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러 인문학 - 색깔에 숨겨진 인류 문화의 수수께끼
개빈 에번스 지음, 강미경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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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을 다양함으로

 

 

 

 

빨강. 주황. 갈색.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분홍. 흰색. 검정. 금색

 

내가 색깔에 관심을 가진 계기를 떠올려 보면, 물건 하나가 생각난다. 바로, '팔레트'다. 1학년 때 사서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썼던, 분홍색 팔레트. 초등학교 때 새 학년이 시작되기 직전에 팔레트에 물감을 쭉 짜서 잘 말려두었다가 물과 섞어서 색을 만드는 걸 좋아했다. 다 마르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 쿡쿡 건드려서 내 지문을 물감에 남기고 손에는 각양각색의 점들을 찍었던 기억이 난다. 물감 자체도 좋아했지만, 모든 것을 다 비치는 물이 색과 닿으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는 것이 신기했다. 물감을 좋아했지만, 흰 도화지의 빈 여백을 내 마음대로 채우는 건 꽤 어려워했던 게 좀 이상하지만. 그래서 좋아하는 게 그림을 잘 그리거나 좋은 색감을 키우지는 못했지만. "색깔"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올 정도로. 어린 시절 팔레트와 관련된 추억은 생각만으로 기분 좋게 만든다.

 

『컬러 인문학』은 내 분홍색 팔레트 안에 자리 잡았던 빨강, 주황, 갈색, 노랑, 초록, 파랑, 보라, 분홍, 흰색, 검정과 내 팔레트에는 한 번도 담기지 않았던 금색을 포함해 11가지 색에 대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11가지 색이 우리 곁에 어떤 스토리를 가지고 남아 있었는지 하나하나 들려준다. 그 시작은 색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다. 익숙한 구분 기준 중 하나인 무지개색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빨주노초파남보"를 떠올리지만, 과거엔 달랐다. 문화권에 따라 색에 대한 표현도 달랐고, 어느 문화권에서는 무척 익숙한 색이 누군가에게는 "과일"이 존재하기 전에 명명되지조차 않았던 색이기도 했다. 문화마다 친숙하게 느끼는 색이 달랐고, 존재 의미가 달랐다. 저자는 그 '다름'의 간격을 이야기로, 150장의 이미지로 촘촘히 메워 『컬러 인문학』으로 완성했다.

 

가장 오래된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구석기 시대 동굴 벽화에서 시선을 끄는 "빨강"으로 시작한다. 빨강을 하면, 태양, 불, 정열, 피 등 다양한 것이 떠오르듯이 하나의 색은 다양한 의미로 사람들과 함께 공존해왔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특히, 색이 지역과 공간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특히 인간이 만든 사상, 이야기 등과 만났을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빛깔을 내며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색의 의미를 알아가며 색뿐만 아니라 다른 시공간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어서 뜻깊었다. 예를 들어 노란색이 중국에서는 황제들을 상징하는 색이었다면, 유럽에선 차별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색이 문화권에 따라 다른 의미와 상징이 될 수 있다는 걸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11가지 색중에 목차를 보고 가장 궁금했던 색은 바로 "주황색"이었다.

우리는 주황. 붉은 황금색이라는 예쁜 뜻을 가지고 있는 "주황"은 영어로 ORANGE. 과일 이름이라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주황색에 대한 콘텐츠가 적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뒤섞인 채 읽었다.

 

"오렌지"라는 말은 "향긋하다"를 뜻하는 인도 남부의 고대 드라비다어에서 유래했다. _44쪽

 

주황색은 영어 이름이 오렌지라서 그런지 상큼하고 향긋한 느낌을 준다. 또, 금잔화처럼 향긋한 내음을 담고 있을 것 같은 색이다. 그래서인지. 네덜란드에서 주황색은 기분 좋은 축하의 색이다. 평창 올림픽에서 네덜란드 선수단의 옷과 경기복에 주황색이 빠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주황색은 네덜란드 역사의 영광적인 순간과 깊이 닿아있다. 하지만, 주황색이 유럽 내에서 익숙한 색이 아니었던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네덜란드 국기를 보면, 주황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검소하고 생활력 강한 네덜란드 국민성과 연결 지어 이야기한다. 주황색이 아무리 높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좀처럼 만들기 쉽지 않은 책이다. 주황색을 만들 수 있는 식물 염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네덜란드는 주황색과 비슷한 빨간색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네덜란드 국기에는 빨간색과 흰색 그리고 파란색이 담겨 있다.  이렇게 주황색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 빨강 머리의 연장선으로 주황색 머리칼이 가지는 의미 그리고 동남 아사아에서 볼 수 있는 스님들의 옷 색과 연관성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한다. 주황색이 다른 색들에 비해서 역사가 길지 않아서일까? 내용이 적지만, 지금과 가장 많이 닿아 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컬러 인문학』은 색과 관련된 (영어) 표현들도 함께 소개한다. 언어를 통해 색이 어떻게 당시 시공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했는지 이야기했다. 그중에 초록색과 파란색에 대한 표현이 눈에 띄었다. 두 가지 색은 우리나라 말에서도 잘 구별되지 않는 편이다. 푸른이라는 의미로 초록색과 파란색을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서양에서도 초록색과 파란색을 구별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서양에서 파란색의 어원을 살펴보면 검은색과 초록색에 있었다. 또 중국에서도 색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파란색을 사랑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이집트다. 이집트인들은 파란색을 좋아했으며, 그 이유를 청금석에 대한 접근이 용이했든 환경적 요소를 꼽기도 한다. 파란색은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색이지만, 우울하다는 의미에서 파란색을 사용한다는 점 그리고 육체노동자를 상징하는 색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역시, 색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세 시대 아름다운 파란색을 구하기 어려웠던 유럽에서는 파란색을 고결한 의미로 사용하였다. 특히 샤르트르 블루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에서 파란색은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색의 정의로 넘어오면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배우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색을 정의하고 색과 관련해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데서 벗어나 상징의 세계로 넘어가면 연상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색은 피와 깊이 연관된 빨강, 고결하고 순결한 의미와 연관된 흰색과 같이 어떤 문화권이나 비슷한 맥락으로 사용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컬러 인문학』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동양권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인 색의 상징이 서양권에서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보편적으로 합의된 색의 의미도 존재한다. 오랜 시간 색과 관련된 역사는 축적되어 왔다. 그리고 그 안에 한가지 색의 다양한 상징적 의미가 자리해왔다. 그렇다면 다양한 색과 관련된 이야기를 알게 된다는 것에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다양해진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저자 개빈 에번스는 이렇게 말한다. "피, 불, 순결, 죽은, 삶을 상징하는 특정 색의 영원한 의미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머지 색도 눈에 들어온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색 인식은 문화의 우연한 산물일 뿐이다"라는 점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색의 다양한 의미에서 우리의 고정관념을 하나 깨부수고 좀 더 다양한 색을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여는 것이 『컬러 인문학』을 완성한 저자의 목적이었다.

색의 역사를 통해
"당연함"이 "다양함"으로 바뀔 수 있다는 걸
다채롭게 표현한 『컬러 인문학』.
딱 내 스타일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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