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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시대 - 공감 본능은 어떻게 작동하고 무엇을 위해 진화하는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최재천.안재하 옮김 / 김영사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확실히 활용할 수 있는,
우리의 생각을 대단히 풍성하게 하는
하나의 수단이
여러 세기에 걸쳐 선택되어왔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은 이 세계에서 석유보다 더 부족한 게 되었다. 우리가 최소한 아주 약간만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굉장히 좋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정말 '공감의 시대'일까?
'공감의 시대'라는 뜻이 우리 사회, 인간 사이의 관계에 공감이 넘친다는 의미라면, 동의하기 망설여진다. '공감의 시대'라는 뜻이 공감을 필요로 하는 시대라는 뜻이라면, 우리의 시대정신에 '공감'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라면 동의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공감이 부족하기에.
오늘날 우리 사회를 가리켜 경쟁 사회라고 말한다. "경제학자는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소비하고 생산하기 위해서라고 하고, 생물학자는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단어들 속에 담겨있는 논리는 "경쟁은 미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듯 치열하게 남들과 경쟁해야 하는 요즘 공감은 성립할 수 없는 것 혹은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본주의 사회에 공감은 '언제 돌려받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재화'처럼 여겨진다. 좀처럼 보기 힘든 이 재화를 생산한다 해도, 내게 다시 돌아올지 불확실한 재화. 그렇기에 공감과 이해, 배려가 점점 줄어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게까지 보인다. 주말드라마의 어떤 캐릭터는 "역지사지"를 우리가 아는 의미와 전혀 다르게 풀었다. "역으로 지랄을 해줘야 사람들이 지 일인 줄 안다". 아이러니하게 이 대사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했다. 내 주변을 향한 배려가 담긴 공감이 부재했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데 세계적인 동물행동학자이자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은 <공감의 시대>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며, 공감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려고 한다.
우리가 거의 조절할 수 없는 자동적인 반응, 공감
"우리는 공감을 억누르거나 정신적으로 차단하거나 행동으로 옮기기에 실패할 수는 있지만,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소수의 인간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황에 감정적으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거의 질문된 적 없지만 아주 기본적인 물음은 이것이다. 왜 자연 선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 장단을 맞추어 다른 사람이 괴로워하면 괴로움을 느끼고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기쁨을 느끼도록 인간의 뇌를 디자인했을까? "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 있는 인간에게 '공감'은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다. 멘델의 유전법칙과 같이 기존 자연과학적 법칙의 핵심 테제였던 "생존경쟁"이 아닌 "공감" "공공성" "이타성"의 자연과학적 근거를 동물행동학과 진화론의 관점에서 타당성 있게 분석한다. 영장류를 비롯한 포유류와 조류 등의 동물들을 분석하며, 공감은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내재화된 본능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마주했을 때, 비용과 이익을 합산해서 도울지 말지, 공감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걸 우린 오랜 시간 진화를 거쳐오며 몸으로 체화했다. "진화가 일어나는 동안 행동의 결과를 반영하면서 자연 선택은 영장류가 적절한 상황에서 다른 이들을 도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공감 능력을 부여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망설인다면 오랜 시간 축적해온 데이터 대신 근시안적 데이터만을 고려한 어리석은 결정이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판단과 먼 비합리적인 결정을 합리적이라고 우기는 과오를 저지르는 것일지 모른다.
"자연 선택에 의해 만들어진 특성들은 풍부하고 다양하며,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낙관적인 사회적 성향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공감이 줄어들고 있고 이는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당연한 일이라는 가정. 공감은 회복해야 하는 우리의 소중한 옛 가치라는 이야기. 그 전제에는 '공감'을 인간이 만들어낸 가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경제학자와 정치인은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모범"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이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이 사실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져서 의심은커녕, 심지어 당연하다고 말한다. 물론 경쟁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인 본성 중의 하나다. 인간의 본성은 하나만 있지 않고 여러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감하는 인간, 이타적인 인간의 모습 역시 인간의 본성 중 하나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홀로 살지도,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며 살지 않았다. 인간은 무리를 지어 살았고, 공동체 안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사회적 삶에 맞게 만들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온 지난 역사를 설명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을 제외하고, 사람에게 가하는 가장 큰 형벌이 "독방 감금"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인간에게 사회와의 단절을 가하는 것이 가진 의미가 얼마나 큰 지 반추할 수 있게 한다.
저자는 "모든 사회는 이기적 동기와 사회적 동기 사이의 균형을 잘 맞춰 그 사회의 경제가 바로 그 사회에 확실히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즉 경쟁만으로 우리 사회는 '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도 만들 수도 없다. "자유시장 체제"의 선두에 서있는 미국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 더 나은' 사회일까? 초현대 사회의 미국은 화려하고 아름답고 빠르게 발전한 국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동시에 경쟁이 낳은 수많은 문제가 미국 사회를 병들어가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만을 강요하는 사회가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의 본성 공감에 대한 강조가 균형을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더 나은' 공감은 무엇일까?
높은 수준의 공감은 자아의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고, 자아의식의 여부는 거울 실험으로 알 수 있다.
프란츠 드 발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점은 공감에 있어서 "주체성"의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공감은 내가 타인에게 동화되는 과정이다. 다른 사람의 상황에 우리는 놓이게 된다. 만약 이때 개인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타인 지향적인 공감"이 이루어질 것이다. 다른 사람을 돕는 데서 기쁨을 얻지만 이때 얻는 기쁨은 타인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문제는 만약 이렇게 이루어지는 공감은 타인에 의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으며, 타인에 의해 기쁨이 아닌 다른 감정에 휩싸일 여지도 크다. "자아의식은 닻과 같이 자기 자신의 배를 감정의 파도 속에서 안정되게 유지할 수 있게 도와준다"라고 말한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의식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불만, 불안, 혼돈이 일어날 여지가 있다. 타인을 도울 때 일어나는 공감, 타인을 돕지 않으면 나까지 불쾌해지기에 하는 공감은 자신에게 이익처럼 보이지만 해가 되는 공감일 것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존재한다. 공감은 개개인의 자아의식이 존재 속에서 각자의 자유와 자율성 및 공감에 대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내려진 공감이 진화되어 온 공감이 더 발전한 형태가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자아의 결정에 따라 공감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이 질문은 이 시대에 공감한다는 것은 나에게 이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공감을 선택하지 않겠다는 지금의 상황에 돌아온다. 프란스 드 발은 "진화는 공감과 동정의 영역에서 우리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있든 없든 작용되는 독립형 메커니즘"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즉, 공감은 우리가 익숙한 경제학적인 메커니즘으로 환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사회적인 다리와 이기적인 다리라는 두 개의 다리"를 이용할 수 있다. 사회적인 다리를 쓰려고 하니 나만 쓰는 것 같아 아깝고 억울한 것 같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누구에게 돌아올까. 두 개의 다리 중에 하나의 다리로 걷기를 희망한다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그 걸음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에 많이 힘들기에 다른 선택을 하길 진화학자는 자신의 학문적 토대를 이용해 우리를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저자가 공감을 말하지만, 무조건적인 공감을 말하고 있지 않다. "공감이 진화적으로 오래된 것이라는 데서 굉장히 긍정적인 면을 본다. 그렇다면 공감이 거의 모든 인간에게서 발달될 확고한 특성이며, 그래서 사회가 공감에 의존하고 공감을 포용해서 키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공감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다.
"공감에는 우리가 반응해야 할 것을 걸러주는 필터와 꺼버리는 스위치가 있어야 한다. 모든 감정적 반응이 그렇듯 공감에도 전형적으로 공감을 촉발하거나 우리가 공감의 촉발을 허락하는 상황, 즉 '정문'이 있다."
하지만 공감의 보편성의 전제는 자기 정체성, 자아라는 걸 다시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 즉, 나에게 공감을 일으키는 정문 지킴이는 바로 '주체성'이다. 자신만의 rational이 확고하게 자리한 고유한 정체성이 중요하다.
우리의 '공감'은
재도약의 분기점에 서 있을까. 하강의 기점에 서 있는 것일까.
공감은 오랜 시간 진화 과정을 거쳐오며 인간의 본성의 영역에 장착된 메커니즘이 되었다. 물론 지금 현대 사회에서 공감이 불필요한 요소처럼 여겨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 개개인의 자아의식과 함께 존재하지 않는 공감은 불필요한, 무용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인류가 진화한 시간으로 볼 때, 지금의 고민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 동안 '공감'이 나아가는 발걸음을 거꾸로 돌리려고 했다. 나는 공감이 어디로 향하길 바라고 있을까. <공감의 시대>를 읽으며 공감한 난, 공감이 재도약의 분기점에 서있길 바라는 공감하는 사람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