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초록색 낯빛은 가진 사나이가 윗몸을 드러낸 채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에게 첫 기억을 남겨주었던 ‘밤은 노래한다.’는 내가 그 모습에서 이미 느꼈지만 깨닫지 못했던 느낌을 다시 한 번 나를 덮치게 한 무시무시한 책이다. 책장을 이제 고작 한 장을 넘겼는데 무언가 나를 덮쳐왔다. 그 규모를 알 수 없는 거대한 크기의 파도가 나를 향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왔다. 그 거대한 파도에 휘말려 나는 아직까지 ‘밤은 노래한다.’를 잊지 못하고 있다. 그 거대한 파도가 무엇이었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에 혹은 알지만 평생을 가더라도 결코 답이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기 때문에 잊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느낌의 답을 지금 알아보려고 한다. 들뜬 눈꺼풀과 다르게 공허하게 뜬 그 사나이의 눈을 이제는 감겨주고 싶기 때문에.

거대한 느낌이 나를 덮쳐온 그 첫 순간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이 책을 모두 읽어낸 바로 그 때도 그랬듯이 반 년 정도가 흐른 지금 다시 돌아보았을 때도 그 첫 순간을 너무나 모호하다. 책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그 첫 순간은 한 순간에 첫 순간이 아닌 잘못된 기억이 되었다. 파도는 항상 끊임없이 나를 훝으며 너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내가 휘청거릴 정도로 강하게 쳤던 파도의 순간은 기억 한다. 그것은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민생단 사건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던 한홍구 교수의 해제에서 등장하는 네 글자 때문이었다. 마녀사냥. 중세 시대 서양에서 벌어졌던 마녀재판이 소름끼치게 떠올랐던 그 순간에 가장 크고 강한 파도가 나에게 철썩 거렸다.

민생단 사건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역사이자 현재이다. 서로를 믿지 못해서 적의 손에서 죽기보다 동료의 손에서 죽는 일이 더 허다했던 왠지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로 이루어진 소설에서 나올 것만 같은 그 악몽 같은 일이 바로 북간도의 역사에 있다. 사람을 혼자 살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동물이다. 그 수없이 얽히고 섞인 관계 속에서 불신이란 가장 무서운 적 중에 하나다. 불신하게 만드는 자신 또한 불신과 함께 하는 적이다. 우리가 이 불신 때문에 얼마나 많이 싸우는가? 그러나 불신을 만드는 나와 싸운 일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자. 다른 사람을 아무런 티끌도 없이 믿을 수 있는가?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나라고 해서 별반 다를 바 없다. 믿지 못한다. 만약 북간도의 그 곳이었다면 최소한 나는 순진하게 굴고 싶다. 서로가 눈을 마주 보며 믿는다고 말하며 서로 껴안고 싶다. 더욱 돈독해지는 믿음으로 민생단 사건은 소설 속에서의 이야기이고만 싶다. 하지만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현실인 민생단 사건은 이렇게 소설가의 주목도 받았다. 잔다르크도 마녀로 몰려 영웅은 그렇게 한 줌의 재로 타버렸다. 민생단 사건 속에서 있었던 그 무수한 사람들 중에 잔다르크와 같은 영웅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국민의 혈세’와 같은 사람과 평범한 사람이라도 섞여있었을 그 곳은 아마도 평범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씻겨가 버린 북간도의 이야기는 존재하고 만다. 21세기에서 사는 나라는 마을 다리 아래 하천이 얼 정도로 추운 실체가 없는 겨울 바다의 파도로 맞고 있다.

파도를 맞고 서있으면 3.1운동 때에 나라를 잃은 한민족이라는 이름 하나로 한반도의 주인 한민족을 뜨겁게 들끓었던 모습들이 무색해지는 것 같다. 그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바이올린 소리와 시 그리고 노래다. 장님인 서금원이 토벌대가 쳐들어오는 와중에 바이올린을 키며 노래를 부른다. 여옥이도 이미 노래를 불렀고 박도만 역시 노래 한 곡 뽑는다. 노래로 대신하고 또 시로도 대신하며 그렇게 아무것도 보이질 않을 밤에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은 밤에 들려온다. 서로 믿고 따르는 것이라는 사랑얘기도 하지만 어쩌면 사랑이 끊어져버리고 만 것일까.

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나의 손금과 지문도 들여다본다. 거대한 그 파도가 나에게 왔던 것이 맞을까? 현실이었을까? 실체는 없고 존재 가능성에만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그 신경이 어느 날 총성 하나로 끝이 나기도 하는 피의 곳이 되어버리는 몹쓸 곳, 중국 그 광활한 대륙 어딘가의 이야기가 과연 과거의 이야기일까? 아직도 불신이라는 무지한 본성은 세월이 가도 기미 하나 생기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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