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당한 사람들
토머스 컬리넌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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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기억'하는가.

기억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 냄." 

기억은 그 순간의 일을 즉시 남기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전의 사건에 대한 나의 해석이 더해진 것이다. 그렇기에 기억 속에는 나의 주관과 주체성이 담길 수밖에 없다. 좋았던 기억은 더 아름답고 화려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나의 의식 속에 담아 둔다. 반대로 나빴던 기억은 공포나 두려움으로 의식 속에서 괴롭히는 존재가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기억 자체를 지워버린 채 기억을 망각한다. 또 시간에 따라 기억은 또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엔 선명했던 장면, 가슴을 일렁이던 감정들은 사그라들고 바래진 필름처럼 좀처럼 떠올리기 힘들다. 또 한편으로는 망각의 늪에 빠져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이, 예기치 못한 순간 튀어 나오기도 한다. 기억은 이렇듯 그 모습을 순간순간 바꾼다. 이렇듯 개인에게도 매 순간 그 모습을 바꾸는 기억을 여러 개 중첩하여 놓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8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을 만나면서 겪은 강렬한 그 경험에 대한 기억을 엮은 책, 이 바로 <매혹당한 사람들>이다. 


여성만이 모여, 기독교 가치를 수호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던 미사 판즈워스 여자 신학교에 존 멕베니가 등장하며 평온했던 학교에 이전에 찾아보기 힘들었던 에너지가 감돌기 시작한다. 두 명의 선생님, 다섯 명의 학생 그리고 한 명의 흑인 노예와 적군인 존 멕베니의 만남은 미국 남북전쟁 상황에서 벌어진다. 하지만 남북전쟁이라는 물리적 상황에서 겪는 갈등이 <매혹당한 사람들>의 핵심은 아니다. 남북전쟁이라는 배경은 인물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다시 말해 9명의 사람들 모두 판즈워스 신학교에서 한동안 벗어날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만남이 주는 긴장관계를 고조시킨다. 


적군. 부상병. 존 멕베니와의 첫 만남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알 수 없는 존재이자, 총을 겨누어야 하는 상대이자. 오래전 판즈워스 자매의 남동생이 떠난 뒤 금남의 구역화된 판즈워스 신학교에 남성의 등장에 대해 보인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알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두려움. 이들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이내 두려움에 대한 감정을 멀리하기보다 이들은 자신이 알고 있고, 해석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그 생각의 변화의 이유는 저마다 달랐지만, 이들의 변화 과정이 멕베니를 자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며 두려움 대신 다른 감정이 그 자리를 채운다는 점이다. 그 다른 감정이 처음에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읽어나갈수록 그 감정을 사랑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사랑에 층위가 있다면 얕은 층위의 사랑의 감정일 수 있지만, 고귀한 형태의 사랑이 두려움의 자리를 채우지 않았다. 

이들이 두려움 자리 대신 채운 것은 자신의 결핍에 기초한 욕망이었다. 

멕베니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라 믿었지만, 이들은 멕베니를 통해 자신의 결핍된, 상처받은 부분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그를 대했다. 제때 학비를 내고, 부유한 아버지의 밑에 있었지만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꼈던 이, 지역에서 존경받는 가문이 몰락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그 몰락의 가운데 있었던 이, 아버지를 찾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했지만 만나지 못했던 이, 자신 없는 외모 대신 내면을 쌓았다 믿는 이... 이들은 모두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해결될 기미가 없는 마음속 공허한 부분을 멕베니와의 관계를 통해 채워나갔을 것이다. 멕베니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한 주변 사람이 아닌, 처음 보는 낯선 상대에게 말이다. (어쩌면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멕베니는 이들의 모든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멕베니 스스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실현할 수 있는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8명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멕베니의 속마음이 8명처럼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몇몇 대화 지점에서 그의 욕망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계단에서 떨어져 다리를 절단한 상황 이후에 그의 태도는 8명의 기억 속에서도 명확하게 달라진다. 


다르게 기억하고 다르게 생각했던 8명이 결말에 이르러서 내리는 결정에서 이들의 감정이 숭고한 의미의 사랑이 아니었음이 분명해진다. 그 과정은 충격적이지만 그 충격에 대해 저자는 세밀하게 개인의 감정의 단면을 서술한다. 그래서 8개의 기억이 중첩된 마지막 결말의 충격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런 행복이 다시 올 거라고 생각하세요?"
"이제 그런 생각은 안 해."
"다시 행복이 오면 기쁠까요?"
"음…… 그럴 것 같아.
하지만 똑같진 않겠지.
불행을 알게 된 순간 순수한 기쁨을 느끼는 게 불가능해지거든.
그건 오직 순수한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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