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즈
제시 버튼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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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7년 영국 
1936년 스페인 

두 사람은 시공간을 초월해 만나는 그 순간을 표현한 작품이 바로 <뮤즈>다. 제시 버튼의 <미니어처리스트>를 읽었기에, 그녀의 신작은 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주인공이 '나'를 깊이 생각해 나가는 서사를 탁월하게 표현한다. <뮤즈>에서도 오델과 올리브가 자신의 욕망을, 열정을 피워내는 과정 속에 그들의 감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미니어처리스트>보다 훨씬 쉽게 마음 속으로 이야기가 전해졌다.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다. 그 이야기를 내 안에서 꺼내는 방식이 저마다 다를 뿐, 누구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침묵으로, 누군가는 일상 속 대화로, 누군가는 나만 보는 일기장으로, 누군가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속삭이는 말로, 누군가는 문학으로, 누군가는 회화로, 누군가는 음악으로,  또 누군가는 죽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그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수신되길 바라며 이야기를 전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발신만이 목적이 될 때도 있다. <뮤즈> 속 오델과 올리브가 자신의 "이야기(욕망)"를 세상에 내놓고 싶어하는 방법은 '예술'이다.
 
<뮤즈>의 오델은 글(시에서 소설까지)로. 올리브는 회화로.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기를 원한다.

예술로 세상에 내 이야기를 내 놓은 적은 없지만,  예술로  세상에 내 이야기를 전한다는 건 내 안에 담긴 고독한 무언가와 정면대결하는 과정일 것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다고 일반화 할 수 없지만 <뮤즈> 속 오델과 올리브는 그랬다. 그리고 그 고독을 함께 할 수 있는 동반자가 바로 '뮤즈'였다. 오델이 사자 소녀 그림을 보고 느낀 강렬함을 그녀가 예술적 영감을 받았다고만 표현하기엔 아쉽다. 올리브는 오델에게 파르나소스 산(아폴론과 뮤즈가 살았던 산)에 함께 가는 동행인이었을 것이다. 오델이 그 곳에 갈 수 있도록 함께 걸어주는 동행인. 뮤즈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스레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 속에 뮤즈는 요정처럼 짧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아니다. 뮤즈가 어떤 순간적 느낌을 주는 존재였다면, 올리브의 이야기를 길게 다룰 필요가 없었다. 올리브의 이야기가 비슷한 비중으로 풀어가는 이유는 제시 버튼에게 뮤즈란, 순간의 존재가 아니라 과정을 함께 하는 친구라는 걸 전하려는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예술로 자신의 이야기를 승화하려는 것. 그리고 이를 막는 사회 통념이라는 벽. 하지만 이 벽 앞에서 좌절하기에 그녀들의 열정은 더 절박하게 간절하다. 그 간절함이 오델의 앞에 올리브가 나타난 이유일것이다. 그 연결을 보면, 정말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의 성별이 '여성'이었다는 건 특별하다. 제시 버튼 역시 이를 강조한다. 여성 예술가가 예술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느꼈던 억압을 자연스레 표현한다. 두 사람의 성별은 두 사람이 예술로 자신의 이야기를 표현하는 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와 관련있다. 이때 두 사람이 느꼈던 억압을 단순하게 표현하지 않고, 아버지로 부터 받는 억압에서 자기 자신이 막는 것까지 다층적으로 그려낸다. 이는 1936년 스페인과 1967년 영국의 것으로만 멈추지 않고 2017년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에까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여성'과 '여성'이 이어진다는 것은 여성이기에 느꼈던 그 어두운 힘을 해방하는 방향으로 이어진다. 30년이라는 시간동안 달라진 변화, 그 변화가 여성이라는 틀에 가두어야 했던 것을 풀어버리기에, 특별하다. 

오델과 올리브,

두 사람을 보며 겹쳐지는 작가들이 있었다. 혹시 제시 버튼에게 이어지는 작가가 그 작가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작가들은 그녀와 같은 영국 사람이니, 그럴 가능성이 왠지 더 더 더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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