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확실히 활용할 수 있는,
우리의 생각을 대단히 풍성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
여러 세기에 걸쳐 선택되어왔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 이 세계에서 석유보다 더 부족한 게 되었다. 우리가 최소한 아주 약간만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말 '공감의 시대'일까?
'공감의 시대'라는 뜻이 우리 사회, 인간 사이의 관계에 공감이 넘친다는 의미라면, 동의하기 망설여진다.  '공감의 시대'라는 뜻이 공감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는 뜻이라면, 우리의 시대정신에 '공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동의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하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를 가리켜 경쟁 사회라고 말한다. "경제학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소비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생물학자는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단어들 속에 담겨있는 논리는 "경쟁은 미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치열하게 남들과 경쟁해야 하는 요즘 공감은 성립할 수 없는 것 혹은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공감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재화'처럼 여겨진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재화를 생산한다 해도, 내게 다시 돌아올지 불확실한 재화. 그렇기에 공감과 이해, 배려가 점점 줄어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게까지 보인다. 주말드라마의 어떤 캐릭터는 "역지사지"를 우리가 아는 의미와 전혀 다르게 풀었다. "역으로 지랄을 해줘야 사람들이 지 일인 줄 안다". 아이러니하게 이 대사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내 주변을 향한 배려가 담긴 공감이 부재했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세계적인 동물행동학자이자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공감의 시대>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며, 공감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한다.

 

우리가 거의 조절할 수 없는 자동적인 반응, 공감

 

"우리는 공감을 억누르거나 정신적으로 차단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기에 실패할 수는 있지만,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소수의 인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거의 질문된 적 없지만 아주 기본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왜 자연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장단을 맞추어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면 괴로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기쁨을 느끼도록 인간의 뇌를 디자인했을까? "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인간에게 '공감'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다. 멘델의 유전법칙과 같이 기존 자연과학적 법칙의 핵심 테제였던 "생존경쟁"이 아닌 "공감" "공공성" "이타성"의 자연과학적 근거를 동물행동학과 진화론의 관점에서 타당성 있게 분석한다. 영장류를 비롯한 포유류와 조류 등의 동물들을 분석하며, 공감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화된 본능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마주했을 때, 비용과 이익을 합산해서 도울지 말지, 공감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걸 우린 오랜 시간 진화를 거쳐오며 몸으로 체화했다. "진화가 일어나는 동안 행동의 결과를 반영하면서 자연 선택은 영장류가 적절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도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공감 능력을 부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망설인다면 오랜 시간 축적해온 데이터 대신 근시안적 데이터만을 고려한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판단과 먼 비합리적인 결정을 합리적이라고 우기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일지 모른다.

"자연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특성들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낙관적인 사회적 성향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공감이 줄어들고 있고 이는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당연한 일이라는 가정. 공감은 회복해야 하는 우리의 소중한 옛 가치라는 이야기. 그 전제에는 '공감'을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학자와 정치인은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범"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사실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의심은커녕, 심지어 당연하다고 말한다. 물론 경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본성 중의 하나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만 있지 않고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감하는 인간, 이타적인 인간의 모습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홀로 살지도,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며 살지 않았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았고, 공동체 안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사회적 삶에 맞게 만들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지난 역사를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을 제외하고, 사람에게 가하는 가장 큰 형벌이 "독방 감금"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사회와의 단절을 가하는 것이 가진 의미가 얼마나 큰 지 반추할 수 있게 한다.

저자는 "모든 사회는 이기적 동기와 사회적 동기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 그 사회의 경제가 바로 그 사회에 확실히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즉 경쟁만으로 우리 사회는 '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도 만들 수도 없다. "자유시장 체제"의 선두에 서있는 미국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 더 나은' 사회일까? 초현대 사회의 미국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빠르게 발전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경쟁이 낳은 수많은 문제가 미국 사회를 병들어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의 본성 공감에 대한 강조가 균형을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더 나은' 공감은 무엇일까?


높은 수준의 공감은 자아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자아의식의 여부는 거울 실험으로 알 수 있다.

 

프란츠 드 발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감에 있어서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공감은 내가 타인에게 동화되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우리는 놓이게 된다. 만약 이때 개인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타인 지향적인 공감"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데서 기쁨을 얻지만 이때 얻는 기쁨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문제는 만약 이렇게 이루어지는 공감은 타인에 의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타인에 의해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에 휩싸일 여지도 크다. "자아의식은 닻과 같이 자기 자신의 배를 감정의 파도 속에서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라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의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불만, 불안, 혼돈이 일어날 여지가 있다. 타인을 도울 때 일어나는 공감, 타인을 돕지 않으면 나까지 불쾌해지기에 하는 공감은 자신에게 이익처럼 보이지만 해가 되는 공감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 공감은 개개인의 자아의식이 존재 속에서 각자의 자유와 자율성 및 공감에 대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내려진 공감이 진화되어 온 공감이 더 발전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자아의 결정에 따라 공감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질문은 이 시대에 공감한다는 것은 나에게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공감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지금의 상황에 돌아온다. 프란스 드 발은 "진화는 공감과 동정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있든 없든 작용되는 독립형 메커니즘"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즉, 공감은 우리가 익숙한 경제학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사회적인 다리와 이기적인 다리라는 두 개의 다리"를 이용할 수 있다. 사회적인 다리를 쓰려고 하니 나만 쓰는 것 같아 아깝고 억울한 것 같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올까.  두 개의 다리 중에 하나의 다리로 걷기를 희망한다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 걸음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에 많이 힘들기에 다른 선택을 하길 진화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토대를 이용해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저자가 공감을 말하지만, 무조건적인 공감을 말하고 있지 않다. "공감이 진화적으로 오래된 것이라는 데서 굉장히 긍정적인 면을 본다. 그렇다면 공감이 거의 모든 인간에게서 발달될 확고한 특성이며, 그래서 사회가 공감에 의존하고 공감을 포용해서 키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공감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다.

"공감에는 우리가 반응해야 할 것을 걸러주는 필터와 꺼버리는 스위치가 있어야 한다. 모든 감정적 반응이 그렇듯 공감에도 전형적으로 공감을 촉발하거나 우리가 공감의 촉발을 허락하는 상황, 즉 '정문'이 있다."

하지만 공감의 보편성의 전제는 자기 정체성, 자아라는 걸 다시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즉, 나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정문 지킴이는 바로 '주체성'이다. 자신만의 rational이 확고하게 자리한 고유한 정체성이 중요하다. 


우리의 '공감'은
재도약의 분기점에 서 있을까. 하강의 기점에 서 있는 것일까.

 

공감은 오랜 시간 진화 과정을 거쳐오며 인간의 본성의 영역에 장착된 메커니즘이 되었다. 물론 지금 현대 사회에서 공감이 불필요한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 개개인의 자아의식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 공감은 불필요한, 무용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인류가 진화한 시간으로 볼 때, 지금의 고민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 동안 '공감'이 나아가는 발걸음을 거꾸로 돌리려고 했다. 나는 공감이 어디로 향하길 바라고 있을까. <공감의 시대>를 읽으며 공감한 난, 공감이 재도약의 분기점에 서있길 바라는 공감하는 사람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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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 - 대한민국 최고의 힙합 아티스트 12인이 말하는 내 힙합의 모든 것
김봉현 지음 / 김영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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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죠.
늘 음악 듣고, 생각하고,
작업하고, 음악도 틀러 가고.
힙합에 대해 한 가지의 정의를 만들어서
여기에서 벗어나면 다 가짜라고 말하는 행위는
저에겐 더 이상 의미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의미 없는 세상이기도 하고요.

 

 

빈지노, 스윙스, 산이, 타이거 JK...
내가 아는 아티스트는 이 4명뿐이었다.

도끼, 더콰이엇, 팔로알토, 제리케이, 허클베리피, 딥플로우, JJK, MC메타...
내가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될 아티스트가 8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설레하며 읽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중적으로 유행했던 힙합 노래 (심지어 그 노래들도 힙합 단독 곡인 경우는 거의 없다.) 정도만 알고 있으며 힙합 장르에 대한 이해도 없었다. 더 솔직하게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었다. 그런 내가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을 읽으며 '힙합'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편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글을 읽는 건 좋아하면서, 그 어떤 음악보다 가장 많은 텍스트를 들려주는 힙합에는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았다. 아니, 의식적으로 피했던 음악 장르였다. 내가 자라온 환경이 힙합 음악을 많이 접하지 못했기 때문도 있었고 힙합 가사에 크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실 음악은 익숙함의 결과다. 어떤 음악을 들었고, 어떤 음악적 환경에 있었는지에 음악에 대한 생각은 결정된다. 난 '선율'이 주를 이룬 음악을 음악이라고 여겨지던 환경에 자라온 사람이었다. '비트'가 주를 이룬 음악은 낯설었고 그 낯섦은 거부감으로 바뀌었다. 우연히 힙합 노래를 들을 때면 낯선 말과 욕설이 불편했고 때로는 불쾌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이따금씩 들었던 힙합 노래는 발라드 중간중간에 빠르게 쏟아내는 랩이나 빠른 비트의 노래 혹은 아이돌 음악의 중간에 등장하는 랩이 전부였다. 길게 서술했지만, 짧게 줄으면 "난 힙합을 전혀 알지 못했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을 읽으며, 12명의 아티스트의 노래를 1곡 내지는 2곡을 들었다. 음악을 들은 이유는 간단했다. 비트를 텍스트로 옮겨진 것을 보고 비트를 추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난. 어떤 음악이기에, 어떤 가사의 리듬을 가지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장르를 좋아하고, 이 가수의 음악에 공감하는 것일까. 순수하게 궁금해서 들었다.

도끼 <치키차카초코초>
더 콰이엇 <Came from the Bottom>
빈지노 <January> <Aqua man>
팔로알토 <Forrest Gump> <Seoul>
제리케이 <축지법>
스윙스 <황정민>
허클베리피 <Everest>
산이 <아는 사람 얘기>
딥플로우 <양화>
제이제이케이 <결>
타이커 JK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
MC 메타 <무까끼하이>

다른 듯 닮은 듯 생경한 노래를 들으며 읽다 보니 "힙합을 아주 조금 알게 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말 아주 조금 알게 된 사람 말이다.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에 나온 12명의 아티스트는 '아티스트'라는 자신의 수식어에 어울리는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술가로써, 힙합이라는 문화에서 음악을 생산하는 예술가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것이 좋은 음악이며, 어떤 것이 좋지 않은 음악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힙합을 하는 사람이고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가진 무게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힙합이라는 장르가 주는 자유로움이라는 이미지 속에 책임을 감추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마음속의 마음의 별과 저 하늘에 떠 있는 이상이라는 별 사이의 조화로움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아티스트'들이었다.

본인이 내키는 것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할까요. 현실과 타협하기 위해서 본인이 내키지 않는 것을 하는 것이 가짜라고 생각해요.
……
저희도 많은 경험을 해왔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살고 있거든요. 더 좋은 뮤지션이 되기 위해, 더 좋은 인간이 되기 위해 더 애를 쓰죠. 


내가 가지고 있는 편견이 하나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힙합은 '무책임한' 음악이었다. 자유로움을 표현하며, 사회의 모순을 꼬집는다는 이유로 무엇이든 한없이 인정되는 음악 장르, 그렇기에 책임감이 없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했다. 욕을 하고 디스를 하고, 순간의 감정이 주는 것을 토로하는 음악. 사회에 예술이라는 형태로 무언가를 내놓으면서 책임감이 크지 않은 음악. 하지만 12명의 아티스트는 인터뷰를 통해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힙합을 하며 자유로움은 방종이 아닌 자유였다. 책임이 동반된 자유. 팔로알토의 인터뷰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만드는 음악을 사람들이 듣고 영향을 받잖아요. 이런 부분을 다들 어느 정도는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의 생각에는 방종을 노래하는 힙합이라는 편견과 달리, 책임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장르였다. 그렇다면, 힙합이 예술로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밀리언달러 힙합의 탄생>을 다 읽고 나서 난 힙합 팬이 되지는 않았다. 힙합 음악을 더 듣게 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내 플레이어 리스트의 상단에는 김동률, Ed Sheeran, 아이유, Coldplay, 태연, Sweet Sorrow, Ellie Goulding가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힙합 음악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즉, 나도 모르게 배제하며 거부했던 힙합을 그 '음악'장르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생에서 100퍼센트 행복한 일이라는 건 없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걔도 카페를 하면서 어려운 부분도 있고 스트레스도 받겠죠. 하지만 꿈을 이루며 사는 삶이라고 해서 100퍼센트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꿈을 이루는 것과 행복한 것은 어느 정도 별개라는 걸 깨달았어요. 사람 사는 건 다 똑같다고 할까. 꿈을 이루든 그렇지 않든 둘 다 마냥 행복할 수는 없겠죠.

앨범에 넣을 가사를 공들여 쓰는 일은 마치 조각상을 깎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다시 고치는 일을 반복하면서 정교한 완성품을 만들잖아요.

존중, 존경, 동경 이 세 개가 다 담겨 있는 거죠. 제가 생각해보니까 리스팩트를 한국말로 온전히 담아낼 단어가 없더라고요. 리스펙트의 의미는 ‘난 널 존중해‘로는 부족해요. 또 ‘존경해‘는 너무 센 말일 수 있죠. 존중, 존경, 동경 이 세 개가 적절히 섞여 있는 것 같아요.

래퍼들은 자신의 삶이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저의 삶에 저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와 함께 행복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을 평소에 하다 보니까 다른 사람의 삶도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이야기에 담게 돼요. 그러다 보니 다른 래퍼들이 나의 삶과 나의 성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저는 다른 누구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삶이죠. 늘 음악 듣고, 생각하고, 작업하고, 음악도 틀러 가고. 힙합에 대해 한 가지의 정의를 만들어서 여기에서 벗어나면 다 가짜라고 말하는 행위는 저에겐 더 이상 의미 없는 것 같아요. 그런 게 의미 없는 세상이기도 하고요.

어떨 때는 서울이 지긋지긋하고 너무 각박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저는 서울에 살면서 팔로알토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고 결혼도 하고 가정도 이루고 집도 사고 행복하고 좋은 일도 많았죠. 또 공연하러 가거나 클럽에 음악 틀러 가면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일을 같이 하면서 진실된 감정을 느끼기도 해요. 하지만 어떨 때는 그게 진심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이 모든 것이 거품이고 언젠가는 없어질 거라고 느껴질 때도 있고요. 마치 서울이란 도시가 나와 ‘밀당‘하는 듯한, 그런 감정을 표현한 가사였어요.

무언가에 대해 길게 얘기하면 ‘설명충‘이라고 하고, 진지하면 ‘진지충‘이라고 하고. 이런 게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정서가 됐어요.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다 바보가 되고 있는 거예요. 래퍼들도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누구든 한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아야 하고, 자기가 무얼 하든 서로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면서 살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살인도 당연히 불법인 거고요. 우리 모드가 ‘human being‘이니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힙합도 당연히 마찬가지죠. 생각하는 것을 차단하고 사람들을 멍청하게 만들어버리면서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며 쾌락만을 좇으면 안 된다고 봐요. 나의 내 가족, 내 사람, 우리가 함께 살아갈 공동체가 행복하게 나아가야 할 방향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자기가 가사를 쓸 때 그 공간에 같이 있는 사람이 같이 써도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주체가 자기가 되어야겠지만, 남이 써준 가사로 랩을 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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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서점기행 (보급판)
김언호 글.사진 / 한길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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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을 가면서, 여행하면서
책을 생각하고 책을 기획한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란
언제나 즐거운 여행이다.


여행지에서 서점에 가는 건 내 여행의 필수코스다. 만약에 서점을 가지 못하면, 공항 면세점 서점이라도 기웃거리며 그 나라의 그 도시의 책이 무엇이 있을까. 살펴보곤 한다.

제대로 읽을 수 있는 우리나라 서점은 익숙하고 푸근하다.
더디게라도 읽을 수 있는 영어권 서점은 낯설기보다 반갑다.
읽을 수 없는 언어로 가득찬,
가령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 인도네시아어 책이 주로 있는 서점은 신비롭고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어떤 이유로든, 서점은 나에게 반가운 공간이고 수많은 책속에 둘러 싸여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된다.

그런데 나처럼, 아니 나보다 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세계 서점 기행> 저자 김언호다. 세계 곳곳의 서점을 다니며 서점의 이야기, 책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기록한 책을 냈으니 더 할말이 있을까? 책을 읽다보면, 그가 서점을, 책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며 그 소중히 여기는 마음 속에 깃든 책에 대한 철학까지 옅볼 수 있다. <세계 서점 기행> 책에서 그가 소개한 22곳의 서점 가운데 난 2곳을 다녀왔다. 책에서 다시 2곳의 서점을 만나니, 올 여름 여행 중간에 나에게 쉼을 주었던 '돈트 북스'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가 떠올랐다.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돈트 북스


"건물이 아름답다고 명문서점은 아닐 것이다. 비치하고 있는 책과 그 책을 골라내는 서점인들의 철학과 헌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런던 시민들의 안목과 성원이 돈트 북스를 명문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

"수준 있는 책을 잘 비치해놓는 것이 우리 일입니다. 독자들이 편안하게 책을 살펴볼 수 있게 하려 합니다."
 

여행자들의 천국, 여행자들을 위한 서점이 바로 돈트 북스다. 영국 여행을 하고 있다면 꼭, 들려보길 권한다. 한참 영국 여행을 하고 있던 나에게 돈트 북스는 좋은 여행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여행 초반에 이 서점에 가서, 런던에 대한 책, 우리나라에선 좀처럼 찾기 힘든 콘월에 대한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라별로 정리된 책의 세계"를 비치한 곳이 돈트 북스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유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채광과 함께한 돈트 북스는 "자연의 빛을 몸과 마음으로 받을 수 있는 곳"이다.
 


"휴고 보스와 샤넬의 광고 모델인 르페르는 이 사진에서 명품 핸드백 대신 녹색과 흰색의 린넨 천으로 만든 돈트 북스의 쇼핑 가방을 들고 있었다. 친환경 천가방이 패션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돈트 북스는 일약 세계인에게 알려졌다. 세계의 서점으로 그 명성이 확고해졌다. 돈트 북스는 30파운드 이상의 책을 사면 작은 가방을, 70 파운드 이상이면 큰 가방을 선물한다."

이 사실을 알고 가며 마음 속으로 돈트 북스 굿즈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30파운드어치 책을 고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런던에 대해 수채화 풍경을 그리듯 그린 책과 영국 전역에 대한 여행 소식을 담은 책의 가격을 합치니 70파운드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30파운드 쯤은 금방 넘겼다.  하지만 문제는 그 2권의 책을 가지고 다닐 생각을 하니.. 가지고픈 마음보단 가벼운 어깨의 소중함이 더 크단 걸 알았다.

또 런던에 온다면, 제일 먼저 이곳에 가야지. 이곳에서 내가 갈 여행 장소에 대한 책을 사고, 내 여행 내내 돈트 북스 쇼핑백을 들고 다녀야지.

언젠가 반드시 이뤄지리리라 굳게 믿으며 아쉬움 한자락을 남기며 난 서점을 나왔다. 내가 이 바램을 꼭 이를 수 있도록 "품격있는 서점"으로서, "서점은 오직 '좋은 책'으로 존재하고 일어선다"는 가치를 잊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를 반겨주길 바래본다.



신성한 공공기구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젊은이들의 이 짧은 자서전들은 자신들의 고백록 같은 것이다. 쌓여 있는 자서전에는 삶과 죽음, 꿈과 절망을 담은 사연들이 담겨 있다. 청춘의 고뇌를 보여주는 일종의 사회사적 기록이기도 하다."

"입구 계단에는 '인류를 위해 살아라'라는 구절이 보인다. 바닥엔 '배고픈 작가들을 먹게하라'고 새겨놓았거 2층으로 오른느 머리 쪽에는 '낯선 사람을 냉대하지 마라. 그들은 천사일지 모르니'라는 성서 한 구절을 새겨놓았다."


신성한 공공기구를 기대하고 방문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는 이전에 숱한 역사 속에서 변화했던 파리와 같이 변화했듯이 살벌한 유럽의 분위기와 닿아 있었다. 서점 입구를 지키고 선 보안 요원을 보고, 파리 어디를 들어갈 때든 만났음에도 이 곳에서 만났을 때 더 씁쓸하게 느껴진건 이 서점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서점기행>의 내용처럼 서점을 지금도 일구고 있는지. 처음에는 알 수 없었다. 서점이기보다 관광지라는 느낌이 강했다. 오랜 자리를 지켜온 책들이 자신의 몸에 쌓아 놓은 먼지를 눈으로만 가늠하기도 비좁은 이 공간은 마치 보들리안 도서관 투어처럼 눈으로만 이 장소를 담게 했다. 적어도 1층은 그랬다.


하지만 2층은 달랐다. 피아노가 놓인 방의 나무로 엮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어느 남자가 들어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물끄러미 보는 내 눈치를 본건지 건반 몇 개를 누르는 것에서 꽤나 듣기 좋은 멜로디를 갖춘 선율을 마치고 미소를 짓고서 서점을 내려갔다. 그 순간의 경험은 영화에서, <세계서점기행>에서 내가 상상했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가 실제가 되는 순간이었다.

프랑스어에 대한 콧대가 가장 높은 파리에서 만난 영어권 책을 전문으로 다루는 이 곳은 낯선 프랑스어에서 천지인 파리에서 반가운 서점이었다.
이곳은 수많은 예술가를 머무르게 했듯이, 수많은 여행자들을 머무르게 하는 서점이다. (내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납득할 수 있으나, 피아노 연주를 듣던 그 순간이 내 머리에만 있으니. 참 아쉽다.)


독자들과 함께
왜 책인가
책 읽기란 무엇인가
왜 서점인가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를 토론하고 싶다.

진지한 고민 하나하나가 담긴 22편의 여행기를 읽으며 책과 서점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나에게 서점은 편안한 쉼이고 세상과 만나는 교차로이고 수많은 영감을 떠오르게 하는 샘이다. 시간이 지나 책과 서점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책과 서점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으니까. 그 변화가 사라짐으로 나아가는 건 두려운 일이다. 나중에 책과 서점이 '옛날의 향수'에 젖어든 씁쓸함이 아닌 여전히  '현재와 호흡하는 담론의 장'으로 존재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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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투쟁 1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손화수 옮김 / 한길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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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그건 소설이라고 할 수 없어.
칼 오베!
이야기를 풀어놓으라고.
서사가 바탕이 되어야 해.
이야기를 해, 칼 오베!

한 남자는 계속 이야기한다. 자신의 지난 하루하루를, 자신의 지금의 하루하루를, 지난날의 감정을, 지난날의 감정을 기억하는 나의 감정을 계속 이야기한다. 특별한 사건도 없이 소리 없이 내리는 눈처럼 계속 쌓여가는 이야기, 그것이 <나의 투쟁 1> 속 칼 오베라는 남자의 이야기다.

여느 소설과 다르다. 끊임없는 이야기가 이어질 뿐, 특별한 사건도 주인공이 부각되는 일도 나타나지 않는다. 일상적이라는 표현 그 자체다. 하지만 그 일상을 끊임없이 따라가는 이야기가 많지 않아, 일상에 대한 나열 자체가 흥미로운 소설이 <나의 투쟁 1>이다. 처음에는 일상이라는 계열축들이 만들어낸 통합축의 이야기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 문학을 많이 읽어왔기에. '그냥'이나 '이유 없이'나온 문학을 만나는 일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문학이라면, 소설이라면 이는 생각 속에 잡혀있는 그런 개념과 참 달랐다. 마치 중학교 때 처음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읽고 느낀 생경함처럼 <나의 투쟁 1>은 낯설었다. 의식의 흐름이 더는 낯설지 않지만, 처음 의식의 흐름을 만났을 땐 이야기가 심심했고, 이상했다.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고백을 해나가는 게 비슷해서 박태원의 소설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극적인 서사가 없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와 비슷해 보이지만, 끊임없이 이야기 내 상징물들이 파편화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는다. 계속 지독할 정도로 일상만을 이야기한다.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하는 일은 <나의 투쟁 1>에 없다.

"나는 수년 동안 내 아버지에 대해 글을 써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았다. 아마 내 삶에 너무나 가까운 소재였기에 문학이라는 틀 안에 가두어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글을 쓰는 데 필요한 한 가지 법칙은 이야기를 다듬어 문학이라는 형식과 틀 안에 가두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체, 구성, 플롯, 주제 등 문학을 이루는 세부적인 요소가 문학이라는 틀보다 더 클 경우 그 결과는 보잘것없다. 흔히 문체나 주제에 강한 작가들을 보면,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학은 허약하고 미미하다."

<나의 투쟁 1>이 작가에게 특별하다는 것은 소설 곳곳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다. "40년의 삶을 모두 담아낸 그의 '자화상 같은' 소설"이라는 수식이 어울릴 정도로 이 소설은 마치 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고백하는 이야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나의 투쟁 1> 속 일상의 묘사는 납득할 수 없다. 자신의 삶에 대한 치밀한 묘사는 마치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 보이는 풍경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리게 만든다. 내가 주인공을 스토킹하듯이 그의 삶의 순간순간 경험을 채집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니고서야, 한 남자의 삶의 순간순간을 이토록 자세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모순적이지만, 그의 자전적 이야기일지 모른다는 사실(?)이 흥미롭지만 <나의 투쟁 1>이 작가 칼 오베의 이야기이든 또 다른 칼 오베의 이야기이든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의 자전적 고백일지 모르는, 혹은 작가의 순수한 창작물 속 인물의 고백이 '나'라는 개인에게 어떻게 전해지는 가가 중요하다.

"나는 이것들에게서 죽음을 느꼈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나는 이것들에게서 저항감을 느꼈던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이란 삶과 생명을 종식시키는 개념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숨결이 부재된 개념의 죽음이다."

<나의 투쟁 1> 속에서 큰 사건이라면 "아버지의 죽음"이 있을 것이다. 수많은 사건의 계열들의 축에는 아버지가 놓여있다.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나'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과정을 참 길게 이야기한다. 길수 밖에 없었다. 주인공과 아버지의 사이가 멀기에. '아버지'도 '죽음'이라는 것 모두 멀리 있는 것인데, 두 가지가 합쳐진 건 얼마나 '나'에게서 멀리 있겠는가. 길지 않고 짧은 이야기였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물리적 공간을 공유했지만,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마음속 정서적 영역을 공유하지 못했기에 600여 쪽을 이야기하고도 다 하지 못한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야기가 참 길다. 680쪽. 숫자로 적으면 참 쉽지만, 손에 잡히는 묵직한 책의 두께 촘촘하게 매워진 종이 속 글자들을 보면. 숫자와 다른 길이감이 묵직하게 마음에 내리 앉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길지만 지루하지 않다. 살아있는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오직 타인을 통해 전해진 울림으로만 접해지는 그 죽음, 알 수 없는 죽음을 우리는 너무 신성한 영역으로 막아두지 않았는가.라는 문제 제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죽음은 그저 죽음 자체이며, 그 죽음과 주인공은 마주 서기 위해 '이야기'를 꺼낸다. 아주 사소하고, 별거 아닌 일상을 통해 서서히 죽음에 다가간다. 세밀한 일상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잊힌 아버지의 죽음은 일상의 영역으로 끌어온다. 미뤄지기도 하고, 다시 일상으로 편입한 죽음은 '신성한 의미, 꺼내기 쉽지 않은 무언가'라는 의미와 다른 의미로 서서히 다가온다.
저자는 꽤 긴 이야기와 일상을 말했음에도 죽음을 모두 다 꺼내지 않았다. <나의 투쟁 1>에서 죽음은 언어가 다른 언어 속으로 자신의 의미를 숨겨나가듯이 일상에서 또 다른 일상으로 미끄러져 도망친다. 하지만 그 도망친 자리자리마다 남긴 이야기가 '생'의 파편들은 나의 생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다.

"내일이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항상 더 밝게 다가오기 마련이니까. 새롭게 시작되는 다음 날의 빛 앞에서는 희망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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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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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영국 
1936년 스페인 

두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해 만나는 그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 바로 <뮤즈>다. 제시 버튼의 <미니어처리스트>를 읽었기에, 그녀의 신작은 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주인공이 '나'를 깊이 생각해 나가는 서사를 탁월하게 표현한다. <뮤즈>에서도 오델과 올리브가 자신의 욕망을, 열정을 피워내는 과정 속에 그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미니어처리스트>보다 훨씬 쉽게 마음 속으로 이야기가 전해졌다.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 이야기를 내 안에서 꺼내는 방식이 저마다 다를 뿐,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침묵으로, 누군가는 일상 속 대화로, 누군가는 나만 보는 일기장으로, 누군가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속삭이는 말로, 누군가는 문학으로, 누군가는 회화로, 누군가는 음악으로,  또 누군가는 죽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수신되길 바라며 이야기를 전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발신만이 목적이 될 때도 있다. <뮤즈> 속 오델과 올리브가 자신의 "이야기(욕망)"를 세상에 내놓고 싶어하는 방법은 '예술'이다.
 
<뮤즈>의 오델은 글(시에서 소설까지)로. 올리브는 회화로.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기를 원한다.

예술로 세상에 내 이야기를 내 놓은 적은 없지만,  예술로  세상에 내 이야기를 전한다는 건 내 안에 담긴 고독한 무언가와 정면대결하는 과정일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다고 일반화 할 수 없지만 <뮤즈> 속 오델과 올리브는 그랬다. 그리고 그 고독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가 바로 '뮤즈'였다. 오델이 사자 소녀 그림을 보고 느낀 강렬함을 그녀가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고만 표현하기엔 아쉽다. 올리브는 오델에게 파르나소스 산(아폴론과 뮤즈가 살았던 산)에 함께 가는 동행인이었을 것이다. 오델이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함께 걸어주는 동행인. 뮤즈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 뮤즈는 요정처럼 짧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다. 뮤즈가 어떤 순간적 느낌을 주는 존재였다면, 올리브의 이야기를 길게 다룰 필요가 없었다. 올리브의 이야기가 비슷한 비중으로 풀어가는 이유는 제시 버튼에게 뮤즈란, 순간의 존재가 아니라 과정을 함께 하는 친구라는 걸 전하려는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예술로 자신의 이야기를 승화하려는 것. 그리고 이를 막는 사회 통념이라는 벽. 하지만 이 벽 앞에서 좌절하기에 그녀들의 열정은 더 절박하게 간절하다. 그 간절함이 오델의 앞에 올리브가 나타난 이유일것이다. 그 연결을 보면, 정말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성별이 '여성'이었다는 건 특별하다. 제시 버튼 역시 이를 강조한다. 여성 예술가가 예술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느꼈던 억압을 자연스레 표현한다. 두 사람의 성별은 두 사람이 예술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와 관련있다. 이때 두 사람이 느꼈던 억압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고, 아버지로 부터 받는 억압에서 자기 자신이 막는 것까지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이는 1936년 스페인과 1967년 영국의 것으로만 멈추지 않고 2017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까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성'과 '여성'이 이어진다는 것은 여성이기에 느꼈던 그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30년이라는 시간동안 달라진 변화, 그 변화가 여성이라는 틀에 가두어야 했던 것을 풀어버리기에, 특별하다. 

오델과 올리브,

두 사람을 보며 겹쳐지는 작가들이 있었다. 혹시 제시 버튼에게 이어지는 작가가 그 작가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작가들은 그녀와 같은 영국 사람이니, 그럴 가능성이 왠지 더 더 더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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