게서 시작했고, 그 균열이 서서히 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으로 파고든다.

 

그들은 적을 원했다. 이제 적이 생겼다. 그런데 그들은 딸아이의 곁을 지켜야 하는 건지 아니면 그녀를 해친 사람을 추격하러 나서야 하는 건지, 그녀가 살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책임지고 적의 숨통을 끊어야 하는 건지, 그 둘이 같은 게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다. 증오가 그 반대말보다 훨씬 더 쉽다.

부모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교차적으로 서술했기에 <베어타운>은 인물 소개를 꼭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헷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어렵지 않으나 많은 사람의 생각과 이야기가 거의 같은 밀도와 비중을 가지고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완료되지 않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이스하키 팀의 승리 그리고 그들에 대한 영웅 대접에서 마야가 당한 끔찍한 폭력 그리고 이 폭력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들까지. 그 생각을 드러내는 와중에 오가는 사람들의 많은 말들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면, 바로 아래 문장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 사회에서 허용하는 대로 하지."

 

<베어타운>이야기를 정통으로 관통하고 있는 이 메시지는 무섭고 서늘함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 일이 베어타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베크만은 그것이 옳은지 나쁜지 그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던지고 그는 문제만을 정확하게 말한 뒤 글 속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다. 역시, 실망을 안겨주지 않는 작가였다.

 

 

이 소설은 포근한 표지와 달리 서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커다란 사회 문제로 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좋다. 그저, 내가 저지른 잘못을 좀처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 탓하는 게 익숙했던 사람들이 작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이야기다. 좋은 소설은 어떤 각도에서 어느 정도 밝기로 비추었을 때도 그 가치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작품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주제의식이 커다랗기도 하고 동시에 작은 것이기도 해야, 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과 각도로 글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트라이트처럼 강렬한 조명을 받을 때도 빛나고, 은은한 스탠드 속에서도 그 가치를 내는 소설. 표현하기 어렵지만, <베어타운>은 좋은 소설이었다. 프레드릭 베크만이 유머러스한 작가만이 아니라 이렇게 멋진 소설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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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인문학 - 색깔에 숨겨진 인류 문화의 수수께끼
개빈 에번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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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을 다양함으로

 

 

 

 

빨강. 주황. 갈색.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분홍. 흰색. 검정. 금색

 

내가 색깔에 관심을 가진 계기를 떠올려 보면, 물건 하나가 생각난다. 바로, '팔레트'다. 1학년 때 사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썼던, 분홍색 팔레트. 초등학교 때 새 학년이 시작되기 직전에 팔레트에 물감을 쭉 짜서 잘 말려두었다가 물과 섞어서 색을 만드는 걸 좋아했다. 다 마르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 쿡쿡 건드려서 내 지문을 물감에 남기고 손에는 각양각색의 점들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물감 자체도 좋아했지만, 모든 것을 다 비치는 물이 색과 닿으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는 것이 신기했다. 물감을 좋아했지만, 흰 도화지의 빈 여백을 내 마음대로 채우는 건 꽤 어려워했던 게 좀 이상하지만. 그래서 좋아하는 게 그림을 잘 그리거나 좋은 색감을 키우지는 못했지만. "색깔"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올 정도로. 어린 시절 팔레트와 관련된 추억은 생각만으로 기분 좋게 만든다.

 

『컬러 인문학』은 내 분홍색 팔레트 안에 자리 잡았던 빨강, 주황, 갈색,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분홍, 흰색, 검정과 내 팔레트에는 한 번도 담기지 않았던 금색을 포함해 11가지 색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11가지 색이 우리 곁에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남아 있었는지 하나하나 들려준다. 그 시작은 색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다. 익숙한 구분 기준 중 하나인 무지개색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빨주노초파남보"를 떠올리지만, 과거엔 달랐다. 문화권에 따라 색에 대한 표현도 달랐고, 어느 문화권에서는 무척 익숙한 색이 누군가에게는 "과일"이 존재하기 전에 명명되지조차 않았던 색이기도 했다. 문화마다 친숙하게 느끼는 색이 달랐고, 존재 의미가 달랐다. 저자는 그 '다름'의 간격을 이야기로, 150장의 이미지로 촘촘히 메워 『컬러 인문학』으로 완성했다.

 

가장 오래된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에서 시선을 끄는 "빨강"으로 시작한다. 빨강을 하면, 태양, 불, 정열, 피 등 다양한 것이 떠오르듯이 하나의 색은 다양한 의미로 사람들과 함께 공존해왔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특히, 색이 지역과 공간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특히 인간이 만든 사상, 이야기 등과 만났을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빛깔을 내며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색의 의미를 알아가며 색뿐만 아니라 다른 시공간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서 뜻깊었다. 예를 들어 노란색이 중국에서는 황제들을 상징하는 색이었다면, 유럽에선 차별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색이 문화권에 따라 다른 의미와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걸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11가지 색중에 목차를 보고 가장 궁금했던 색은 바로 "주황색"이었다.

우리는 주황. 붉은 황금색이라는 예쁜 뜻을 가지고 있는 "주황"은 영어로 ORANGE. 과일 이름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주황색에 대한 콘텐츠가 적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뒤섞인 채 읽었다.

 

"오렌지"라는 말은 "향긋하다"를 뜻하는 인도 남부의 고대 드라비다어에서 유래했다. _44쪽

 

주황색은 영어 이름이 오렌지라서 그런지 상큼하고 향긋한 느낌을 준다. 또, 금잔화처럼 향긋한 내음을 담고 있을 것 같은 색이다. 그래서인지. 네덜란드에서 주황색은 기분 좋은 축하의 색이다. 평창 올림픽에서 네덜란드 선수단의 옷과 경기복에 주황색이 빠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황색은 네덜란드 역사의 영광적인 순간과 깊이 닿아있다. 하지만, 주황색이 유럽 내에서 익숙한 색이 아니었던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네덜란드 국기를 보면, 주황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검소하고 생활력 강한 네덜란드 국민성과 연결 지어 이야기한다. 주황색이 아무리 높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좀처럼 만들기 쉽지 않은 책이다. 주황색을 만들 수 있는 식물 염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네덜란드는 주황색과 비슷한 빨간색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네덜란드 국기에는 빨간색과 흰색 그리고 파란색이 담겨 있다.  이렇게 주황색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빨강 머리의 연장선으로 주황색 머리칼이 가지는 의미 그리고 동남 아사아에서 볼 수 있는 스님들의 옷 색과 연관성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한다. 주황색이 다른 색들에 비해서 역사가 길지 않아서일까? 내용이 적지만, 지금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컬러 인문학』은 색과 관련된 (영어) 표현들도 함께 소개한다. 언어를 통해 색이 어떻게 당시 시공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했는지 이야기했다. 그중에 초록색과 파란색에 대한 표현이 눈에 띄었다. 두 가지 색은 우리나라 말에서도 잘 구별되지 않는 편이다. 푸른이라는 의미로 초록색과 파란색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서양에서도 초록색과 파란색을 구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서양에서 파란색의 어원을 살펴보면 검은색과 초록색에 있었다. 또 중국에서도 색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파란색을 사랑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이집트다. 이집트인들은 파란색을 좋아했으며, 그 이유를 청금석에 대한 접근이 용이했든 환경적 요소를 꼽기도 한다. 파란색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색이지만, 우울하다는 의미에서 파란색을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육체노동자를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역시, 색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세 시대 아름다운 파란색을 구하기 어려웠던 유럽에서는 파란색을 고결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특히 샤르트르 블루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에서 파란색은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색의 정의로 넘어오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배우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색을 정의하고 색과 관련해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데서 벗어나 상징의 세계로 넘어가면 연상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색은 피와 깊이 연관된 빨강, 고결하고 순결한 의미와 연관된 흰색과 같이 어떤 문화권이나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컬러 인문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동양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색의 상징이 서양권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보편적으로 합의된 색의 의미도 존재한다. 오랜 시간 색과 관련된 역사는 축적되어 왔다. 그리고 그 안에 한가지 색의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자리해왔다. 그렇다면 다양한 색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게 된다는 것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다양해진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저자 개빈 에번스는 이렇게 말한다. "피, 불, 순결, 죽은, 삶을 상징하는 특정 색의 영원한 의미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머지 색도 눈에 들어온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색 인식은 문화의 우연한 산물일 뿐이다"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색의 다양한 의미에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하나 깨부수고 좀 더 다양한 색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여는 것이 『컬러 인문학』을 완성한 저자의 목적이었다.

색의 역사를 통해
"당연함"이 "다양함"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다채롭게 표현한 『컬러 인문학』.
딱 내 스타일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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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희의 밥과 숨
문성희 지음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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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을 먹는다.
나이를 먹는다.

 

나이와 음식에 "먹다"라는 동사를 붙은 이유는 두 가지 다 나의 존재 속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이다. 어딘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그냥 흘러가지 않고 내 몸속에, 내 마음속에 분명히 남는다. 그렇기에 음식을. 나이를. 잘 먹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먹는 것 가운데 하나를 제대로 먹기도 쉽지 않다.

 

《문성희의 밥과 숨》은 먹기와 숨쉬기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이다.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이 참 많지만, "진짜 중요한 것"만 남기고 소거해나가면 "먹기"와 "숨쉬기"만 남는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데 저자의 글들을 읽다 보면,  음식을 잘 먹었을 뿐만 아니라, 나이를 잘 먹은 사람의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먹는 것과 이를 만드는 것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치열하게 고찰했던 저자의 삶 자체가 글 속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글에 시간의 흐름이 오랜 고목의 나이테 같은 고아한 흔적으로 남아있는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그 당연함이 소중해진 때이기에, 《문성희의 밥과 숨》 속 글을 읽는 시간은 즐거웠다.

 

"먹는 목적을 오직 존재함에 맞추면 삶이 정렬되고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공간 사이로 스며드는 영혼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은 참으로 달콤하다."

 

나의 숨결을 헤아리고 한 그릇의 밥을 먹는 걸 실천하는 것이 '절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인, 저자는 먹는 것 하나하나를 남다르게 들여다본다. 그 하나하나가 나를 만드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재료 하나하나를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요리할 수 있을까 생각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조리하고 반찬 없이 밥을 먹을수록 커지는 사유의 힘"을 얻는 즐거움이 컸기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먹을 때 느끼는 즐거움도 크지만 음식을 통해 나의 존재를 들여다볼 때 느끼는 기쁨을 느끼는 것이 주는 즐거움도 그에 못지않게 컸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100% 동의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이 무엇인지 더 알아보고 싶어졌다.
 
"아무쪼록 너희들이 내 몸속에 들어와 세포를 이룰 때 나의 욕망이나 에고가 개입되지 않기를. 너희들의 본성인 사랑의 빛을 가리지 않기를. 그렇게 너희의 죽음이 보람되기를"

 

먹을 때 느끼는 즐거움을 뒤로하고, "진정으로 존재하는 때에 느끼는 즐거움"이 삶의 종심이 된 과정이 어땠는지 말이다.

 

"전복은 솔로 박박 문질러 씻은 뒤 내장을 따로 떼어내 모아서 오분자기와 함께 젓갈을 담글 때 쓰고, 전복 등에 사선으로 잔 칼금을 넣어 비슷한 방법으로 손질한 갑오징어와 대하를 김 오른 찜 솥에 살짝 익혀낸 다음 졸아든 산적 국물을 솔로 발라가며 석쇠에 구운 이들의 맛은 특별했다."

 

역시, 저자도 쉽지 않았다. 고기를 포기하는 것이 쉬웠다는 말에 미간이 살짝 움직였다. 그 뒤에 어패류를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맛깔스럽게 설명한 문장을 읽으며, 저자 역시 보통의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 어쩌면 보통 사람들이 "삶의 희열"을 느끼기 위해 음식을 내려놓기보다 더 힘든 과정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연구가였던 저자에게 "맛있는 음식"은 일반 사람들 보다 더 놓을 수 없는 가치였을 것이다. 자신의 요리 철학이 대다수의 요리사들이 가지고 있던 패러다임과 조금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음식을 만드는 것과 "맛"은 분리할 수 없는 그 자체처럼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맛'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수많은 요리 과정을 거치는 점과 우리 삶이 닮아 있음을 발견한다. 행복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너무 많은 관계를 맺는 데, 장작 그 속에서 나의 행복은 멀리 달아나버린다. 혹은 순간순간 조금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가볍고 단순한 살아가는 순간이 주는 희열"을 잃어버리게 된다. 저자는 요리에서 이 깨달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음식 과정을 단순화하고 재료 자체에 집중하면서 "본연의 삶이 주는 즐거움"에 오로지 집중한다. 그렇기에 이는 인내, 수행, 절제가 아니라 삶 그 자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러한 삶을 선택하도록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삶을 살아내면서 얻은 힘이 나머지 생을 살아가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뿐이다.

 

그렇다면 그 깨달음을 저자가 얻을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 계기에 대해 어렴풋 가늠할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죽음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듯싶다. 젊은 시절 저자가 겪었던 인생의 고락은 저자가 생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아프고 슬픈 과정"이었다. 음식의 묘사와 달리 감정으로 남은 기억을 옅게 스케치하듯 쓴 글이 "슬픔의 깊이"를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금 삶의 자리로 돌아오기로 결단한 저자는, 오늘의 삶까지 이어오게 되었다.

 

"인생은 마라톤이야. 빨리 달리는 것보다 완주하는 것이 더 중요해. 사람들에겐 각자의 속도가 있는 법이란다. 엄마도 늘민하다(어리석다), 늦되다, 뒤숭스럽다(야무지지 못하다)는 말을 들어왔지만 목적지를 눈앞에 두고 있잖니. 슬픈 일이 있더라도 너무 심각할 필요는 없단다.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몰입되지는 말거라. 이 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이야. 신발 끈을 단단히 묶고 달리되 초반에 너무 많이 힘을 쏟지는 말거라. 지치지 않고 완주하려면 속도를 조절하고 자기 자신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단다."

 

하지만 저자는 한 개인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부모였고, 엄마였다. 슬픔에 젖어 다시 열심히 살기로 결심했지만 그 방식이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달랐다. 이를 어린 딸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저자도, 딸도 쉽지 않은 시간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저자는 슬픔 이후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었고, 큰 도움이 되었다고 했지만, 딸도 그 시간 동안 엄마와 비슷하면서 다른 무언가를 얻은 것 같다. <디 아워스 The Hours>를 보고,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되었어."라고 하는 말과 엄마의 지난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에, "고군분투하느라 수고했어, 우리 엄마."라는 말속에서 "그 무언가"가 전해졌다. 그리고 그런 딸에게 삶 전체를 통해서 얻은 것을 고스란히 전하는 저자의 마음에 내 마음이 덩달아 따뜻해졌다.

 

요리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을 따라가다 보면, 배가 고플 수밖에 없다.
그때 만들어 먹으면 좋을 음식 20가지가 책 뒤에 나온다. "몸의 해독과 마음의 휴식을 위한 문성희의 죽 10가지"와 "오감을 깨우고 영양도 풍부한 김솔의 혼밥요리 10가지"다. 맛있는 음식을 놓을 수 없는 난 조금 더 맛있어 보이는 김솔의 혼밥요리가 더 좋아 보였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역시 책 한 권으로 생각을 바꾼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나와 같은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꽤 길게 단순하게 먹는 삶에 대해 글로 읽었으면서, 바로 맛있는 걸 찾는 그 모순을 말이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을 것 같다. 그래서 20가지 요리법이 책에 함께 있다. 맛있는 묘사에 고픈 배를 채우는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문성희의 밥과 숨》 속에 짙게 담긴 있는 생각을 실천해보길 바라는 의도가 담긴 요리법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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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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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걸음을 따라서

 

 

 

좋았다.
이상한데, 알 수 없는데 좋았다.

 

『왕국』은 신기한 소설이었다. 이야기가 읽다 보면, 낯설게 어느 순간 훅 들어가는 묘한 매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주인공 카레르는 작가다. 그리고 동시에 기독교인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종교성은 그의 글이 이리저리 휘둘리듯 움직이듯 움직인다. 종교에 거리를 두지만, 그가 둔 거리를 한순간에 가까이 끌어당기듯 다시 그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마치 조시마 장로가 한순간 기독교에 귀의했듯이, 카레르도 어느 순간에 훅 기독교의 인의 삶으로 들어간다. 그의 계기는 더 이상 작가로 삶을 살 수 없는 순간에 직면했다고 느꼈고 그 임계치에서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대모"의 인도로 기독교의 세계로 들어간다. 성경을 묵상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예배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이때 태어난 아들의 이름까지 종교성이 짙은 이름으로 택했다. 아들의 이름이 이러할 정도이니, 그가 결혼을 결혼식을 한 것은 당연할 것이다. 정말 마치 기독교인으로 삶을 "신실하게" 살았다. 이렇게 신실하게 종교에 깊이 심취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과거에 내가 신앙인으로서 가봤던 이 길을, 이제는 소설가로서 가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가로서? 난 아직은 알 수 없다. 명확히 선을 긋고 싶지는 않다. 타이틀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일종의 조사원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이대로, 영원할 줄 알았던 카레르의 삶은 어느 순간 종교에서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는 기독교에서 스스로 멀어져 있다고 믿지만. 그의 삶 주변에 기독교가 가까이 있기에 삶의 영역으로 들어올 여지가 있다. 그리고 그 여지는 "글"이 되어 나타난다. "작가"로 삶을 살아가는 카레르에게 어쩌면 그 어느 순간 당면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엔 자신의 경험이 대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나의 생각을 번번이 빗나갔고, 그의 글은 역사 다큐멘터리 혹은 재연 다큐멘터리를 따라가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의 글에는 흡입력이 있었다. 처음에 맨 처음 그가 기독교의 세계에 빠져들었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작가로서 모든 것을 상실했을 때 그가 위로받았던 감정의 조각들이 엮어진 글들과 달리. 이때의 글에는 지난날의 기억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또 다른 감정을 일으키는 것에 솔직하게 글을 작성한다. 그 솔직함이 글 자체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글로 상세히 묘사한다. 마치 그의 글이 고고학자의 붓처럼. 섬세하게 글이 지나간 자리에 바오로(바울)와 루카(누가)가 지나간 자리가 만든 흔적이 하나둘 나타난다. 내가 성경책에서만 보았기에,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말이다.

 

카레르는 두 사람 가운데 루카에게 끌린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의사였다. 그 사실 외에 거의 밝혀진 바가 거의 없지만. 사울에서 바울로 거듭난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 바오로가 아닌 루카에게 끌린 이유가 처음엔 와닿지 않았다. 그는 작가이기에 아마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바오로에게 본능적으로 끌릴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루카의 이야기가 궁금한 것이 아닐까. 바오르와 동행하며 그의 주치의로 기독교 전파의 여정을 함께한 루카는 과연 바오로와 어땠을까? 루카가 왜 바오로에게 끌렸을까. 그는 단지 루카의 삶을 밝혀내거나 재구성하고 싶어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랬다면 그는 철저히 그들의 삶에서 멀리 떨어져 관찰을 했을 것이다. 루카의 삶에 카레르는 자신을 동일시한다. 시간의 거리가 있지만,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함을 가지고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1세기가 그 어떤 시대보다 종말론적 믿음들로 요동쳤던 때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이스라엘은 아마도 그랬을 거였다. 하지만 제국이 그 힘이나 안정성에 있어서 절정에 달해 있던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는 루카 같은 사람이 속해 있던 세계에서는?
나는 잘 모르겠다.

 

작가의 생각을 따라서. 그의 생각이 의도한 바를 따라가며 느꼈던 궁금증은. 왜 루카가 기독교의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누가복음"이라는 사복음서 가운데 하나를 작성한 것일까.라는 질문들이었다. 성서를 작성한 사람들은 보통 남다른 삶을 살았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신약이 아니라 구약만 보아도. "모세", "여호수아", "다윗 왕", "솔로몬 왕" "수많은 예언자들"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남다른 삶을 살아왔고 그 과정 중에 자신과 신의 마주침을 글로 작성해냈다. 카레르는 "루카가 기독교를 믿게 된 한 명의 신자이자 예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당대에 이를 증거하는 증인이었다. 동시에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고, 동시에 당대의 일을 가까이서 관찰했던 관찰자였다. 카레르는 소설가인 자신의 삶을 당대의 일을 관찰한 것을 기록으로 남긴 루카의 행동과 일치 시킨다. 그 이유는 루카가 단지 신앙을 따르거나 종교적 측면에서 맹신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루카가 의사였고, 동시에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의 삶을 추적하며 그가 다양한 초기 기독교의 기록물을 통해 자신의 글을 완성한다. 이 점이 중요하다. 루카는 당시에 많이 배운 사람이었고, 글에 자신의 삶이 묻어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카레스는 누가복음이 다른 글보다 "세련되었고, 완성도가 높다"라고 평가한다. 사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카레스는 그의 글 속에 루카의 고유한 관점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재미있는 점은 그 모든 걸 2천 년의 시간을 넘어서 한 사람의 글 속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거리를 "간격"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간격내에 축적된 다양한 관점과 자료를 통해 “더 많은 시점”으로 이를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루카가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 들여다보았지만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여 "객관성"을 견지한 자신의 글을 완성했듯이 말이다. 카레르는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장이 가지는 위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조사원"이었다. 그런데 중간중간 루카의 삶과 자신의 삶을 동일시 한 점은 흥미롭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은사들은 아주 좋은 것이긴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단 하나의 은사, 다른 모든 은사들을 뛰어넘는 은사는 그가 아가페라고 부르는 은사라는 거였다.

 

처음에 『왕국』을 읽으며 기대했던 것인 기독교가 왜 313년에 공인받을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많은 박해를 받았으면서. 어떻게 로마인들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할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었다. 다신교 사회에 살았던 사람들 마음에 무엇을 움직인 것일까. 그 사실을 『왕국』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기독교가 그 당대에 얼마나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음"으로 "소망"으로 그리고 "사랑(아가페)"으로 존재하는 그 실체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낸다. 교회에 나가서 카레르처럼 종교에 어느 순간이 심취했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 그리고 그다음에 느끼는 "공허함"이 주는 것을 자신의 사례를 통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삶의 전반에서 반복된다는 점이다. 카레르는 성체를 받을 정도로 기독교를 진심으로 믿었다. 성당에서 느낀 말로 다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는 느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순간이었고 그 이후로 순간순간에 그는 "회의감"을 느꼈고 그 과정을 루카에게서도 찾을 수 있었다. 믿음의 순간과 그 이후에 오는 내적 고민이 말이다. 이를 포착해난 카레르는 그의 인간적 면모에서 자신가 닮은 모습을 보인다. 단지, 교리적으로 종교적으로 하나의 믿음만으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에서 개인이 마주할 수 있는 감정과의 충돌을 포괄했던 점이 좋았다. 그리고 그 충돌에서 놓치지 않았던 것. 끊임없이 마음에 작은 감정의 불을 켜고 있었던 건 "사랑"이라는 점이 진부하게 보일 수 있지만 진부하지 않았다.

 

이미 다 읽은지 시간이 되었지만 내가 『왕국』을 제대로 읽고 있는 건지. 읽은 건지 의심스러웠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이 정말 많아서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읽고 나서, 재미있다는 걸 느꼈으니. 좋았다는 감정을 느꼈으니 좋은 게 아닐까 싶다.


무언가 확정적으로 무엇을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나는 모르겠다"라고 미지로 남긴 말 하나 때문이 아닐까? 사실 그건 핑계다! 그가 이 마지막 문장으로 이 장대한 이야기의 마침표를 남겨서 좋았다. 『왕국』과 가장 잘 어울리는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마지막이 주는 여운을 카레르처럼 솔직하게 남길 마음과 글솜씨가 나에게 부족하기에. 그의 문장에 기대에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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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1 카이스트 미래보고서 - 카이스트가 내다본 미래세계.미래교육
카이스트 지음 / 김영사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미래가 요구하는 새로운 대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미래 교육과 인재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매킨지의 <미래예측 보고서>는 근 미래의 사회가 4개의 강대하고 파괴적인 힘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보고서는 경제의 중심 이동, 기술 발전의 가속화(테크놀로지 임팩트), 세계적인 인구 고령화, 무역·자본·사람·정보의 흐름(거세지는 플로) 등으로 4개의 힘을 정리했다. 지금이야말로 직관력을 리셋해야 할 때라고 보고서는 강조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 "AI", "블록체인", "생명공학" 등 다양한 기술들이 개발되고 있으며, 과학혁명은 점점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해를 일반 사람들이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안타깝게 이 기술 변화에 대해 "잘 모른 채로 있을 수 없는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정보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시대에, "무지"를 택하는 건 굉장히 큰 용기가 필요하다. 길고 장황하게 이야기 했지만, "미래 과학 기술"은 알아야 하는 필수 지식이 되었다. 그 필요성에 동의한다면, 조금 쉽게 이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내가 찾은 답은 간단했다. 이를 가르치고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새로운 과학 기술과 세계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야 할 곳은 산업현장과 교육현장이다. 학생인 내 입장에선, 산업현장의 목소리보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알려줄 이야기가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떠올린 학교는 "카이스트"였다.


카이스트를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미래를 준비하고 설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란 점이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최고의 싱크탱크이자 세계적 석학과 글로벌 리더들의 산실인 카이스트는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준비 과정에는 미래에 대한 분석과 예측이 담겨 있을 것이고, 이를 위한 대응 전략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예상은 《2031 카이스트 미래 보고서》를 읽게 했고, 나의 호기심을 채우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미래 세계와 한국: 미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미래를 대응하기 위해선, 미래를 잘 예측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래에 대해 어떻게 규정하고, 미래의 대한민국 모습을 예상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발전해나갈 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는 형식으로 첫 장이 구성되어 있다. 세계적인 기관과 포럼에서 제언한 "미래"에 대해 카이스트는 사회, 과학기술, 환경, 인구, 정치, 경제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다. 과학기술을 선도하는 대학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분과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과 달랐다. 기술이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이 기술이 어떤 사회에서 상용화되며, 기술과 그 기술이 불러올 변화까지 종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술 자체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기술과 연관관계를 맺고 있는 영역에 대한 이해를 종합한 "미래세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며 내용을 시작한다. 물론, 내용 가운데 일부 내용은 점점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고 있고, 어떤 것은 여전히 먼 미래의 "예측 시나리오 중 하나"로 존재한다.

 

미래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기초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이었다. 새로운 기술인 인공지능, 바이오 사이언스, 생명 공학 등의 분과가 떠오르고 있기에 발전가능성이 높은 학문이나 기술, 공학적 측면이 강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스트는 미래 과학 기술의 핵심일 "기초과학과 공학의 균형"으로 정의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과학은 기술을 낳았으며 기술은 새로운 도구를 만들어서 과학적 탐구와 창조를 도와줬다. 문명은 사회·정치·문화·경제의 영향으로 발전했다가 쇠퇴하기도 하지만, 과학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길을 걷는다. 기초과학은 그것 자체가 존재 이유이다."

 

"첨단 산업일수록 더욱 근본적인 과학의 기초지식을 필요로 한다"라는 이야기는 과학과 기술, 공학을 바라보는 일반인의 시선에서 놓칠 수 있는 부분을 잡아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 의미에 대한 고찰을 "인문학"이하고 있듯이, 기초과학은 그 자체가 기술과 과학의 뿌리로서 단단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주장을 설득해나가는 과정에서 인문학의 필요성을 말하는 논리와 닿아 있어서 더더욱 와닿았던 부분이었다.

 

기초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만큼, 새롭게 떠오르는 주제가 바로, "융합"이다. 지식의 전문성에 따라 (기초) 과학, 공학, 기술의 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하나의 단독 학문 분과나 기술만으로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역이 부딪침에 따라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고, 새로운 지식이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미래 학문의 핵심이 될 뇌과학과 공학은 (기초) 과학과 연계를 통해 새로운 발전을 이룬다고 예상하고 있다.


뇌과학 영역은 다른 과학 기술 영역 가운데 가장 많은 "?"를 안고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지의 뇌가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내리는 의사결정은 뇌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뇌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인문사회 분야의 의사결정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뇌를 통해서 사물을 인지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판단하고, 분석하고, 생각하면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인간 행동의 출발점이 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뇌에서 벌어지는 일이 인간을 규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기에, 뇌과학은 '인간'과 그 주변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의 핵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탐구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앞으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는 미지를 넘어 미존을 추구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라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남들이 정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즉 문제 해결 중심이었다. 이제는 문제를 정의하여 제시하는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뇌과학 영역만 보아도, 우리가 앞으로 주목해야 할 영역은 "미지"와 그 미지의 것이 만들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미존"이다. 카이스트 미래 보고서는 미래에 대한 분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까지의 패러다임과 전혀 다른 패러다임"으로 바꾸어 나아갈 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다. 이는 교육에 대한 관점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미래 교육: 새로운 길을 어디에서 열리는가?"


카이스트 미래 보고서는 "카이스트 미래 교육을 어떻게 혁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작성되었다. 카이스트는 1970년 12월에 발간한 '터만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에 왜 "카이스트"를 설립해야 하는지 그 배경과 이유를 기록한 바 있다. 이후, 위 보고서는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연구 중심지로 카이스트가 성장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도 카이스트 혁신을 위한 연구는 지속되었고, 다양한 보고서로 그 결과와 나아가야 할 방안을 제언해왔다. 그리고 올해, "카이스트 비전 2031"은 카이스트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세계적인 대학으로 도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을 세우기 위해 태어났다. 이 보고서가 의미 있는 것은 과거 실리콘밸리를 탄생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스탠퍼드 대학 프레드릭 터만 교수가 작성 위원장을 맡아 한국과 미국의 전문가들이 작성하였던 반면 이번 보고서는 카이스트 내의 자성적 성찰과 탐구가 주축이 되어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데 있다. 이 점은 "전반적으로 학생들에게 정해진 틀 속에서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게 하는 교육'을 해온 것이 아닌가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무엇을 연구할 것인가 생각하게 하는 교육'을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교육 혁신과도 미묘하게 닿아 있다. 더는 다른 나라에서 배워와 교육 시스템과 연구 시스템을 구축하는 단계가 아니라, 어떻게 세계에서 선도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단계를 모색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교육뿐만 아니라 연구도 그 방향은 다르지 않았다.

 

"연구의 목적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여 미래에 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데 있다. 우리는 그동안 남이 정의해놓은 문제에 매달려 해결하는데 치중해왔다면, 앞으로는 우리가 국가와 인류 앞에 당면한 문제를 발굴하고 정의하여 이에 대한 해법을 선도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2031 카이스트 미래 보고서》의 핵심은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는 현실이듯이, 그 미래를 대응하는 전략은 미래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아니라, 미래 자체를 정의할 수 있는 "직관력"이 필요하다는 데 있다. 카이스트는 이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이미 알고 있는 프로그램 가운데, "직관력"을 바탕에 둔 창의적이며 융합적이며 능동적이며 전문적인 인재를 양성하기에 적합한 교육 모델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MOOK를 활용할 방안과, 플립 학습법은 이미 교수법과 교육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점이다. 이를 확대하여 정착해나가는 것을 어떻게 할지가 중요하다. 교육 방법론 외에 학제를 자유학기 및 자유학점제와 같이 탄력적인 교육 형식의 도입이 불러올 변화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과연 그들의 예측과 예상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터만 보고서를 지휘한 터만 박사가 정근모 박사에게 "지금은 미국에 있는 사람이 한국에서 대학원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이 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들 때문에 외국 사람이 모여드는 대학을 만드세요"라고 한 말이 실현되었듯이. 2031년에 카이스트가 지금 자신이 세운 비전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길 바란다.

 

솔직하게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달성한 인재가 얼마나 카이스트에서 나올지 알 수 없지만.  《2031 카이스트 미래 보고서》를 다 읽고 나면, 앞으로 카이스트가 세계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해 긍정적인 기대감을 가지도록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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