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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y Knew Mr. Knight (Paperback, New ed of 1934 ed)
Dorothy Whipple / Persephone Books Ltd / 2000년 9월
평점 :
살라망카에는 아주 특이한 모양새의 공공 도서관이 플라사 마요르 근처에 있다. 15세기에 지어진, '까사 데 라스 콘차스'란 이름처럼 외벽에 조개 껍질 모양의 치장벽토가 다닥다닥, 아니 듬성듬성 붙어 있어 유명한 곳이다. 단순하고 얌전한 생김새의 2층 짜리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낡고 고즈넉한 파티오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면, 혹은 사진 찍느라 바쁜 관광객들을 갈짓자로 가로지르면 아주 멋진 현대적인 인테리어가 깔끔하게 배치된 도서관이 나온다.
외관도 멋지지만 안은, 더 멋있는 곳이라 만약 이곳에 오면 꼭 안도 둘러보라고 권하고 싶다. 대학교 도서관이야 철제 가로대로 다들 막고 있지만 '공공 도서관'은 그런 장치가 없다. 5층(그네들 계산으로)으로 얼기설기 엮었는데 생각보다 안이 더 커 놀라는 전화부스처럼 내용물도 방대하고, 갖춤새도 아름답고, 누군가 정원 꾸민듯 깔끔하게 꾸며놓기도 했다. 다만 문제가 바닥을 보호하느라 그랬는지 마루장을 깔았는데, 세월에 어긋났는지 내딛는 걸음마다 찌룩거려서 발끝걸음으로 숨도 죽이고 걸어야 한다.
거기 (그들 기준으로) 마지막 5층 한 구석을 한 바퀴 빙 돌아 들어서면, 외국어 원서들이 꽤나 풍성하게 갖춰져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지, 파릇파릇한 학생들이 공부 금지의 기준을 어기고 옹기종기 모여, 좁은 책상에 머리를 맞대고 공부를 하고 있다. 모른 척 찌룩거리며 책들을 둘러보는데 회색의 두툼한 (나름대로 다시 옮기면) '모두들 나이트 씨를 알았다'가 강렬한 회색의 칙칙한 맨 아래 책장에서 찌푸리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아, 저것은 바로 그!'
페르세포네 출판사의 회색 시리즈의 칙칙한, 약간은 푸른 기와 어찌 보면 노르스름한 기운이 닮긴 책이다. 아는 사람은 다들 아는 페르세포네 출판사는 런던 홀본에 있는 작은 출판사이고, 20세기 초 여성작가들 시리즈가 유명한 (걸로 알고있다), 아마 찰스 디킨스 박물관이 근처에 있다는 자잘한 핸드폰의 글씨를 따라, 램즈 컨듀잇 스트리트!로 우연히 접어들었다가, 카페 마냥 나와 앉아 회색 안내 입간판을 보고
'저거! 저거!'
아무도 못 알아들을 한국말을 떠듬거렸던 기억이 난다. 보아하니 그냥 책방 같아서 '들어가지 말라'는 동행의 충고를 못 들은 척 하고 네 평 남짓한 가게에 들어서니 내 옆의 드래그 바처럼 온통 회색이다. 책들이며, 입간판이며, 바깥에 간판이며 다들 뚱하니 회색으로 쳐다봐서 절로 발걸음이 지루박으로 주춤거리고. 그 책들도 나란히 각을 세워 찬찬히 끝까지 나열해 놓아, 암자의 수도승처럼 회색 등을 보이고 수행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한 머리로 눈을 하늘로 옆으로 굴리며 눈치를 안 살필 수 없었다. 열심히 책에 대해 묻는 손님과 주눅든 내게 관심은 다행히 전혀 보이지 않는 점원을 게걸음으로 피해 들어가 '만지지 말라'는 동행의 충고를 무시하고 감격해서 슬쩍 만지작거려 보고 들추어도 보았다. 인터넷에서 볼 때는 화사한 책표지들만 보았는데, 왜 여긴 온통 회색으로 '치장'해 놓았을까, 한쪽은 또 그래도 옛날 판본인지 울긋불긋 화사한 색깔의 표지들의 책들이 있기도 했고, 그 표지 디자인으로 공책이며 책표까지 팔고 있긴 하지만 여하튼, 한쪽 구석에서 열심히 상자에 책을 담아 싸고 있는 것들도 다 회색 표지이다. 활짝 열어둔 문 저쪽으로는 아마 출판사인지 책상이며 책들이며 어지러운 더 큰 공간에 반대편에서 들어온 창문에 시꺼멓게 구멍처럼 엿보였다. '함부로 기웃거리지 말라'는 동행의 경고는 귓등으로 흘리고 발을 옮기자니, 동행이 기어이 돌려 세워 차마 고개까지는 들이밀지는 못했다.
시장 바구니에 책을 두 권 씩 나눠 담고 집에 돌아와, 못 읽는 스페인어 망가는 그림만 보고 넘기고
대여 기한이 20일이나 되는 500 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회색 책에 돌입했다.
페르'세포'네 북스의 책을 읽으면 느끼는 거지만, 20세기 초 여성작가들의 책들은, 읽어도 그만, 잊혀도 그만인
그래도 잊히면 아쉬운, 아쉬워서 아쉬운 건지, 나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도, 그 의미가 변해서 그런지,
대단한 작품은 거의 없다. 그래도 독자층이 있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대견스럽게 꿋꿋하게 펴내는 걸 보면, 뚝심은 좋은 건지,
그래서, 큰 기대는 않고, 아주 옛적 스쳐 지났던 인연에 반가워 집어든 책이다.
(스포일러----)
내용은 블레이크 가족을 중심으로, 다 허리띠 졸라매던 어려운 세상에, 어쩌다가 돈놀이 하는 재력가와 엮이게 되고
승승장구 단맛을 보던 가족들이
아주 밑바닥으로 세차게 떨어져도 한참으로 떨어지는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적절히 시점을 바꿔 가며, 내면들을 언뜻 언뜻 내비치며 선보이고 있다.
맑다 싶으면 구름이 끼고 한 차례 퍼붓는 영국 날씨처럼 상큼하게 시작했으니, 그렇게 되리라 짐작으로 그럴 줄 알았지만,
정말 한치 눈치도 채지 못했던 건
'종교 소설'이라는 사실이다. 30년대, 여성, 중산층 작가라는 것을 고려하면 뒤늦게 그럴 수 있겠구나 가늠이 가지만,
소설의 끄트머리에 갑자기 한 세 페이지 쯤, 당혹스럽게 돌변을 하면, 이웃집 소문 좋아하는 아낙이 밑바닥으로 떨어지더니
드디어 '미쳤구나' 짐작을 하듯이, 너무 갑작스런 조증 같은 환희에 너무 힘들어 실성을 한 줄 알았다. 이후로는 꼬리를
감추고 똑 부러지는 그나름 행복한 결말을 맞기는 하지만.
도서관의 책은 대출 기한이 있기 때문에, 빨리 읽거나, 가차 없이 내다버리거나, 양자택일이 최선이다.
요즘 열심히 읽고 있는 '두브라브카 우그레시치' 크로아티아 여성 작가의 작품들처럼, 커피 한 잔 마시며 대단한 작가야,
하고 한 세 페이지 읽다가 딴 짓으로 까먹는 책들과는 접근이 다르다. '썩 꺼지라'는 핀잔을 받들어, 밤 늦게 부엌에서 몰래
나름 감탄을 하며 한탄을 하며 아쉬워하며, 머리끄댕이 잡아대는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다 읽어내려가는데, 그만 저 세 페이지가 별 두 개를 까먹어버려, 첫장을 왜 넘겼나 후회가 꺼꾸로 조금 치솟기는 한다.
(스포일러 끝)
여하튼, 대출 기한보다 짧은 책의 유통기한에 대해 생각을 해보며, 한숨을 쉬고 주절거려 본다.