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물리학
림태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관계의 물리학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관계의 물리학이란 이름 하에 어떤 글들이 모여 있을지 몹시 궁금했다. 기대감을 한껏 담고 있는 궁금증이 해소될수록 기대는 만족으로 바뀌었다. 잔잔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글들이 넉넉히 담긴 책이었다. 《관계의 물리학》은.

 

요즘 들어 인간관계를 피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신경 끄기 기술》, 《미움받을 연습》, 《불행 피하기 기술》. 위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리 사회 분위기가 인간관계가 더 이상 관계를 맺는 데서 관계를 정리하는 쪽으로 바뀌어가는 것 같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하면 피곤함, 시간 투자, 관리의 대상을 먼저 떠올리게 되고, 이는 자연스레 인간관계조차 하나의 미션처럼 과업처럼 자리 잡힌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을 재고 따지게 된다. 마치 물건 대하듯이 인간관계가 맺어진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인간관계를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록, 마음 한편에 공허함이 스친다고 해도 말이다.

시인 림태주는 '인간관계'가 '인간 관리'가 되어가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울리는 불협화음에 주목했다. 흔히 '고민'이라고 부르는 것들 말이다. 《관계의 물리학》은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인간관계의 기초 중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관계학개론'을 통해 생각을 환기하게 끔 도와주는 책이다. 자신의 이야기부터, 자녀의 이야기, 후배 이야기, 친구 이야기 등 저자 자신을 둘러싼 다양한 인간관계가 글 속에 담겨있는 데 덕분에 글에 생동감이 있다. 자신의 서툴렀던 모습을 숨김없이 이야기하며, 후회와 반성이 교차한 글들 덕분에 마치 내 이야기인 듯 받아들일 수 있다. 남의 이야기나, 시인 림태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나의 이야기인 것도 같다.

 

《관계의 물리학》은 관계의 날씨, 말의 색채, 행복의 질량, 마음의 오지라는 장으로 나누어 약 70여 개의 글들이 담겨있다.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다고 할 수 있다. 글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싶지만, 읽다 보면 하나같이 전부 인간관계가 어려워 마음에 밤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북극성처럼 빛나는 글들이다. 인간관계를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 원소 주기율표의 원소, 열역학 제2 법칙, 팽창하는 우주, 수축하는 우주 등 다양한 개념에 빗대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조합에 어색함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물리학의 수많은 법칙들이 인간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심리학 법칙인 양 딱 들어맞는다. 절묘하게 인간관계와 물리학의 접점을 찾아내 글을 풀어나가는 림태주 시인의 필력의 깊이와 참신함에 놀랐다.

 

림태주 시인의 글은 '조깅'과 닮았다. 서정적인 시인의 글이란 느낌이 묻어나지만, 읽다 보면 문장 하나하나에 여운을 담기보다 문장들이 모인 한 편의 글에서 드러내는 은은함이 돋보인다. 그래서 문장 하나 하나는 빠르게 읽힌다. 간결하기 때문일 것이다. 금방 읽힌 문장들이 한 편의 글로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자신이 생각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을 글을 통해 전한다. "관계는 수제품이다. 수공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 그것이 관계를 대하는 안목이다."라고 말에는 저자가 인간관계를 어떻게 대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글은 조금도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의 글의 주제는 보통 하나뿐인 소중한 수제품을 만들듯 공을 들이는 내용과 그 가치를 인정하는 태도에 대한 내용으로 수렴한다. 그런데 크게 보면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 같지만, 한 편 한 편이 낯설고, 저마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현학적이거나 은유적인 문장 뒤로 의미를 감추지 않는다. 일상적이고 편안한 글로 조깅하듯 기분 좋은 속도감을 느낄 수 있게 글을 독자에게 전한다.

 

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면 무슨 책을 읽어왔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읽은 책이 그 사람이라는 말을 믿어서 그랬다.
그러나 책이 다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의 지적 관심사나 교양이나 취향에 대해서는
책 목록이 실마리를 제공해줬으나
그가 어떤 본성을 지녔는지 알아채기는 어려웠다.
그 사람의 진실은 어떤 책의 장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사용하는 말투나 습관적인 몸짓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니까.

 

여러 구절들이 내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중에 이 구절을 읽는데, 내 이야기를 적은 글인 줄 알았다. 습관처럼 물어본다. 마음에 든 사람,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꼭 물어보는 질문이 "책 좋아하세요?", "어떤 책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을 달고 살았다. 좋아하는 책이 겹치기라도 하면 왠지 더 빨리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고, 흥미로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을 듣고 싶어졌다. 이렇게 시인의 글을 읽으면 나만의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보다 먼저 다른 기준으로 넘어간 저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세상의 기준으로 놓고 보면 '늦음'은 느림이고 게으름이고 불성실이고 무능력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큰 뜻을 세우고 사는 것도 아니고 빛나는 업적을 남기기에는 애당초 깜냥이 안 된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죽기 전까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면 좋겠으나, 나의 진짜 값어치가 얼마인지 나 자신도 가늠하기 어렵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데, 그가 말하는 현실 뒤에 오는 답도 참 현실적인데도 이유 없이 그 글에 위로 받기도 했다. 이처럼 별거 아니고 사소한 이야기를 림태주 시인의 언어로 완성된 형태는 그만의 감성이 묻어 있었다. 짧은 산문들이지만,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문득 내가 혼자 생각했던 것이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늦음에 대한 글을 읽으며, 내가 유난히 고치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늦는 일들이 떠오른다.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하는 것'과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그가 글에서 하고자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그의 글은 내 생각의 타래와 함께 다른 그의 글로 엮어져 나갔다. "사람을 잃기 좋은 때, 마음 하나면 충분했던 일인데 한없이 옹색해져 관계를 그르치는 때, 자신도 하지 못하는 역지사지를 타인에게 요구하고 있는 때, 아픈 후회의 씨앗을 생각 없이 삼고 있는 때."라는 메시지로 이어져 또 다른 글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생각과 기억이 이어져 나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것도 《관계의 물리학》에서 느낄 수 있었던 재미 중 하나였다.
 
당신도 나도 살아가면서 이것 하나만은 잊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의 심장에 보관된 말은 소멸시효가 없다.
심장에 박힌 상처의 말은 화살의 주인과 상관없이
한 존재의 일생을 잔인하게 갉아먹는다.

 

저자는 '당신'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 당신의 대상은 때로 연인에게 향하는 듯, 독자에게 향하는 듯하다. 분명한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말하지만, 꼭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만약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면, 나에게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읽길 권하고 싶다. 나는 나에게 하는 말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힘든 마음을 감싸는 위로부터, 나의 마음에 대한 깊은 공간 그리고 따끔한 충고까지. 글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관계의 물리학》은 글마다 다른 상황과 관계 속에 저자와 내가 존재하는 책이다. 그의 말이 내 안에서 또 다른 관계를 만들어낸다. 그다음엔, 내 주변과 나의 관계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든다. 살짝 마음이 상기되어 책을 덮었다. 열역학 제2법칙 "열은 반드시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이동한다." 림태주 시인의 말처럼 관계가 빛이 아니라 열이라면, 내가 은은한 따뜻함을 유지해, 다른 사람의 온도를 빼앗지 않고 나누어줄 여유를 《관계의 물리학》을 통해 가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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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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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머금은 솜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읽고 난 뒤, 느낌이었다. 무력감이 나를 엄습했다. 축 처지는 느낌, 움직이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고 한없이 움츠러드는 느낌. 마치, 내가 물에 젖은 솜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었다. 감정 뒤에는 "평생 동안 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잊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세세한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들이 내 몸에 너무나 생생히 남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영원히.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단번에 읽었다. 읽기 시작한 순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한 책도, 재미있는 책도, 아름다운 책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책이다. 놓을 수 있다면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자에게 소설을 쓰는 것이 선택의 몫이 아니듯, 나에게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멈추는 건 나의 몫이 아닌 것 같았다. 눈과 손은 계속 움직였다. 그렇게 약 3시간을 오로지 이 책을 읽는 데 집중했다. 올해 내가 읽은 그 어느 책보다 가장 집중해서, 단번에 읽은 소설이었다.

 

 

 


낙원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이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난과 슬픔 따위를 느낄 수 없는 곳이라는 뜻에서, 죽은 뒤의 세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그 어디에도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낙원이란 단어의 뜻과 정반대인 지옥과 같은 현실을 쓴 소설이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13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아이를 문학 교사가 상습적으로 폭행 및 성폭행했지만, 가해자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의 삶이 점점 망가져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교사에게 폭력 및 성폭행을 당한 4명의 피해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썼다는 사실에, 출간과 동시에 대만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소설 발표 후 2달 뒤 작가가 자살한 뒤 사회에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더했다. 대만 대입 자격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할 만큼 수재였던 그녀가 3번의 자살 시도를 할 만큼 영혼을 갉아먹었던 폭력이 바로 소설 속 주인공이 당한 폭력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유명 문학 강사에게 지속적인 폭행 및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가해자로 지목된 강사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선생님, 리궈화처럼.

 

존 밀턴의 서사시이자 저서인 《실낙원·복낙원》 속에서 실낙원은 인간이 타락하여 낙원을 잃게 되는 과정을 그린 서사시이고, 복낙원은 인간이 다시 낙원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담은 서사시다. 이와 동일한 이름을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서도 등장한다. '낙원' 장은 쓰치가 당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팅의 위치가 쓰치가 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장에서 이팅은 자신의 분신이자, 쌍둥이와 다름없었던 쓰치와 왜 멀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밝힌 부분이 '실낙원' 장이다. '실낙원' 장은 이 소설의 이야기 대부분을 차지한다. 쓰치가 왜 자신이 '낙원'이 아닌 곳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으로 자신을 내몬 리궈화 선생과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사회적 구조가 이야기 속에 촘촘히 담겨 있다. 끝으로 '복낙원'은 모든 사실과 진실을 알게 된 이팅과 이원이 '쓰치'가 홀로 감당했을 고통을 느끼며, 마치 쓰치처럼 '낙원'에서 추방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파트에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일 거라고……."고백하는 말을 언뜻 보면 마치 쓰치와 함께 이팅과 이원이 멀어지는, '실낙원 2'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쓰치'가 느꼈을 고통을 함께 느끼는, 그 아픔을 깊이 이해하는 공감대가 쓰치를 낙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리궈화 선생이 속삭이는 잔혹한 언어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일상 속에서 추방했던 '쓰치'가 낙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간절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짧은 '복낙원'에서 보여주고 있다. 

 

"며칠 동안 생각했지만 방법은 하나뿐이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게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을 바꾸면 된다. 선생님을 사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열세 살 소녀에게 강간은 사랑이라고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실로, 일평생 그녀의 존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고통으로 낙인이 찍힌다. 자신에게 어떤 잘 못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은 채, 스스로 평범한 일상과 거리를 가지고, 서서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거리는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다.  여기에서 쓰치가 느끼는 낙원, 이상적 공간은 '평범한 일상'이다. 자신이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으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일상 그 자체다. 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읽으며, 난 분노와 공포를 넘어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도가니》, 《다크 챕터》, 《베어 타운》 등과 같이 살인과 다를 바 없는 성폭행을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인간이 등장하지만, 그 인간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피해자만 생이 망가지는 모습만 나오기 때문이다. 극적인 반전은 소설 속에서도 소설 밖에서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 5년 동안 말할 수 없었던 사실이 자신의 절친인 이팅과 이웃집에 살던 이원에게 전해지게 될 뿐이다. 그것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그녀가 그동안 비통하게 써 내려간 일기를 통해서 알려진다. 이미 자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나쳐버리고 나서 전해진다. 그 일기를 이팅과 이원이 읽을 수 있을 때, 쓰치의 영혼은 그녀의 몸에서 떠나버렸다. 그리고 되돌아온다는 것은 기적이 될 만큼,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이후에, 너무 늦게 진실이 밝혀진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성’에 대한 암묵적 침묵이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와 그런 분위기가 당연시 여겨지는 것에 대해 동조, 침묵한 채 어떤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할 수 있는 문제를 문학적으로 고발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서슴없이 가하는 말이 어떻게 그들의 마음속을 헤집어 놓는지 말한다.

 

“댓글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그녀에게 날아와 꽂혔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상상력도 없었다.”

 

쓰치말고 리궈화에게 성폭행을 당한 아이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잠재된 무의식적 토대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는 사회가 낯설지 않았다. “그럴 만하니까, 당한 거야”, “꽃뱀처럼 먼저 꼬리쳤을 거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그런 걸 말해?” 라는 말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비록 이 말을 신문 기사 댓글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저 익명의 대중에게만 이런 생각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다.

 

"성교육이라니? 성교육은 성이 필요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야. 교육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니?"

그때 쓰치는 알았다. 이 이야기에서 부모의 자리는 영원히 비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수업에 무단결석해놓고 아직 수업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가정이 아이를 조금도 지켜줄 수 없었다. 스스로 낙원에서 걸어 나갈 때까지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성에 대해, 성폭력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가진 사회에선 친구도, 이웃도, 학교도 성폭행 피해자 스스로까지. 그 누구도 낙원에서 쫓겨나듯 도망치는 쓰치에게 “네 잘 못이 아니야. 이곳에서 떠날 사람은 네가 아니야.”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해주어야 한가는 생각조차 가지지 못했다. 쓰치는 이 비틀어진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고 싶었다. 터져 나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어 했던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자신이 쏟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고 이원이 가정 폭력을 당하는 모습에 분노하며 토해낸 말을 읽는 순간 마음이 쓰라렸다. 이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겪고 있는 폭력에 대한 목소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요? 어째서 피해자가 입 다무는 걸 교양이라고 해요? 어째서 남을 때린 사람이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죠? 정말 실망스러워요. 언니에게 실망한 건 아니에요. 이 세상이든 인생이든 운명이든 아니면 신이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정말 형편없어요. … (중략) … 그런 긍정적인 사고가 얼마나 세상에 영합하는 비열한 결말인지! 그런데 내가 그것보다 더 원망하는 게 뭔지 알아요? 차라리 내가 세속에 영합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차라리 내가 세상의 이면을 본 적도 없는 무지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소녀를 얼마나 잔인한 폭력하에 무방비하게 방치했는지가 선명하게 보여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 소녀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가해자라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궈화가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어린 학생들은 온전히 걷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일어나 뛸 것을 강요당하는 어린 양이었다.”라는 속마음을 통해서 이 비정상적인 사회의 생리가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점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훌륭한 작품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이 리궈화 한 사람에게 전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특별한 소설이자, 훌륭한 소설이다. 성폭행과 폭력은 흑과 백이 명확하게 드러난 문제다. 이보다 더 극명하게 선악의 이분법의 잣대를 가지고 갈 수 있는 주제도 없다. 하지만 그건 피해자와 가해자 개인만을 두고 보았을 때 일이다. 시야를 넓혀서 바라보면, 성폭력 문제를 흑과 백으로 바라볼 때 놓치는 것이 많다는 걸 이 소설은 작품 자체로 보여준다. 만약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이분법으로 이야기 서사를 그렸다면, 난 이 작품을 읽고 난 뒤에 이토록 무거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와 그 주변 사람들의 서사를 함께 끌고 나가면서 성폭행에 무방비한 사회 구조와 비열하고 더러운 인간의 욕망과 성폭행으로 무너진 한 개인의 참담한 심정을  너무도 아름다운 문장들로 세공하여 보여준다.
 
그저 자신의 비틀어진 욕망을 실현할 수단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던 그 잔혹한 폭력이 사랑으로 포장되는 건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 잔혹함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선 잔혹한 모습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참 아름다운 문장들이 오가는 틈새에서 잔인한 폭력성이 묻어 나온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한 리궈화의 위선, 그 위선을 알지만 그 위선을 인정하는 순간 생을 포기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쓰치의 생각이 작품 속에서 교차되어 나타나는 대목들은, 사실적이기보다 문학적이다. 그런데 그 문학적인 표현이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드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인생에 대한 의욕, 삶에 대한 열정, 둥그렇게 뜨고 있던 커다란 눈, 아니면 그 무엇이든, 누군가 밑에서부터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와 모든 걸 비틀어놓았다. 허무주의도 아니고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도 아니고 불교의 '무'도 아니었다. 그건 수학의 0이었다.” 이 표현을 통해 열세 살 스승의 날에 있었던 처음의 경험과 5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았던 잔혹한 폭력이 그녀의 몸과 생각과 마음 그리고 영혼 전부를 갉아 먹어버린 걸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자칫 자극적인 문장은 성폭행을 다룬 작품에서 작품 자체가 가십처럼,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가할 여지가 많다. 그리고 감정의 호소로 이 문제를 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닫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그렇지 않다. 작품은 문제의 심각성과 문제 자체를 문학적 표현으로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스물여섯 살의 작가는 자신의 글로 보여주었다.

 

이 소설은 끝에 희망을 보여주지만, 그 희망이 옅어 보이게 만드는 잔혹한 진실이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쓰치의 이야기를 읽는 것을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아니. 우린 앞으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없어. 정직한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없어."라는 이원이 이팅에게 말하는 어조와 같이 단단하고 담담하게 내 마음을 감쌌다. 그녀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끝까지 읽고 싶었다. 글 속에 내 다짐을 부추기는 직접적인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작품을 손에서 떼놓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작품은 작품 자체만으로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한 작품이지만, 작가의 죽음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이 성폭행 피해자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자살로 세상에 고발하는 모습과 오버랩되어 보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린이한이 어떤 심경으로 죽음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사실은 중요할 수 도 있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품과 작가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은 다음번에 생각할 거리로 남겨두고자 한다. 다만 린이한이라는 작가가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서 보여주기까지 그녀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과 언어들이 태어나고 죽어갔는지 그 과정을 직접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작가인 나처럼 여러분도 쓰치를 동정하고 그녀에게 공감해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녀 편에 서주길 바랍니다."라는 해석을 바라던 그녀는 침묵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제 그녀가 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만 남았다는 사실이 더더욱 마음 아프다. 그리고 어딘가 쓰치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을 소녀가 있다는 점이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점이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팡쓰치가 이 사회를 견디기는 너무나 힘겹다고. 자신의 죽음이 마지막이길 바란다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갈 팡쓰치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길 바란다고. 그리고 다시는 팡쓰치가 낙원에서 스스로 추방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이것만 생각하기에도 벅찬, 가슴 먹먹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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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5가지 방법 - 정답 없는 문제조차 정답을 제시해야 하는 당신을 위한
조셉 L. 바다라코 지음, 최지영 옮김 / 김영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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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모든 일이 흑과 백. 나쁜 일과 좋은 일. 그른 일과 옳은 일로 정해져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모든 일을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어떤 조직, 팀 안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더더욱 구별이 어렵다. 『가장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5가지 방법』의 저자 조셉 바다라코는 ‘흑과 백,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불확실한  문제’를 가리켜 회색 지대 문제라고 지칭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조직 관리자에게 업무상 최대의 난제”라고 말하며, 이를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업무 능력 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자신을 시험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왜 회색 지대 문제는 해결하기 어려울까? 한눈에 그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 문제 해결 방안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해결방안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불러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재로 섬유 공장이 다 타버린 공장주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자신의 상사의 지인인 사원이 업무 성과가 매우 부족할 때 중간 관리자로써 인사고과를 어떻게 주어야 할까. 직관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이런 문제들은 보통 다양한 이해관계와 주변 상황과 얽혀 있다. 한 가지 판단 기준 만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들이다. 저자는 이 점에 주목했다.
 
다양한 층위의 다른 상황과 얽혀 있는 회색 지대 문제
 
그러므로 저자는 그 해결 방안으로 하나의 프로세스를 제안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프로세스가 있다는 것은 문제에 얽힌 다양한 층위를 분석한다는 의미이며, 분석을 통해 가장 적합한 방안을 모색한다는 뜻이다. 책 제목이 『가장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5가지 방법』의 5가지 방법은 5단계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물론 직관적인 판단보다 늦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결과를 두고 보면 이 과정이 결코 느린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저자는 즉각적으로 판단을 내리기보다 천천히 해결할 것을 권한다.
 
회색 지대 문제는 왜 프로세스를 필요로 할까?
저자는 프로세스를 따라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첫째는 우리는 회색 지대 문제를 직관적으로 해결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저자는 다양한 연구, 설문 자료를 통해 “우리는 문제를 정면 돌파하고자 하지만 자신의 지식이나 판단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입증한다. 즉, 주관적 판단에 한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판단이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이끌어내지 못할 확률이 높다. “회색 지대 문제는 한 명의 개인의 뛰어난 영감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회색 지대 문제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결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결해야 하고 그 과정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의 도덕성보다 프로세스의 도덕성이 최고의 도덕성이라고 평가하는 알렉산더 빅켈의 말처럼, 프로세스는 개인의 비합리적인 결정을 막아주기 때문에 필요하다.
 
저자는 회색 지대 문제를 해결을 위한 다섯 단계를 다섯 가지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소개한다. 질문을 통해 문제를 다각도로 바라보고, 이를 통해 실수나 실패를 할 가능성을 줄여준다.
“최종 결과는 무엇인가?”
“나의 핵심 의무는 무엇인가?”
“현실 세계에서 실효성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내가 감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저자는 고위 관리자, 중간관리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리자들이 실무에서 겪을 수 있는 사례를 통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그의 설명을 따라가면 “복잡한 난제와 만났을 때 최종 결과, 기본 의무, 현실 세계, 공동체 가치 및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중심으로 결정”을 할 수 있는 명징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저자가 제시한 다섯 가지 프로세스 가운데 몇몇 질문은 회색 지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사결정 외에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에 두고 있어도 좋은 요소들이 많다. "나의 핵심 의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이라는 존재 의미와 닿아 있다. 인본주의적 주제와 닿아 있는 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에게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기본 의무가 존재한다. 칸트의 "내 마음을 경외심으로 가득 채우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별이 빛나는 내 머리 위의 하늘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 안의 도덕률이다."라는 말속의 도덕률. 기본적 기본 의무를 기억하는 것은 개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마음에 두어야 할 메시지다. 실제로 강력하고 구속력 있는 인간의 의무가 우리의 삶과 조직의 모습을 형성하고 우리 사고의 구심점 역할을 하지만, 이를 마음에 두는 것은 어렵다. 인간의 기본 의무를 다하지 않는, 저버리고자 하는 유혹한다면, 저자는 자신의 입장이 아닌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그 시선 속에서 가장 싫은 것이 무엇인지 보고 다른 관점을 수용할 것을 권한다.
"사회나 조직에서 자신의 지위 덕분에 인간의 기본 의무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자신의 이해관계, 경험, 판단, 세상을 보는 관점에 매몰되지 말라. 모든 방법을 동원해 반드시 자기 본위의 감옥에서 탈출하라. 자신이 직접 당하는 당사자가 된다면 기분이 어떻지, 그 상황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필요할지를 스스로,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열심히 상상해보라."
뻔하지만 생각의 환기로 한숨 돌릴 여유를 가질 때, 하내 안의 도덕률을 들여다볼 여지가 생기지 않을까? 당연해 보이지만, 쉽지 않기 때문에. 이 안에 의사 결정을 할 때 고려 사안 중 두 번째 단계로 저자가 이를 넣어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처음에 『가장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5가지 방법』을 때, 실용 서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의사결정 솔루션을 제안하는 실용 서적이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회색 지대 문제라는 옳은 것과 옳은 것이 충돌하는 사안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지. 고대 철학자, 근대 철학자 그리고 현대의 사회 심리학 연구 결과 때때로 소설 속 인물들까지 모두 등장해, 가장 바람직한 방법을 알려준다. 그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과학적 방법 외에 철학적 깊이를 더한 책으로, 읽다 보면 다섯 단계의 생각의 층위가 쌓이는 걸 느낄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운명을 강에 비유했다. 삶과 일은 상대적으로 고요하고 긴 물결과 같지만 때로는 무섭고 위험한 소용돌이를 만난다." 그때  『가장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5가지 방법』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가 빛을 발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 독서이고, 책이 표면적으로 제시한 것 이상을 담고 있는 책을 양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옳은 것과 옳은 것을 두고 고민하는 문제 외에 내 삶에서 어떤 것을 결정을 해야 하는지, 내가 어떤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 한지에 대한 통찰까지 담고 있는 책이다.


"현실적이고 실리적인 관점은 지름길을 택하여 여의치 않으면 가장 가까운 출구를 대충 찾기보다", 『가장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5가지 방법』과 함께 확실한 지름길을 걸어가길 추천한다.

 행운은 용감한 자의 편이다.
-마키아벨리

『가장 좋은 의사결정을 하는 5가지 방법』을 읽기로 마음먹는다면, 행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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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 - 전신마비 27년, 하나님과 함께한 날들의 기록
윤석언.박수민 지음 / 포이에마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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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인생의 굴곡이 남다른, 특히 자신의 신체적 한계에 대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어렸을 때, 어떤 글이던 편견 없이 술술 읽어갔던 때 《오체불만족》이란 책을 읽고 무척이나 감동했었고, 닉 부이치치의 강연을 듣고 뭉클함과 내 삶을 반추해볼 계기로 삼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언급한 분들이 한참 시간이 지난 오늘날 보인 행보에 씁쓸함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일까, 고 장영희 교수님의 글을 좋아하지만, 교수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의 어려움을 극복한 이야기, 그 현실을 담담하게 쓴 글을 읽을 때마다 마음에 가시가 걸린 듯 따끔거렸다. 이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나의 편견 때문에 혹은 누군가 덤덤하게 고백하는 삶을 받아들이기에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인지 알 수 없지만, 난 열심히 피해 다녔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온 책이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다.

 

전신마비로 27년을 살아온 윤석언 씨가 진심을 담아  한 마디를 한다면 있다면 바로 이 책의 제목일 것입니다.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 스물셋, 교통사고로 목 아래로는 움직일 수 없어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물을 마시는 것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약해 보이는 파리를 가장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며 절망하기 보다 자신의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으며 그의 삶이 주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전하고 있다. 전신마비라는 신체적 한계에 직면해야 했던 순간의 어려움을 가늠할 수 없지만, 미국 메릴랜드주 콜롬비아시의 한 요양원에서 온라인으로 목회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의 삶과 생각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 희망은 꼼짝할 수 없는 자신에게 찾아온 하나님이었고, 그분과 동행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렇게 본다면, 그의 글이 앞서 내가 언급한 책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달랐다. 그의 글에는 희망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판도라의 상자를 나온 것이 희망만이 아니듯, 그의 글에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감정들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 공존은 이야기의 기승전결에 따라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처음과 중간, 마지막에 모두 존재한다. 이 점이 난 좋았다. 만약 그의 글이 희망으로만 가득했다면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 자체가 못났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 역시 아직도 약해지는 때가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절망에 빠져들기도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서 나의 현재를 돌아볼 여지를 발견했다. 그의 생각에서 나의 삶과 닮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틈 말이다.

 

전신마비로 삶을 살아가는 그는 말한다. 요양원에 머문다는 의미는 호스피스 병동에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이다. 기적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기적을 기대하지만, 서서히 그곳에서 그는 마지막을 맞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요양원 환경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의 삶을 담담히 서술하는 그의 글에 조금씩 희망이 비친다. 혼자의 힘으론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지만, 누구보다 큰 걸음으로 자신의 인생을 걸어나가는 듯도 하다. 죽음 아닌, 살아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다르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 바라보며, 불쌍하고 불쌍하지 않다는 가치를 내려놓았다는 고백한다. 절대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 쉽지 않았던 여정을 말하지 않는다. 그의 글과 글 사이에서 짐작만 할 뿐이다. 여전히 자신이 부족하다고 고백하고 동시에 그가 당면한 현실이 교차하는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를 읽다 보면 느껴진다. 윤석언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꼼짝할 수 없는 내게 오셔서》는 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으며, 마주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어 뜻깊었다.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것은, 윤석언이란 사람에 대한 이해도, 공감도 아니었다. 그는 그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그 삶 속에 선물같이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전해지고 있다. 난 그의 삶을 통해서 나를 보았다. 내가 어떻게 삶을 마주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마주 선 순간은 이전에 내가 《오체불만족》이나 《닉 부이치치의 허그》, 《닉 부이치치의 삶은 여전히 아름답다》 등의 책을 읽었을 때 받은 감동과 달랐다. 누군가 고통이나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살아내는 모습을 보며 내가 얼마나 감사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게 아니라,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성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좋았다.

 


내일은 없는 것 같았다
어제도 있고 오늘도 있었지만
내일은 없는 것 같았다.

자고 나면 내일이겠지
하면서도 오늘이었다.
무거운 손, 마음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나는
내일이 없는 것 같았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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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지식인마을 25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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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과학일 수 있는 이유,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 짓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내가 《쿤&포퍼》를 읽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장하석 교수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1강을 듣고 그에 대한 지식을 조금 더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이유 안에는 다른 이유가 담겨 있다. 바로, 과학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한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왜 과학일까? 무엇을 과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학과 과학이 아는 것을 구분 짓는 기준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난 EBS 장하석 교수의 <과학, 철학을 만나다> 1강을 듣고 나서 처음으로 가졌던 의문이다. 과학을 과학이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난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당연히 과학이라고 생각했고, 과학이 왜 과학인지 의문을 가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과학이라고 하면 신뢰했다. 장하석 교수의 말처럼, "과학이라는 것이 뭐가 그리 잘나고 훌륭하냐"라는 생각도 해보지 않고서 말이다. 과연 나만 그럴까?

 

나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현대 사회는 과학이 가지는 위치는 마치 중세 시대에 종교가 사회를 지배한 것과 닮아 있다. "과학 지식의 특별함과 우월함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듯한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낯설지 않다. 알쓸신잡에서 누룽지를 우리는 방법을 두고도, 과학자가 말하면 신뢰가 간다는 말에 의문을 가지기 보다, 고개를 끄덕인 시청자가 훨씬 많을 테니까 말이다(나도 다르지 않았다). 과거 종교가 가진 위치만큼 올라선 과학은 그럼 종교와 같을까? 당연히 아니다. 과학과 종교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주는 학문이 난, '과학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과학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담겨 있다고 믿는 믿음의 바탕에 놓인 생각을 말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 선 두 학자가 바로 "카를 포퍼"와 "토마스 쿤"이다.

 

과학의 역사를 곰곰이 돌아보자. 과학에 있어서 영원불변의 진리가 있었던 적이 있었나? 갈릴레오의 주장, 코페르니쿠스의 주장, 뉴턴의 주장 모두 오늘날 과학의 기준에서 볼 때, 더 이상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과학은 늘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는 학문이었다. 이 이야기는 과학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과학이 변화 가능성이 많음에도 과학을 믿는다. 언제든 진리가 아닐 수 있는 것을 당대엔 신뢰했었다. 사실 과학은 수많은 가설을 가지고 있고 그 가설이 입증되는 경우가 있을 뿐. 절대 불변의 명제라고 믿는 것은 없다. 그렇기에 과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였고, 그 새로운 진실의 발견함으로써 과학은 발전했다. 그렇다면 이 과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학이 새로운 지식을 이 과정 혹은 이전 과학적 지식과 현재 과학적 지식 간의 관계. 이를 설명한 학자가 바로 포퍼와 쿤이다.

 


포퍼가 일평생 화두로 삼았던 '합리성'은 비판에 직면하여 반증의 시도에 눈을 감지 않는 지식인의 정직성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과학 지식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포퍼는 그의 반증주의에 입각하여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한 열린 사회를 꿈꿨다. 포퍼의 과학철학과 정치철학을 꿰뚫고 있는 중심 원리는 바로 반증주의였다. 이런 포퍼의 사상을 사람들은 '비판적 합리주의'라고 한다.

 


포퍼는 '반증주의'라는 철학 이론을 통해 과학사를 설명한다. 경험적 증거를 통해 어떤 과학적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과학자가 주장하는 바가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서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 이론은 더 이상 정당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포퍼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이유는, 어떤 과학적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이론이 타당한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어려움을 넘어서 불가능한 일이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이 백조를 보았으므로 백조는 하얗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실제로 흑조도 존재하듯, 어떤 과학적 사실에 대해 앞으로 실험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도, 이 결과에만 부합하는 관측이 나온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근거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퍼는 확증이 어렵다면 반증을 통해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포퍼의 기준으로 봤을 때 어떤 진술이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그것이 반증 가능한가 불가능한가이다." 반증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 포퍼에게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요소는 '비판적인 태도'로 기존의 이론을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만약, 동일한 주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찾아내는 데 급급하다면 과학뿐만 아니라 어떤 학문 분야에서도 어떤 이론도 발전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포퍼는 말한다, 과학은 추측과 반증을 통해서 발전을 이루어왔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점이 과학을 비과학과 구별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말한다. 만약 추측과 반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려고 하며,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는 건 과학이 아니라 과학인 척하는 '사이비 과학'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가 사이비 과학이라고 비판한 대상에 한때 다윈의 진화론까지 들어갔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엄격한 생각의 틀 속에서 과학을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쿤은 한마디로 실제 과학은 절대로 포퍼나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규범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대신 과학에는 '도그마'와 같은 것이 필요하고 대부분의 정상적인 과학은 그것에 기댄 활동이며, 드물게 일어나는 과학혁명은 논리적 절차보다는 과학자들의 심리 상태에 더 크게 의존해 있다고 주장했다. 더욱이 혁명을 통한 과학의 변동이 꼭 진보적인 변화라고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쿤은 포퍼와 생각이 달랐다. 쿤은 철학자였지만, 과학을 아는 철학자였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물리학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를 가리켜 과학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대범하게 내놓은 이론을 두고 기존 과학자들은 꽤나 충격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주장은 과학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포퍼는 과학자들이 스스로 비판적 관점에서 바라본다고 주장했지만, 쿤은 과학 연구가 대부분 비판하는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 과학적 성과를 인정하는 퍼즐 풀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하나의 과학자의 노력으로 과학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과학의 변화는 그 변화를 알리는 징후가 존재하며 그 징후에 따라 어느 정도 순차적으로 변화 과정을 밟아나간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패러다임"이다.


"변칙 사례들의 계속적인 증가로 인한 심리적 위기(옛 패러다임의 위기), 그 사례들을 매우 인상적으로 해결하는 대안 이론의 등장(새 패러다임의 등장), 과학자들의 쏠림 현상(패러다임의 교체 시작), 옛 패러다임 주역들의 사망(패러다임 교체의 완성). 쿤은 이런 일련의 과정들에 따라 과학 이론이 성장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그는 과학자 사회가 하나의 패러다임에 의해 지배를 받는 가운데 과학자들이 벌이는 활동을 '정상 과학'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깨지고 다른 패러다임으로 교체되는 현상을 '과학혁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학의 발전은 과학자 개인의 비판적 견지를 통해서 일군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포퍼의 주장에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두 사람 이후에도 과학이 과학으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이론을 설명한 학자들은 많이 있다. 그중의 한 명이 바로 파이어아벤트다. 그는 "모든 과학에 통용될 수 있는 방법론"은 존재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한때 유행했던 말처럼 '그때그때 다르다'라는 상당히 비과학적인 방법을 과학이라고 주장한다. 흔히 과학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딱딱 들어맞아야 하는데 그는 하나의 이론으로써 정립된 과학 방법론을 거부하며, '사실과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론들을 개발하고 수용하라'라는 반규칙을 말한다. 간단하게 보면 쿤의 과학혁명과 닮아 보이지만, 다른 주장이다. 과학자들은 기존의 이론적 토대에서 연구를 진행하면서 또 기존의 이론과 어울리지 않는 이론을 위해 연구한다. 결국 두 과정 간에는 모순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파이어아벤트는 이 점에 주목한 것이다. 모든 과학에 통용할 수 있는 특정한 과학 방법론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이를 설명한다고 해도 그 설명 자체가 불합리한 규칙에 불과할 뿐이고 이를 과학자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무리 잊으려 해도 맘에서 떠나지 않는 특별한 메리처럼 과학에도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듯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과학이 다른 지식과는 달리 자연을 직접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이 자연은 말랑말랑한 고무찰흙이라기보다는 엄청나게 큰 코끼리인지 모른다. 코끼리의 존재야말로 과학을 뭔가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는 차라리 장님이리라!

 

 

우리는 지금은 잘못된 과거의 과학적 지식까지 모두 배운다. 사실 과학 입장에서 보면 잘못된 진실인데 그 과정을 모두 배우는 이유를 《쿤&포퍼》에서 찾았다. 과학은 언제나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진 진실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즉, 열린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에서 어떤 한 이론은 하나의 패러다임 안에서 진실일 수 있지만, 또 다른 패러다임에서 거짓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한 명의 과학자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연구를 통해서 입증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하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정 중에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학을 나누어 하나의 토막 상식으로 배우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혹은 과학의 경계를 함부로 구획화하여 배우는 것도 위험하지 않을까. 과학은 입증 여부만큼이나 입증의 과정과 그 영향이 중요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학은 그 발견된 내용이 진실인가 여부도 중요하지만, 그 진실을 어떻게 입증해왔고 그 입증 결과가 한 패러다임 내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과학적 사실에만 주목한다. 혹은 과학 자체를 맹신하거나. 이 자세를 경계해야 한다고 《쿤&포퍼》는 말한다.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특별함은 어떤 과학적 사실이 진리인지 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과학적 지식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 위치에 따라 결정지어진다는 걸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과학이 과학일 수 있게 만드는 존재 이유라고 말이다.

 

《쿤&포퍼》를 읽다가, 문득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것인지, 철학을 공부하는 것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그건 《쿤&포퍼》가 과학 책이 아니라 과학철학을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과학과 철학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학문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데 철학적 토대가 바탕이 되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모든 학문이 문과와 이과로 나눌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과학 철학의 실마리를 안겨준 학자들이 빈학파의 논리였는데,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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