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린이한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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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머금은 솜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읽고 난 뒤, 느낌이었다. 무력감이 나를 엄습했다. 축 처지는 느낌, 움직이고 싶지만 움직일 수 없고 한없이 움츠러드는 느낌. 마치, 내가 물에 젖은 솜이 된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이었다. 감정 뒤에는 "평생 동안 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잊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세세한 내용을 다 기억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책을 읽으며 느낀 감정들이 내 몸에 너무나 생생히 남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영원히.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단번에 읽었다. 읽기 시작한 순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다음 이야기가 더 궁금한 책도, 재미있는 책도, 아름다운 책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책이다. 놓을 수 있다면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자에게 소설을 쓰는 것이 선택의 몫이 아니듯, 나에게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멈추는 건 나의 몫이 아닌 것 같았다. 눈과 손은 계속 움직였다. 그렇게 약 3시간을 오로지 이 책을 읽는 데 집중했다. 올해 내가 읽은 그 어느 책보다 가장 집중해서, 단번에 읽은 소설이었다.

 

 

 


낙원

 

"아무런 괴로움이나 고통이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난과 슬픔 따위를 느낄 수 없는 곳이라는 뜻에서, 죽은 뒤의 세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그 어디에도 낙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낙원이란 단어의 뜻과 정반대인 지옥과 같은 현실을 쓴 소설이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13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아이를 문학 교사가 상습적으로 폭행 및 성폭행했지만, 가해자는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의 삶이 점점 망가져 가는 모습을 담고 있다. 교사에게 폭력 및 성폭행을 당한 4명의 피해자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썼다는 사실에, 출간과 동시에 대만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소설 발표 후 2달 뒤 작가가 자살한 뒤 사회에 다시 한번 큰 충격을 더했다. 대만 대입 자격고사에서 전국 수석을 차지할 만큼 수재였던 그녀가 3번의 자살 시도를 할 만큼 영혼을 갉아먹었던 폭력이 바로 소설 속 주인공이 당한 폭력과 동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유명 문학 강사에게 지속적인 폭행 및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가해자로 지목된 강사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선생님, 리궈화처럼.

 

존 밀턴의 서사시이자 저서인 《실낙원·복낙원》 속에서 실낙원은 인간이 타락하여 낙원을 잃게 되는 과정을 그린 서사시이고, 복낙원은 인간이 다시 낙원으로 회복되는 과정을 담은 서사시다. 이와 동일한 이름을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서도 등장한다. '낙원' 장은 쓰치가 당한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이팅의 위치가 쓰치가 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장에서 이팅은 자신의 분신이자, 쌍둥이와 다름없었던 쓰치와 왜 멀어지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그 과정을 적나라하게 밝힌 부분이 '실낙원' 장이다. '실낙원' 장은 이 소설의 이야기 대부분을 차지한다. 쓰치가 왜 자신이 '낙원'이 아닌 곳에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으로 자신을 내몬 리궈화 선생과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사회적 구조가 이야기 속에 촘촘히 담겨 있다. 끝으로 '복낙원'은 모든 사실과 진실을 알게 된 이팅과 이원이 '쓰치'가 홀로 감당했을 고통을 느끼며, 마치 쓰치처럼 '낙원'에서 추방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아파트에 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한 인생일 거라고……."고백하는 말을 언뜻 보면 마치 쓰치와 함께 이팅과 이원이 멀어지는, '실낙원 2'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이 '쓰치'가 느꼈을 고통을 함께 느끼는, 그 아픔을 깊이 이해하는 공감대가 쓰치를 낙원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이 리궈화 선생이 속삭이는 잔혹한 언어를 통해 스스로 자신을 일상 속에서 추방했던 '쓰치'가 낙원으로 돌아오기 위해 간절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짧은 '복낙원'에서 보여주고 있다. 

 

"며칠 동안 생각했지만 방법은 하나뿐이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내게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 않을까? 생각을 바꾸면 된다. 선생님을 사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내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열세 살 소녀에게 강간은 사랑이라고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실로, 일평생 그녀의 존재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고통으로 낙인이 찍힌다. 자신에게 어떤 잘 못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은 채, 스스로 평범한 일상과 거리를 가지고, 서서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거리는 돌이킬 수 없이 벌어진다.  여기에서 쓰치가 느끼는 낙원, 이상적 공간은 '평범한 일상'이다. 자신이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으면 누릴 수 있는 평범한 일상 그 자체다. 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읽으며, 난 분노와 공포를 넘어 속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도가니》, 《다크 챕터》, 《베어 타운》 등과 같이 살인과 다를 바 없는 성폭행을 저지르는 극악무도한 인간이 등장하지만, 그 인간이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피해자만 생이 망가지는 모습만 나오기 때문이다. 극적인 반전은 소설 속에서도 소설 밖에서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단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이 5년 동안 말할 수 없었던 사실이 자신의 절친인 이팅과 이웃집에 살던 이원에게 전해지게 될 뿐이다. 그것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고백이 아니라, 그녀가 그동안 비통하게 써 내려간 일기를 통해서 알려진다. 이미 자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나쳐버리고 나서 전해진다. 그 일기를 이팅과 이원이 읽을 수 있을 때, 쓰치의 영혼은 그녀의 몸에서 떠나버렸다. 그리고 되돌아온다는 것은 기적이 될 만큼,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된 이후에, 너무 늦게 진실이 밝혀진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성’에 대한 암묵적 침묵이 당연시 여겨지는 사회와 그런 분위기가 당연시 여겨지는 것에 대해 동조, 침묵한 채 어떤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할 수 있는 문제를 문학적으로 고발한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서슴없이 가하는 말이 어떻게 그들의 마음속을 헤집어 놓는지 말한다.

 

“댓글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그녀에게 날아와 꽂혔다.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일말의 상상력도 없었다.”

 

쓰치말고 리궈화에게 성폭행을 당한 아이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잠재된 무의식적 토대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는 사회가 낯설지 않았다. “그럴 만하니까, 당한 거야”, “꽃뱀처럼 먼저 꼬리쳤을 거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떻게 그런 걸 말해?” 라는 말들이 생경하게 느껴진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비록 이 말을 신문 기사 댓글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이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저 익명의 대중에게만 이런 생각이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다.

 

"성교육이라니? 성교육은 성이 필요한 사람한테나 하는 거야. 교육이라는 게 다 그렇지 않니?"

그때 쓰치는 알았다. 이 이야기에서 부모의 자리는 영원히 비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수업에 무단결석해놓고 아직 수업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가정이 아이를 조금도 지켜줄 수 없었다. 스스로 낙원에서 걸어 나갈 때까지 그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성에 대해, 성폭력에 대해 편협한 시각을 가진 사회에선 친구도, 이웃도, 학교도 성폭행 피해자 스스로까지. 그 누구도 낙원에서 쫓겨나듯 도망치는 쓰치에게 “네 잘 못이 아니야. 이곳에서 떠날 사람은 네가 아니야.”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해주어야 한가는 생각조차 가지지 못했다. 쓰치는 이 비틀어진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고 싶었다. 터져 나오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싶어 했던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자신이 쏟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고 이원이 가정 폭력을 당하는 모습에 분노하며 토해낸 말을 읽는 순간 마음이 쓰라렸다. 이원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겪고 있는 폭력에 대한 목소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세상이 다 있어요? 어째서 피해자가 입 다무는 걸 교양이라고 해요? 어째서 남을 때린 사람이 텔레비전 광고에 나오죠? 정말 실망스러워요. 언니에게 실망한 건 아니에요. 이 세상이든 인생이든 운명이든 아니면 신이라고 부르든 뭐라고 부르든 정말 형편없어요. … (중략) … 그런 긍정적인 사고가 얼마나 세상에 영합하는 비열한 결말인지! 그런데 내가 그것보다 더 원망하는 게 뭔지 알아요? 차라리 내가 세속에 영합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차라리 내가 세상의 이면을 본 적도 없는 무지한 사람이면 좋겠어요."

 

소녀를 얼마나 잔인한 폭력하에 무방비하게 방치했는지가 선명하게 보여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 소녀의 약점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가해자라는 사실에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궈화가 “성을 금기시하는 사회 분위기가 그에게는 최고의 방패였다. 여학생을 강간해도 세상은 그게 그녀의 잘못이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 자신조차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죄책감 때문에 그녀는 그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죄책감은 아주 오래된 순수 혈통의 양치기 개였다. 어린 학생들은 온전히 걷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일어나 뛸 것을 강요당하는 어린 양이었다.”라는 속마음을 통해서 이 비정상적인 사회의 생리가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점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훌륭한 작품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의 감정이 리궈화 한 사람에게 전가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특별한 소설이자, 훌륭한 소설이다. 성폭행과 폭력은 흑과 백이 명확하게 드러난 문제다. 이보다 더 극명하게 선악의 이분법의 잣대를 가지고 갈 수 있는 주제도 없다. 하지만 그건 피해자와 가해자 개인만을 두고 보았을 때 일이다. 시야를 넓혀서 바라보면, 성폭력 문제를 흑과 백으로 바라볼 때 놓치는 것이 많다는 걸 이 소설은 작품 자체로 보여준다. 만약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이분법으로 이야기 서사를 그렸다면, 난 이 작품을 읽고 난 뒤에 이토록 무거운 감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소설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서사와 그 주변 사람들의 서사를 함께 끌고 나가면서 성폭행에 무방비한 사회 구조와 비열하고 더러운 인간의 욕망과 성폭행으로 무너진 한 개인의 참담한 심정을  너무도 아름다운 문장들로 세공하여 보여준다.
 
그저 자신의 비틀어진 욕망을 실현할 수단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던 그 잔혹한 폭력이 사랑으로 포장되는 건 충격적이다. 하지만 그 잔혹함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선 잔혹한 모습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참 아름다운 문장들이 오가는 틈새에서 잔인한 폭력성이 묻어 나온다. 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한 리궈화의 위선, 그 위선을 알지만 그 위선을 인정하는 순간 생을 포기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쓰치의 생각이 작품 속에서 교차되어 나타나는 대목들은, 사실적이기보다 문학적이다. 그런데 그 문학적인 표현이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드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인생에 대한 의욕, 삶에 대한 열정, 둥그렇게 뜨고 있던 커다란 눈, 아니면 그 무엇이든, 누군가 밑에서부터 그녀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와 모든 걸 비틀어놓았다. 허무주의도 아니고 도가에서 말하는 '무無'도 아니고 불교의 '무'도 아니었다. 그건 수학의 0이었다.” 이 표현을 통해 열세 살 스승의 날에 있었던 처음의 경험과 5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았던 잔혹한 폭력이 그녀의 몸과 생각과 마음 그리고 영혼 전부를 갉아 먹어버린 걸 너무나 잘 보여주었다. 자칫 자극적인 문장은 성폭행을 다룬 작품에서 작품 자체가 가십처럼,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가할 여지가 많다. 그리고 감정의 호소로 이 문제를 볼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닫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은 그렇지 않다. 작품은 문제의 심각성과 문제 자체를 문학적 표현으로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스물여섯 살의 작가는 자신의 글로 보여주었다.

 

이 소설은 끝에 희망을 보여주지만, 그 희망이 옅어 보이게 만드는 잔혹한 진실이 소설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쓰치의 이야기를 읽는 것을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느낌은 "아니. 우린 앞으로 행복하고 즐겁게 살 수 없어. 정직한 사람은 행복하게 살 수 없어."라는 이원이 이팅에게 말하는 어조와 같이 단단하고 담담하게 내 마음을 감쌌다. 그녀의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끝까지 읽고 싶었다. 글 속에 내 다짐을 부추기는 직접적인 표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작품을 손에서 떼놓을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작품은 작품 자체만으로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한 작품이지만, 작가의 죽음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사실이 성폭행 피해자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자살로 세상에 고발하는 모습과 오버랩되어 보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린이한이 어떤 심경으로 죽음을 선택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사실은 중요할 수 도 있고,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작품과 작가의 말을 통해 짐작할 수 있지만, 그 생각은 다음번에 생각할 거리로 남겨두고자 한다. 다만 린이한이라는 작가가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에서 보여주기까지 그녀 안에서 얼마나 많은 감정과 언어들이 태어나고 죽어갔는지 그 과정을 직접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 "작가인 나처럼 여러분도 쓰치를 동정하고 그녀에게 공감해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이 그녀 편에 서주길 바랍니다."라는 해석을 바라던 그녀는 침묵한 채 세상을 떠났고, 이제 그녀가 쓴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만 남았다는 사실이 더더욱 마음 아프다. 그리고 어딘가 쓰치와 같은 삶을 살고 있을 소녀가 있다는 점이 소설이 아닌, 현실이라는 점이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팡쓰치가 이 사회를 견디기는 너무나 힘겹다고. 자신의 죽음이 마지막이길 바란다고. 이 세상 어딘가에서 살아갈 팡쓰치가 죽음을 선택하지 않길 바란다고. 그리고 다시는 팡쓰치가 낙원에서 스스로 추방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이것만 생각하기에도 벅찬, 가슴 먹먹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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