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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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떻게 '기억'하는가.

기억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기억은 그 순간의 일을 즉시 남기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전의 사건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기억 속에는 나의 주관과 주체성이 담길 수밖에 없다. 좋았던 기억은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나의 의식 속에 담아 둔다. 반대로 나빴던 기억은 공포나 두려움으로 의식 속에서 괴롭히는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억 자체를 지워버린 채 기억을 망각한다. 또 시간에 따라 기억은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엔 선명했던 장면, 가슴을 일렁이던 감정들은 사그라들고 바래진 필름처럼 좀처럼 떠올리기 힘들다. 또 한편으로는 망각의 늪에 빠져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이, 예기치 못한 순간 튀어 나오기도 한다. 기억은 이렇듯 그 모습을 순간순간 바꾼다. 이렇듯 개인에게도 매 순간 그 모습을 바꾸는 기억을 여러 개 중첩하여 놓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8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만나면서 겪은 강렬한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을 엮은 책, 이 바로 <매혹당한 사람들>이다. 


여성만이 모여, 기독교 가치를 수호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던 미사 판즈워스 여자 신학교에 존 멕베니가 등장하며 평온했던 학교에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에너지가 감돌기 시작한다. 두 명의 선생님, 다섯 명의 학생 그리고 한 명의 흑인 노예와 적군인 존 멕베니의 만남은 미국 남북전쟁 상황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남북전쟁이라는 물리적 상황에서 겪는 갈등이 <매혹당한 사람들>의 핵심은 아니다. 남북전쟁이라는 배경은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다시 말해 9명의 사람들 모두 판즈워스 신학교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만남이 주는 긴장관계를 고조시킨다. 


적군. 부상병. 존 멕베니와의 첫 만남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알 수 없는 존재이자, 총을 겨누어야 하는 상대이자. 오래전 판즈워스 자매의 남동생이 떠난 뒤 금남의 구역화된 판즈워스 신학교에 남성의 등장에 대해 보인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 이들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이내 두려움에 대한 감정을 멀리하기보다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고, 해석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그 생각의 변화의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이들의 변화 과정이 멕베니를 자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며 두려움 대신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채운다는 점이다. 그 다른 감정이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 감정을 사랑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랑에 층위가 있다면 얕은 층위의 사랑의 감정일 수 있지만, 고귀한 형태의 사랑이 두려움의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이들이 두려움 자리 대신 채운 것은 자신의 결핍에 기초한 욕망이었다. 

멕베니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라 믿었지만, 이들은 멕베니를 통해 자신의 결핍된, 상처받은 부분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그를 대했다. 제때 학비를 내고, 부유한 아버지의 밑에 있었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꼈던 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 몰락의 가운데 있었던 이, 아버지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지만 만나지 못했던 이, 자신 없는 외모 대신 내면을 쌓았다 믿는 이... 이들은 모두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해결될 기미가 없는 마음속 공허한 부분을 멕베니와의 관계를 통해 채워나갔을 것이다. 멕베니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주변 사람이 아닌, 처음 보는 낯선 상대에게 말이다. (어쩌면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멕베니는 이들의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멕베니 스스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실현할 수 있는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8명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멕베니의 속마음이 8명처럼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몇몇 대화 지점에서 그의 욕망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단한 상황 이후에 그의 태도는 8명의 기억 속에서도 명확하게 달라진다. 


다르게 기억하고 다르게 생각했던 8명이 결말에 이르러서 내리는 결정에서 이들의 감정이 숭고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었음이 분명해진다. 그 과정은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에 대해 저자는 세밀하게 개인의 감정의 단면을 서술한다. 그래서 8개의 기억이 중첩된 마지막 결말의 충격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런 행복이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제 그런 생각은 안 해."
"다시 행복이 오면 기쁠까요?"
"음…… 그럴 것 같아.
하지만 똑같진 않겠지.
불행을 알게 된 순간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게 불가능해지거든.
그건 오직 순수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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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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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주의(pluralism).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개념어 중 하나다.

 

"사회는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권력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에 의하여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된다고 보는 사상" (네이버 지식백과)

 

이 단어가 과연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을까? 다원주의 사회의 원칙이 통용되기 위해서는 Property(경제적 이익), Power(정치적 힘), Prestige(사회적 명예)가 각각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3가지 요인의 분리가 다원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뉴스를 보면 3가지를 다 가지려다가 또 다른 P, Prison(감옥)에 가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저자는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2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1820년에는 세계 인구의 94%가 극도의 빈곤에 빠져 허덕였지만 1981년에 들어서면서 그 비율은 44%까지 떨어졌고,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현재는 10% 미만이다(12-14쪽)
네덜란드와 미국처럼 1800년 당시 가장 부유한 국가조차도 기대수명은 2012년 건강 지표상 최저인 시에라리온보다 짧았다(14쪽)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예전의 과거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갈 세상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면 모든 것이 이뤄지는 디즈니 영화와 같지 않다. 현실은 차갑고 냉혹하며 성공과 실패도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인 극심한 무한 경쟁의 장이다. 수많은 스펙을 쌓았음에도 취업은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에 종사하며, 설사 정규직이 되더라도 몸과 마음은 탈진하기 일쑤다. 연애, 결혼, 출산만을 포기하던 3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는 가짓수가 점차 늘어 9포까지 이르렀다.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경제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바꾸기 힘든 현실 속에서 자기계발, 힐링, 성공 사례(창업, 벤처기업, 창직 성공)의 가치를 통해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극소수의 몇몇만 성공할 뿐 대부분은 좌절하거나 실패한다.

 

저자는 오늘날 사회 원인이 "유토피아의 부재"에서 왔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비현실적인 디즈니 영화 속 세상이 아니다. 냉혹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환상이 아니다.

 

“유토피아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현재가 엉망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완성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상과 희망이 살아 있고 꿈틀거리는 세상이다.’” 33쪽

 

유토피아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청사진이다. 그리고 그 청사진의 조건은 특정한 사람들만 꿈꾸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대중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유토피아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유토피아 내용은 파격적이다.


1. 기본 소득 보장
2. 주당 15시간 노동
3. 국경 없는 세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하지만 저자는 단언한다. 오늘날에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AI 로봇이 보편화되어간다면 실현 못할 꿈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선입견과 우려를 이미 증명된 사례를 토대로 차근차근 반박해나간다. 인간은 게으른 존재이고, 나태해질 것이라는 편견, 노동을 신성시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 국경이 무너지면 세계 질서가 무너진다는 우려에 대해 반박한다. 저자는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내 삶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대한 상황, 이데올로기, 힘의 논리를 올바르게 통찰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 그 모순으로 인한 악순환에 대한 무지가 지금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혹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나, 그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생각하지 못한 채 지금의 구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이는 점 역시 문제라고 지적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혹은 무기력한 태도가 반복될수록 유토피아는 멀어진다. "진보는 유토피아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회의 모순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잘 못 자리 잡은 편견을 깨닫게 해주며 끝으로 사회를 바로 통찰할 수 있는 근거를 알려준다.

 

읽고 난 뒤에 생각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조건은 "삶 속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타인과 주변 환경이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파악하고.
그 영향에 휘둘리지 않는 것.

 

이렇게 변화한 개인들이 많아진다면 "헛되다(futility, 가능하지 않다.), 위험하다(리스크가 지나치게 크다), 사악하다(디스토피아를 초래할 것이다)는 이유"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 공격받는 일은 없지 않을까?

 

결국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는
시장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회이다.

그렇더라도 역사의 경로를 결정하는 요인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형성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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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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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22쪽


읽다가 멈칫 몇 번을 놀랬는지 모른다.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했고, 답답하기도 하고, 처연하기도 했다. 레누와 릴라, 두 사람의 20대에서 30대의 이야기는 하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엄마와 함께 읽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엘레나 페란테의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의 이야기는 20대의 나의 감수성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았다. 내가 살아온 적이 없는 시간 속의 적나라한 고백들이 적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일 때 겪을 수 있는 자신의 자식을 낳는 출산 그리고 그 아이의 엄마로 사는 삶에 대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부분의 감정의 전개에 있어서 난 레누와 릴라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라면,  나와 다른 이해의 폭을 가지고 이 작품을 보지 않았을까 싶었다.

결혼 그리고 출산, 엄마로서 삶과 작가로서 나의 삶. 그리고 금지된 사랑.

레누와 릴라. 순조로운 삶의 순간에는 마음이 불안했고, 험난한 일이 일어날 때면 마음까지 조급해진 마음은 두 사람의 삶을 걷잡을 수 없는 풍랑 속으로 이끌었다. 흥미로운 점은 레누와 릴라 모두가 잘 되고, 모두가 험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레누와 릴라의 인생 그래프의 간격은 평행선처럼 일정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두 사람의 우정의 거리만큼인 듯싶다. 마음을 다 보여줄 수 있는 친구에게 다 보이지 못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우리 엄마만큼 나이가 들었을 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를 읽으면 분명 지금과 다른 느낌을 받지 않을까 싶다.

 

 

떠나가도. 머물러 있어도.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레누와 릴라는 서로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최악의 최악을 더해가는 결혼 생활을 뒤로하고 별거를 했음에도.
하나뿐인 아들을 자신의 품에 두었음에도.
아들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일을 할 때도.
부당한 노동환경에 대항할 때도.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바라봐 주고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음에도.
릴라는 불안해한다.

후회할 지난 일을 글로 풀어내며 한 꺼풀 벗겨냈음에도.
처음 쓴 소설이 대 유행을 했음에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남편과 그의 가족과 가족이 되었음에도.
유년시절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가졌음에도.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
레누는 불안해한다.

 

그리고 그들의 불안은 쉼표도 없이 하루하루 시간 속에 함께 한다. 그 불안한 감정이 글 속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런데 마냥 표면적으로 두 사람의 불안한 감정을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에서는 다층적으로 표현한다. 두 사람의 삶과 연관된 여러 사람들의 관계가 바뀌고 그 변화의 흐름에 사회도 한몫을 하고 있다. 1968년도 68혁명이 두 사람의 삶을 자꾸만 비틀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은 자신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자신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존재가 점차 흐릿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결혼하며 깨어있는 사람인 줄 알았던 남편의 보수적인 모습에 레누는 좌절한다. 작가로서 자신의 삶을 접고 원하지 않았던 때의 임신과 출산을 한다. 결국 작가 레누는 점차 작가 세계에서 잊혀간다. 릴라도 다르지 않다. 별거를 함에 따라 경제적인 상황이 궁핍해지고, 생활을 위해 공장과 같이 노동시장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자유롭게 자산의 생각과 마음을 발산하던 릴라는 무기력한 삶을 반복한다. 하지만 읽다 보면 사회의 변화 속에 두 사람의 존재는 묻혀버리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그 변화 속에서 저마다의 모습을 살아간다. 두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하는 고민의 깊이는 더 깊어져가고 그 깊은 사유 속에 단단하게 쌓여가는 것이 있다. 물론 그 쌓인 것들이 내가 생각한 상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의 이야기 서사다.
앞선 <나의 눈부신 친구>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보다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진 이유는 레누의 변화 때문이다. 1,2권에서 레누는 자신 스스로 자존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릴라라면"을 놓지 않았다. 물론 이 생각은 3권에서도 이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만큼 레누는 점차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물론 그 생각의 끝이 니노와의 사랑이라는 점이 파격적이지만. 레누의 변화가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의 서사의 핵심이다. 그리고 릴라는 <나의 눈부신 친구>에서처럼 자신의 빛을 잃은 듯 그 빛을 감추어둔 듯 지내다가 본능적으로 미래지향적인 결정을 내린다.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예술적인 자아 표현을 하는 예술작품을 만들거나 컴퓨터 기술을 익히는 등의 행동을 한다. 그리고 <나의 눈부신 친구>의 초반부에서 확인했듯이 릴라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사라진다. 그리고 이에 대한 레누의 태도는 니노의 손을 잡고 떠날 때와 달랐다. 그 변화의 간격을 4권에서 어떻게 담아낼지 궁금하다.

얼른 11월이 되어 4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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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나폴리 4부작 2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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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뜨거운 여름 바다를 보았더라면

아쉬움을 달랠 겸.. 영국에서 바라본 대서양 사진이다.


엘레나 페란테의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10대 후반부터 이어진 레누의 굴곡진 삶의 이야기를 지하철 안에서, 도심의 카페에서 읽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태양이 바다 지평선과 닿는 해질 무렵, 이탈리아 남부의 이름 모를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읽었다면, 뒤엉킬 대로 엉킨 그녀의 마음의 타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우리는 인생을 두고 계획을 세우곤 한다.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나'를 만들어갈지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만의 청사진을 만들곤 한다. 그 계획은 작게는 어떤 마음가짐을 가질지부터, 학업 계획,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떤 사람과 사랑을 할지, 어떤 친구를 사귈지, 어떤 결혼을 할지 등 다양하다. 조금 다른 모습이지만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그 리스트를 체크하며 설렘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지 않은가. 
아무리 열심히 계획을 세워도, 아무리 머리로 생각해도 그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열심히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이 때로 한순간 변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하는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사람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한다. 이성적인 일에 사람의 감정이 끼어드는 순간, 그것은 머리로 하는 계획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고민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 고민을 명료하고 이성적 방법으로 해결하기는 참 힘들다. 아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고민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 레누가 경험한 일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믿었던 신랑에 대한 배신으로 끝난 결혼식 피로연, 신혼여행에서 '강간'당하는 신부, 가정 폭력, 혼외정사. 사랑하는 남자를 친구에게 빼앗긴 상실감과 반발심으로 그 남자의 아버지와 맺는 성관계 가출, 맞바람, 임신, 이혼...
-661쪽


옮긴이의 요약된 글처럼. 정말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건 사건 중심적인 요약으로, 이 요약은 소설의 핵심이 아니다. "친한 친구"라는 관계. 가족이라는 관계가 '나'의 자아 속에 침투해오며 생기는 고민들에 대해 풀어낸 이야기다. 그렇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누군가와 관계 맺기를 하고, 이미 맺은 관계를 끊기에 너무 가까이 살고, 너무 많은 시간을 공유했기에 멀어질 수 없는 존재가 '나(두 소녀)'의 삶에 침투해온다. 그리고 안타깝게 그 침투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두려움과 상처로 들어온다. 


남다른 천재성을 가지고 있던 소녀와 열등감을 두고서 천천히 배워나가는 소녀. 두 소녀는 상대방이 가지고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비교하며 상대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을 할퀸다. 서로의 마음을 할퀴는 것에서 육체를 상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서 가장 아프고 공허감을 느끼는 존재는 어김없이 '나(레누 혹은 릴라)'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다른 인물이 주인공이었다면, 다른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두 사람의 생각이 관계 속에서 뒤틀려 고민을 낳았다고만 한다면, 소설로서는 무언가 아쉽다. 잘못된 결혼과 사랑하는 남자의 아버지와 성관계라는 자신의 삶에 후회할 일을 했다로 이 소설은 끝나지 않는다. 두 소녀의 고민의 결과로 발생한 후회할 일을 저마다 극복하는 과정을 담는다. 특히 레누는 '소설'을 통해 이를 돌아본다. 이는 마치 박완서 작가님의 "내 안의 언어사대주의 엿보기"라는 글을 떠올리게 했다. 자신의 치명적인 치부를 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내면의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를 나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사건의 구성을 편집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리노를 사랑한 레누는 끊임없이 자신을 열등감에 휩싸이게 했지만 그럼에도 가장 믿었던 릴라에게 리노를 빼앗겼다는 사실과 그 사실에 충격을 받고 리노의 아버지 도나토 사라토레와 성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글을 통해 고백한다. 숨길 수 있다면 죽을 때까지 숨기고 싶은 일을 드러낸다는 레누의 행동을 통해 내면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가지 방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글을 쓴 레누의 감정을 따라가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지만 감정적으로 공감하는 부분들이 툭툭 마음에 박힌다. 1950년대 이탈리아 남부 도시의 이야기가 2017년 8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나의 마음에 말이다. 그들이 하는 행동을 내가 지금 하지 않지만, 그 행동 너머의 감정은 시간을 넘어 여전히 '나'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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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눈부신 친구 나폴리 4부작 1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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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말 친한 친구이자 내가 가장 미워한 친구.
이 아이러니한 관계를 소설로 풀어냈다.

친구를 떠올르게 하는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

 

 

나는 친구를 질투해본적 있다. 질투 뿐만 아니라 부러워한적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난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종종 부러워한다.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냥 친구와 달리 내가 그 친구의 장점을 더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수많은 친구의 좋은 점, 닮고 싶은 점을 말이다. 특히, 내가 시간과 노력을 더 들인 것 같은데 친구가 더 좋은 성과, 결과를 가지게 되었을 때, 마음 속으로 허탈함과 함께 친구에 대한 질투심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질투심을 입밖으로 쉽게 내뱉지는 못했다. 친한 친구에게 "난 네가 부러워."라는 말까지는 할 수 있지만, "어떻게 네가 더 좋을 수 있지."라는 어조의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다행인 점은 나의 경우에, 이 질투나 부러움은 순간이었던 것 같다.

<나의 눈부신 친구> 레누는 조금 다르다. 그녀의 가장 눈부신 우정은 질투가 불러온 감정과 뒤엉켜 있었다. 친한 친구이자, 라이벌이자, 삶의 생동감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 복합한 관계를 '친구'라는 이름으로 포장했고, '우정'이라는 단어로 정의내렸다. 하지만 '친구'와 '우정'이라는 단어 속에 내포된 감정의 층위는 깊이도 넓이도 달랐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것은 소설가 엘레나 페란테의 솔직한 감정 표현과 소설 속 상황 설정에 있었다.

레누는 마음 속 이야기는 읽는 이들로 하여금 지레짐작하게끔 만들지 않는다. 레누가 지금 마음이 얼마나 상했는지, 자존감이 약해졌는지, 진정으로 릴라를 좋아하는지, 릴라를 얼마나 의지했는지에 대해 거침없다. 반면 릴라의 감정은 이 소설 속에서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읽는 독자라면 알 수 있다. 릴라 역시 레누와 비슷하다. 릴라도 가정 형편상 할 수 없었던 것을 애써 덤덤하려고 하고, 레누를 가르치면서 때로는 자신이 느끼는 공허감을 채우려고 하고 있다. 레누는 보지 못했지만, 독자는 릴라 역시 레누가 느낀 감정을 릴라 역시 느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소설은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의 자존감을 세우지 못하고 친구에게 의존하는 류의 질투에 휩싸인 이야기가 아니다. 가장 친하지만 또 동시에 서로를 부러워하는 그리면서 자신의 결핍을 상대를 통해 확인하며, 한 발 더 나아간. 이 복잡한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이 설정의 배경을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이탈리아 남부 마을로 설정한 점이 흥미롭다. 패전국이었던 이탈리아의 상황은 세계 대전을 감당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었다. 문제는 패전으로 야기한 가난과 사회적 문제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일어났다. 특히 이탈리아 남부는 부유한 북부와 달리 더 전쟁의 상처가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 소설에서는 남부 지역의 경제적 어려움을 나타냈을 뿐만 아니라, 이 어려운 경제 상황을 이끌어 나간 이가 "마피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환경 속에 두 소녀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게 나타난다. 개인적 동기와 사회적 영향이 섞어져 이야기가 보다 입체적으로 느껴진다.

지금과 사뭇다른 환경의 이야기이지만,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는 여전히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공감을 불러온다. 그 상황과 여건이 다르지만, 느끼는 감정의 경험이 다른듯 닮은듯 공감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특히 "책"이라는 매개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점이 나의 공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릴라를 보며 나도 모르게 떠오른 친구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나보다 훨씬 책을 잘 읽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보지 못한 점을 발견하곤 했고, 이를 아무런 사심 없이 나에게 말해주곤 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될 수록 나는 레누가 그랬듯이 더 열심히 공부했고, 때로는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즐겁게 들었다. 나의 부러움은 지금 생각해보면, 서로의 관심사가 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와 내 친구가 좋아하는 분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즉, 내가 친구와 비교할 것이 없어지면서 질투심은 나와 친구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관계로 나아갔다.
릴라와 레누 역시 관심사 뿐만 아니라 삶의 환경 자체가 달라졌다. 고등교육을 받는 것과 일을 하고 결혼을 하는 것으로 달라진다. 그리고 그 다른 길을 걷는 것은 파국으로 치닿는 듯 싶다가, 서로가 느꼈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을 불러온다. 즉, 애써 감추려고 했던 다층적 우정이 그 가리던 마음이 벗겨진다.
내가 초등학교 때 친해져, 자라면서 서로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졌던 친구와 난 지금 연락을 자주 하지 않는다. 이따금씩 만나지만 피상적인 이야기만 할 뿐, 어린 시절 비슷하게 경쟁심을 가졌던 때의 공유를 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단지 이것만은 아니겠지만. 이 이유가 큰 것 같다. 우리는 레누와 릴라처럼 그때 느낀 질투를 결국 웃음으로, 우리가 생각한 우정이라는 좋은 감정을 포장해버려서가 아닐까. 우정의 다층적 면모를 인정해나가는 과정을 공유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왠지 모를 아쉬움 한조각을 남긴 책 한권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만족함을 듬뿍 주었다.)

 

 

 

 

밑줄친 문장...

 

리노는 머리는 텅비어 있고 가슴은 자기 생각만으로 꽉 차 있으니까.
16쪽

"부탁인데, 한 번쯤은 네 어머니가 바라시는 대로 해주렴. 어머니를 찾지 말아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한 그대로다. 어머니를 찾아봤자 소용없을 테니 그만두고 이제 제발 혼자 사는 법을 배워. 이제 네게도 연락하지 않으면 좋겠구나."
17쪽

우리가 천천히 어린 시절 우리가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공포의 대상에게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28쪽

릴라가 정말 알려고 했던 것은 '예전'의 기준이 되는 최초의 순간이 과연 존재했는지 하는 것이다.
39쪽

"릴라, 대체 누가 네게 글자를 가르쳐준 거지?"
자그마한 몸집에 짙은 색 머리와 눈동자, 그만큼이나 짙은 색 앞치마를 입고 목에는 분홍색 리본을 단, 기껏해야 6년의 세월을 살아온 릴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요."
48-49쪽

그의 침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복수에 마침표를 찍었다.
63쪽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릴라에게 무엇인가를 못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79쪽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러나 언젠가부터 생각이 바뀌어서 돈을 공부와 연결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공부를 열심히 하면 책을 쓸 수 있고 책이 팔리면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가 수많은 상자에 담긴 빛나는 금화 같은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 보물 상자들이 있는 곳까지 자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책을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 함께 책을 쓰기로 하자."
언젠가 릴라가 내게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88쪽

릴라라면 온 세상이 머릿속에 말끔하게 정된되어 있고 그 때문에라도 우리 주위를 둘러싼 세상이 엉망이 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느낌에 나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95쪽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마을은 마치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과거의 증오나 대립관계, 추악한 면으로 이뤄진 본연의 모습을 바꾸고 새로운 얼굴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139쪽

나와 릴라의 근본적인 차이는 내게는 동생밖에 없어서 어머니의 영향에서 벗어나면 릴라에게는 누구에게서든 그녀를 보호해줄 수 있는 리노가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든지 그에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148쪽

세상은 이렇게 밝고 따뜻한데 어째서 우리 동네만 폭력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는 걸까.
177쪽

릴라는 왜 항상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모다 빨리, 나보다 더 잘하는 걸까. 내가 따라가면 도망가면서 정작 자신은 언제나 내 뒤를 쫓아와 나보다 앞서나가려 하는 걸까.
182쪽

"사랑이 없으면 사람들의 인생만 황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삶도 황폐해지는 거야."
207쪽

"내가 오빠에게 행운은 길보퉁이에 있다고 믿게 했어."
234쪽

"이제 책을 빌리러 가지 않아. 책을 읽으면 머리가 아프거든."
나는 공부를 계속했다. 독서는 이제 즐거운 습관이 되었다.
하지만 릴라가 나에 대해 신경을 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릴라가 공부에서나 독서에서나 학교에서나 페라로 선생님의 도서실에서 책을 빌릴 때 나보다 앞서나가려고 하지 않고부터는 책을 읽는다는 것치 예전처럼 신나는 모험이 아니라 그저 내가 잘하는 일이고, 이일로 칭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일 정도로 느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44쪽

나는 릴라의 글솜씨에 또다시 수치심을 느꼈다. 그녀는 형상화할 수 있고 나는 그럴 수 없는 것 때문에 눈물이 앞을 흐렸다. 물론 학교에 다니지도 않고, 이제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지도 않는데 릴라가 그토록 뛰어나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다. 동시에 그 기쁨은 나를 불행하게 했고 나는 이런 감정에 대해서 죄책감을 느꼈다.
306쪽

나와 스테파노를 움직이는 방식을 보면 릴라는 자신을 가둔 새장에서 벗어나 자신조차도 모르는 자신의 참모습을 되찾으려 하는 것 같았다.
393쪽

"이제 다시는 네가 쓴 글을 읽고 싶지 않아."
"왜?"
그녀는 잠시 생각해 잠겼다.
"나를 아프게 하니까."
릴라는 이렇게 말하고는 손으로 이마를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400-401쪽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를 정해진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도 매우 만족할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는 그녀를 창백한 얼굴에 말총머리를 하고, 맹금류 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싸구려 옷을 입은 과거의 릴라로 되돌리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그녀에게서 동네의 재클린 케네디 같은 분위기를 걷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릴라를 위해서나 나를 위해서나 그것은 너무 비참한 일이었다.
413-4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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