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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 -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현실에서 만드는 법
뤼트허르 브레흐만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7년 9월
평점 :
다원주의(pluralism).
현대사회를 설명하는 개념어 중 하나다.
"사회는 여러 독립적인 이익집단이나 결사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권력 엘리트에 의하여 지배되기보다는 그 집단의 경쟁 ·갈등 ·협력 등에 의하여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된다고 보는 사상" (네이버 지식백과)
이 단어가 과연 우리 사회를 설명하는 단어라고 볼 수 있을까? 다원주의 사회의 원칙이 통용되기 위해서는 Property(경제적 이익), Power(정치적 힘), Prestige(사회적 명예)가 각각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3가지 요인의 분리가 다원주의 사회의 기본 원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뉴스를 보면 3가지를 다 가지려다가 또 다른 P, Prison(감옥)에 가는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저자는 지금 이 시대를 가리켜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200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1820년에는 세계 인구의 94%가 극도의 빈곤에 빠져 허덕였지만 1981년에 들어서면서 그 비율은 44%까지 떨어졌고, 수십 년이 지났을 뿐인데도 현재는 10% 미만이다(12-14쪽)
네덜란드와 미국처럼 1800년 당시 가장 부유한 국가조차도 기대수명은 2012년 건강 지표상 최저인 시에라리온보다 짧았다(14쪽)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예전의 과거를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갈 세상은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간절히 소원을 빌면 모든 것이 이뤄지는 디즈니 영화와 같지 않다. 현실은 차갑고 냉혹하며 성공과 실패도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인 극심한 무한 경쟁의 장이다. 수많은 스펙을 쌓았음에도 취업은 어렵고, 많은 사람들이 비정규직에 종사하며, 설사 정규직이 되더라도 몸과 마음은 탈진하기 일쑤다. 연애, 결혼, 출산만을 포기하던 3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는 가짓수가 점차 늘어 9포까지 이르렀다.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경제사회적 구조에 의해서 바꾸기 힘든 현실 속에서 자기계발, 힐링, 성공 사례(창업, 벤처기업, 창직 성공)의 가치를 통해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이러한 사회에서 극소수의 몇몇만 성공할 뿐 대부분은 좌절하거나 실패한다.
저자는 오늘날 사회 원인이 "유토피아의 부재"에서 왔다고 말한다. 저자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비현실적인 디즈니 영화 속 세상이 아니다. 냉혹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환상이 아니다.
“유토피아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현재가 엉망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가 원해야 하는 것은 완성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상상과 희망이 살아 있고 꿈틀거리는 세상이다.’” 33쪽
유토피아는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청사진이다. 그리고 그 청사진의 조건은 특정한 사람들만 꿈꾸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대중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유토피아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유토피아 내용은 파격적이다.
1. 기본 소득 보장
2. 주당 15시간 노동
3. 국경 없는 세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하지만 저자는 단언한다. 오늘날에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이라고 말이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AI 로봇이 보편화되어간다면 실현 못할 꿈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선입견과 우려를 이미 증명된 사례를 토대로 차근차근 반박해나간다. 인간은 게으른 존재이고, 나태해질 것이라는 편견, 노동을 신성시하는 사회의 이데올로기, 국경이 무너지면 세계 질서가 무너진다는 우려에 대해 반박한다. 저자는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는 내 삶을 결정하는 요인들에 대한 상황, 이데올로기, 힘의 논리를 올바르게 통찰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 그 모순으로 인한 악순환에 대한 무지가 지금의 구조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혹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나, 그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생각하지 못한 채 지금의 구조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움직이는 점 역시 문제라고 지적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혹은 무기력한 태도가 반복될수록 유토피아는 멀어진다. "진보는 유토피아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의 가치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사회의 모순을 바라볼 수 있게 하고, 잘 못 자리 잡은 편견을 깨닫게 해주며 끝으로 사회를 바로 통찰할 수 있는 근거를 알려준다.
읽고 난 뒤에 생각했다. 그렇다면, 유토피아의 조건은 "삶 속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타인과 주변 환경이 자신과 어떤 관계인지 파악하고.
그 영향에 휘둘리지 않는 것.
이렇게 변화한 개인들이 많아진다면 "헛되다(futility, 가능하지 않다.), 위험하다(리스크가 지나치게 크다), 사악하다(디스토피아를 초래할 것이다)는 이유"로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 공격받는 일은 없지 않을까?
결국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주체는 시장이나 기술이 아니라 사회이다.
그렇더라도 역사의 경로를 결정하는 요인은 기술 자체가 아니다. 결국 인간의 운명을 어떻게 형성할지 결정하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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